#34
무의식적으로 골목 안에 시선을 준 순간, 순식간에 주언의 몸이 골목 안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휙!
“갑자기 이게 무슨…! 이봐요!”
낚아채진 팔을 쳐내려고 했지만, 주언은 곧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엄청 취했나 봐.”
남자의 목소리에 심장이 잠시 멈춘 줄 알았다. 짙은 향기가 폐까지 스며들어 주언을 전율시켰다.
“…….”
주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앞을 막아선 남자를 봤다. 가까이 있지 않았는데도 짙은 술 냄새가 짙게 풍겼다.
“아니면 이제 진짜 미친 건가.”
이런 취객 정도는 뿌리치고 가면 된다. 문득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희미하게 윤곽만 보이는 얼굴이 궁금했다. 이 남자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대체 어떤 표정을 짓고 잇길래….’
이런 절망에 찬 목소리로 자신을 붙잡아 세웠는지 궁금했다.
주언의 손목을 잡는 힘이 너무도 처연하고 애달파서, 쉽게 쳐낼 수 있는데도 주언은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눈을 빠르게 깜박이자 곧 어둠에 익숙해진 두 눈이 남자의 얼굴을 담아냈다.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다 큰 남자가 울고 있었다. 침묵처럼 흐르는 눈물에 주언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눈을 오랫동안 깜빡이지 않아서인지 눈가가 뜨거워졌다. 남자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이번에는 주언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저기… 왜 우세요….”
취해서 하는 행동에 마음을 쓸 만큼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심장이 덜컹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숨죽여 울었다. 젖어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심장에 달라붙었다. 주언은 문득 불길한 예감을 포착해냈다.
“나 착하게 기다렸는데.”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끓는 듯한 감정이 느껴졌다. 심장에 달라붙은 그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떼어지지 않을 거라는 예감.
“저기요. 대체 그게 무슨 소리….”
주언의 부름에도 남자는 계속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을 내뱉었다. 남자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쉴 새 없이 속삭였다.
“오늘은 가지 말아주라.”
매일 그냥 닿지 않을 정도로 멀리 서 있었잖아.
애절한 목소리에 주언은 순간 숨을 참는 것도 잊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얼굴의 윤곽이 더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아는 사람일 확률보다 이 남자가 취해서 사람을 착각할 확률이 더 높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은데요.”
“…언아.”
순간 자신의 이름이 불린 줄 알았다.
“죄송한데… 저는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에요.”
“…….”
“그러니까….”
벗어나야 해. 적색등이 켜졌다. 그의 한마디가 묵직하게 가슴을 찔렀다. 술김이라고 변명할 수조차 없었다. 어느새 술기운은 순식간에 증발했으니까.
“보고 싶어.”
절절하게 끓는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찐득하게 주언의 발바닥에 달라붙었다. 발걸음이 그대로 굳었다.
“누구를 찾는지 몰라도.”
이 남자가 이렇게 찾는 사람은 누구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
“전 그쪽이 찾는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주언은 이상하게 남자와 시선을 마주칠 수 없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남자가 주언의 턱을 잡아 올렸다. 강제로 시선이 맞춰지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맞물렸다.
“이제 내가 돌아버려서 환상을 보고 있는 거 아는데. 환상마저 나 놔두고 가는 건 너무 비참하지 않냐.”
“…….”
“꿈이라도 너무하다. 너.”
헛소리일 게 분명한데 고장 났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던 심장이 손끝에서부터 뛰는 것 같았다.
“집이 어디예요?”
이상했다. 심장이 간질거리고, 몸 안에 있는 혈관이 확장되어 온몸에 피가 빠르게 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감정 자체가 메마르게 됐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다. 윤재도 어색한데 다른 남자는 더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비단 생각뿐만이 아니라 이제껏 그래 왔으니까. 윤재에게도 뛰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더더욱 뛰지 않았다.
어쩌면 윤재가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이 되돌아와도 자신이 고장 나서 괜찮아질 날이 오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쿵쿵. 주언은 요동치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그와 닿은 부분에서부터 흘러넘치는 감각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감정을 너무 애타게 기다렸어서, 미친 걸지도 모른다. 만약 바람대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거라면 상대가 잘못됐다. 제 의지를 벗어난 감정이 날뛰고 싶다고 주언의 귀에 속삭였다.
술 냄새를 풍기고, 거나하게 취한 눈앞의 남자라면.
주언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상대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착각하고 있을 정도로 취해 있었다. 이런 충동은 처음이었다. 남자의 팔이 허리를 옭아맬 때마다 기분이 쉴 새 없이 일렁였다.
“…나랑 같이 있자.”
내일 일어났을 때 또 죽을 만큼 허망하겠지만.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심장에 박혔다. 공허함에 넘실거리는 목소리에 열기가 더해지면 어떤 소리를 낼까.
주언이 혼자 오래 있었는지 차게 식은 남자의 뺨을 살짝 건드려 보았다. 남자가 자연스럽게 뺨에 닿은 손에 볼을 비볐다. 응? 애원하듯 조르는 목소리에 주언은 생각하기도 전에 답을 내뱉었다.
“저는….”
윤재에게 가야 했다. 5분만 더 걸으면 윤재가 있는 곳에 도착할 텐데… 주언이 흘끗 골목 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강제하는 게 아니라 애원하고 있었고, 두 발자국만 걸으면 골목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취해 있었다. 그를 벗어나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왜인지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제발.”
남자의 눈이 해사하게 휘었다. 맹수와 같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자신에게 무해한 척 다가오는 모습이 시선에 박혀 떨어질 줄 몰랐다.
“…내가 여기 있으면….”
“응.”
“뭐 할 건데요?”
그래서일 거다. 자신답지 않은 충동적인 질문을 내뱉게 된 것은.
윤재를 만나러 가기 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놓고 가겠다며 분주히 움직이는 주언을 뒤에서 지켜보던 구영이 말했다.
‘형, 만약에 애인 보러 갔다가 애인한테 다른 상대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어쩔 거야? 이제 가서 맞닥뜨린 거지.’
드라마 광인 구영이 보통 그렇게 능력 있는 남자는 출장을 빌미로 바람을 피우곤 한다며 드라마에서 나온 장면을 주언에게 농담 삼아 말했다.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구영이 악역을 자처해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주언에게서 끌어내고자 한 것뿐.
‘에이….’
하지만 펄쩍 뛰며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왜 그렇게 반응이 미적지근해? 화내야지. 그럴 리 없다고.’
그럴 때는 놀라야 하지 않느냐며 구영이 구시렁거렸다. 구영 딴에는 긴장을 풀라고 한 말이라는 걸 알았다. 다만 구영의 말은 의도치 않게 억눌러왔던 주언의 가장 불안정한 감정을 예리하게 찔러왔다.
‘…그냥 상상이 안 가서.’
윤재를 믿긴 믿었다. 하지만 계속 기억이 안 난다는 이유로 감정적 을로 지내며, 이해 가지 않는 감정을 받아내는 것에 지쳤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차라리 그러는 편이 속 편할 것 같았다.
기억 잃은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억울하다가도, 퍼뜩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스스로의 저열한 생각에 목 끝에서부터 쓴 물이 올라와 주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예전에도 이런 쓰레기였던 걸까?’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
막연히 했던, 쓰레기는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내 앞에서.”
남자가 주언의 턱을 아프지 않게 쥐고 들어 올렸다. 설탕으로 만든 유리처럼 바스러진 상념 끝에서 남자가 숨 죄이는 시선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끓인 설탕처럼 뜨겁고, 달콤한 동시에 순식간에 어두워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그의 분위기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달고, 조금 쓴 시선이 주언의 대답을 끌어냈다.
“…그쪽이 뭐라고 대답할지…에 대한 생각.”
주언의 말에 남자가 웃었다. 불처럼 앞뒤 재지 않고 돌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이성까지 남아있다면 손이 땀에 젖을 정도로 붙잡고 둘만 있는 공간에 가거나. 하지만 남자는 생각 외로 아주 이성적으로 주언에게 속삭였다.
“우리 뭐 할까.”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요?”
“너는 뭐 하고 싶은데?”
남자가 주언의 손목을 잡아 제 얼굴 쪽으로 이끌었다. 뜨거워진 손가락이 남자의 살갗을 쓸었다.
“…그쪽이 하고 싶은 거…?”
결정을 남자에게로 떠넘겼다. 일탈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모든 선택권은 남자에게 넘기고, 자신은 흔들리는 파도 속에 온몸을 맡기고 싶었다.
“하하….”
“뭐가 그렇게 웃겨요?”
주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불쑥 제 뺨에 닿은 주언의 팔목을 이끌었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자 남자의 팔이 단단히 주언의 허리를 옭아맸다. 그와 몸이 순식간에 밀착했다. 열이 전염될 수도 있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 그가 속삭였다.
“그런 말 할 때는 조심해야지.”
“…….”
“내가 어떤 생각을 할 줄 알고.”
“무슨 생각하는데요.”
자신이 내뱉는 공기마저 짓이기고 싶다는 듯한 남자의 번뜩이는 안광이 무서울 법도 한데. 기이한 일이었다. 목이 탔다. 입술로 혀로 축이며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려 했으나 악수였다. 이 갈증을 해소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의 목을 응시했다. 담금질 된 충동이 주언에게 일탈을 종용했다. 그의 뜨거운 이마가 어깨 위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