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말 못 해.”
“…네?”
“말하면 겁먹어서 도망칠 거 같거든.”
“…그럼 그냥 갈까요?”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해요?”
“나 무서워하지 말라고.”
“무슨 말이 그래요.”
“나 무서워하지 마.”
“…안 무서워해요.”
그렇게 사납게 말해봤자 이미 버려진 강아지처럼 풀죽은 모습이라 하나도 안 무섭다.
“밥은 먹었어?”
“…네?”
“밥. 먹었냐고.”
남자의 대화의 흐름을 쫓아갈 수 없었다. 일단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아, 고개를 작게 휘젓자 남자가 팔을 이끌고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잠, 잠깐만요!”
겨우 정신을 챙기고 그를 뿌리쳤을 때는 이미 목적지에 다다른 후였다.
“여기 가자.”
“…갑자기?”
남자가 도달한 곳은 햄버거 집이었다. 프랜차이즈가 아닌 작은 골목에 있는 버거 가게. 귀여운 웃는 마크가 그려진 가게를 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니.’
놀라는 것도 잠시 남자는 안으로 들어갔고, 주문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허름한 외관과 다르게 가게 내부는 깨끗했다.
“이거 우리가 사 먹던 거잖아.”
남자가 턱을 괴며 피식 웃었다. 봐서는 안 되는 장면을 본 기분. 주언은 괜히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윤재가 싫어할 텐데….’
윤재는 외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인공 장기를 달아 소화 기관이 약해졌으니 되도록 집에서 먹는 게 낫다고 했다. 그의 말에 충분한 일리가 있었다. 간단한 음료 정도는 괜찮았지만, 한 번도 윤재가 바라던 것을 어겨본 적 없어 잠시 망설였다.
“햄버거 하나 안 나온 거 같은데요.”
“네 것만 시켰어.”
“…그쪽은요?”
“난 배불러.”
“네? 저도 딱히… 배고픈 건 아닌데….”
대체 여기에 왜 데리고 온 거지. 나도 그다지 배고프지 않다고 말하려던 주언은 햄버거의 향긋한 냄새에 홀렸다.
“너 좋아하는 거잖아.”
양팔을 껴안고 테이블에 몸을 기대며 이쪽을 쳐다보는 남자의 태도에 눈을 질끈 감고 햄버거를 입 안에 욱여넣었다.
“맛있지.”
“…음? 음.”
볼 안에 음식이 가득 차 제대로 말하지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음식의 질이 좋다기보다는, 버거 재료가 주언의 입맛에 맞았다. 남자는 목적이 먹이는 게 다라는 듯, 주언이 마지막 한입을 먹을 때까지 턱을 괴고 이쪽을 바라봤다.
“…이상한 주사가 있네요.”
“뭐가.”
“그… 대화 끝에 도착한 게 여기잖아요.”
“배고파했잖아.”
햄버거를 문 순간, 내가 배가 고팠었구나 싶었는데 이 사람은 어떻게 아는 걸까.
‘우연히 맞은 거겠지.’
나는 저 남자가 찾고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 생각이 들자 입맛이 뚝 떨어졌다. 주변에서 흘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져 새삼스럽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잘생겼다. 어두워서 더 잘생겨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다. 제대로 된 조명 아래에 있으니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봤던 모습보다 훨씬 더 잘생겼다.
반듯한 이마, 조금 짙은 눈썹, 곧은 코, 금욕적으로 보이는 단단한 턱.
“콜라 마셔.”
괜히 목이 타서 마른침을 삼키자, 상대가 재빨리 저에게 콜라를 건넸다. 목이 막힌 게 아니라, 그쪽을 보느라 목이 턱 막혔다곤 할 순 없어 콜라를 쭉 마시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술 취한 사람 상대로 뭐 하나 싶었다. 이성을 차리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배가 차서 그런지 술기운은 거의 다 가셨다.
“나가죠. 이제.”
자신이 술김에 정말 잠시 미쳤던 모양이었다.
딸랑. 밖으로 다시 나오자, 안이 따뜻했던 만큼 아까보다 훨씬 더 춥게 느껴졌다. 이걸로 일탈은 끝이다. 크게 한 건 없지만, 그래도 기분이 조금 개운해졌다.
“어…?”
남자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자리 잡았다.
“저기요!”
익숙한 그의 행동에 같이 걷던 주언이 걸음을 멈췄다.
“이제 저… 가 봐야 되는데.”
“어디에?”
“가 봐야 되는 곳이 있어서….”
시간을 보니 자정에 가까웠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렀지?
어서 가봐야 했다. 현실에서 도망쳐봤자, 결국 언젠간 현실 앞에 다시 서야 할 수밖에 없었다. 영원한 낙원은 없다. 잠시 잊고 싶었으나, 그 망각은 현실의 더 큰 벽을 느끼게 해줄 뿐일 테니 지금이 깨어날 적기였다.
“아니.”
낮은 목소리가 주언을 옭아맸다.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감정은 그림자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내가 하고 싶은 거 하기로 약속했잖아.”
어느덧 또렷해진 초점이 선명하게 주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옆 골목으로 주언을 끌고 들어갔다.
“아니 그건 방금 뭐 먹은 걸로…흐읏.”
뜨겁고, 축축했다. 귀에 닿은 입술이 귓불을 씹었다.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는 자신에게 온전히 몸을 기댄 주언을 받쳐 들었다.
“그러니까 가면 안 되지.”
“…네?”
“이제 시작인데.”
그가 그냥 모양새만 맹수처럼 보이는 초식 동물이라고 판단했던 게 얼마나 안일했는지. 깼다고 생각했던 술기운이 다시 혈관을 타고 돌기 시작했다. 맥박이 뛰는 속도가 서서히 올랐다.
쿵. 쿵. 쿵.
술에 취했다는 변명을 댈 수 없는 걸 아는데 그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한껏 달콤하게 구는 그가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늪과 같다는 것을 주언은 이제야 알았다. 그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는 듯 주언을 이끌었다.
골목 반대쪽 끝에 나온 건 아파트였다. 외관이 아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청결하게 관리되어 있는 아파트.
“…이상하네.”
분명 처음 보는 아파트였다. 하지만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곳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기시감.
“들어가자.”
남자가 주언을 채근했다. 정말 미친 짓이다. 처음 보는 남자의 아파트에 들어가다니. 여기서라도 그만둬야 한다. 이대로 들어가면 끝이다.
남자는 저에게 하고 싶은 짓을 하면, 주언이 무서워할 거라고 겁까지 줬다.
“좋아요.”
하지만 윤재에게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 거세게 일렁이는 감정은, 모든 논리적인 생각을 한꺼번에 집어삼켰다.
집에 들어선 순간, 집에 고여있는 집 특유의 공기의 형질에 솜털이 곤두섰다. 본능이 자신에게 쉴 새 없이 속살거렸다. 이곳에 발을 들이민 순간 전과 같지 않을 거라고.
“읏.”
도망칠 기회는 무수히 많았다. 눈앞의 남자는 아주 나쁜 사람일 수도 있었다. 미칠 것 같았다. 생각은 이성적으로 굴라고 발버둥 쳤으나 모든 감각은 이 남자를 갈구하고 있었다. 이대로 빠져 죽어도 좋다는, 한심하고 충동적이기 그지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야속하게도 술기운이라는 변명조차 댈 수 없을 정도로 정신만은 또렷했다.
문이 닫히는 순간, 남자가 있는 힘껏 주언의 몸을 껴안았다.
“흐으….”
간절하게 등을 더듬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선명하게 느끼며 그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남자가 가볍게 주언의 허벅지를 안아 들었다. 주언이 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츳. 츠읏. 츳.
뜨거운 숨이 목에 닿았다. 팔딱거리는 맥박 위로 느른하고 집요한 궤적이 그려졌다. 화인이 새겨지는 것처럼 피부 위가 화끈거렸다. 겉옷이 순식간에 바닥에 나뒹굴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등에 소파 가죽이 느껴졌다.
“하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거친 숨이 뱉어졌다. 굶주린 짐승처럼 달려드는 그의 뺨을 쥐었다. 그가 자신만을 오롯이 바라보았다. 마치 세상에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이.
손을 움직여 그의 뺨을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그가 주언의 손목을 잡아, 손바닥에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타액에 젖은 입술이 닿았다.
‘뭐가 아쉬워서 나한테 이렇게 매달리는 걸까.’
모든 사람이 갈망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이 남자는 밤 아래 버려진 짐승처럼 배회하고 있던 걸까.
‘내가 아니지.’
그는 주언의 너머로 다른 누군가를 투영하고 있었다.
이런 남자를 기다리게 할 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원래 아무나 집에 들이고 그래요?”
질문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옷 사이로 손이 파고들었다.
“네가 어떻게 아무나야.”
아까 전까지만 해도 이 남자도 술이 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남자가 주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너무하네요.”
“응. 내가 다 잘못했어.”
“하… 내일 이제 나는 후회할 명분도 없는데.”
주언이 원망스럽다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남자는 여전히 술에 취해서 실수했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는 상태였다. 신경이 거슬리긴 하지만, 하루쯤은 이 남자가 원하는 대로 어울려주고 싶기도 했다.
지금 스스로도 자신이 낯서니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이름… 불러줘요.”
내 이름 말고. 그쪽이 나를 투영해서 보고 있는 인물.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속삭였다. 숨 쉴 때마다 섞여 들어오는 이 집 안의 공기에 가슴이 가빠왔다.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1지구에 올라와 마주친 남자에게, 몇 년 동안 애인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감각을 느끼게 될 확률은. 다리 사이가 벌려지고, 그 사이에 그가 자리 잡았다.
“사랑해.”
그리고 그 상대가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확률은.
“주언아.”
그리고 그 착각하는 상대가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확률은.
축축해진 목소리로 불린 이름이 울렸다. 뇌격을 맞은 것처럼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린 이름의 파괴력이 상당했다.
과연 얼마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