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36화 (36/112)

#36

“주언아.”

재차 이름이 불렸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마치 정말 운명의 실이라도 이어져 있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저 우연일 게 분명한데,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아주 특이한 이름은 아닌 걸 아는데도.

“응.”

그가 토해내는 절절한 진심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주언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한번 터진 봇물은 멈춰질 줄 몰랐다.

“네가 없는 하루하루가 너무 버거워. 제발… 나도 데려가 주라.”

쇄골에 이마를 묻은 그가 애원했다. 불이 다 꺼진 집 안은 적막했을 것이다. 주언도 이런 적막함에 숨이 막혔던 적이 있었다. 윤재가 부담스러운데도 기다릴 사람이 윤재밖에 없을 때. 홀로 집을 지키며 적막함에 파먹힐 것 같았을 때가 있었다.

이 사람을 두고 간 사람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토록 애달파하는데 왜 떠난 걸까.

‘나였다면….’

절대 외롭게 두지 않았을 텐데.

이 남자의 이름조차 모르지만,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야속했다. 그리고 조금 부러웠다.

‘미쳤어.’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할 상대는 윤재인데 대체 왜.

주언은 그의 머리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맥박이 뛰는 소리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도록.

“흐으…읏.”

그의 얼굴이 천천히 아래를 향했다. 가슴팍에 이마가 닿았다, 곧 배까지 내려갔다. 더 아래까지 내려가자 주언의 가슴이 가파르게 올라갔다 내려가길 반복했다.

죄책감과 한데 엉켜 든 쾌감은 한없이 깊었다.

**

“윽.”

명훤이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무거운 눈을 깜박거려 보았다. 마치 장막이 드리운 것처럼 암흑밖에 보이지 않았던 시야가 서서히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X발.”

뇌가 흘러내릴 것같이 아팠다. 분명 진정제라고 했는데, 순수한 약물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귀소본능 덕분인지 다행히도 집이었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명훤은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이 되면 잠이 더 오지 않아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해 그대로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다만 어제는 처음으로 던전 내부를 클리어 하는 모습을 대중에게 전격 공개했고, 예상했던 것보다 반응이 뛰어나 회식을 했다.

명훤이 그 주역이었으니 당연히 명훤도 회식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피곤한데 술을 마셔서 드물게 조금 취했을 때였다.

‘조금 특별한 진정제야. 병원에서 처방받는 거랑은 차원이 다를걸.’

‘꺼져.’

‘기관에서 나온 신약이야. 안정제. 아직 시판되는 건 아닌데 안전한 거야.’

‘…….’

‘지금 네 상태 안 좋잖아.’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이호윤은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신약을 의원님이 주라고 해서 주는 거라며 툴툴거렸다. 그대로 끝인 줄 알았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마시던 잔에 약을 탔던 모양이었다. 잠깐 방심했던 게 문제였다.

평소라면 절대 넘어가지 않았을 얕은 술수였지만, 에일 듯한 겨울바람은 주언의 그림자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후우….”

짙은 한숨이 연거푸 나왔다. 여전히 주언을 향한 그리움이 자신을 속절없이 흐트러지게 만들었다.

개 같은 꿈까지 꿨다. 자신 없이 잘 살고 있는, 자신을 모르는 우주언이 있는 꿈이었다. 어젯밤 일이 흐릿하긴 했지만 그 사실만은 뚜렷하게 기억났다.

입맛이 썼다. 꿈에서라도 주언을 보고 난 날이면 하루 종일 기분이 바닥 쳤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온몸이 찝찝했다. 마치 땀을 한바탕 흘린 듯한 찝찝함이었다.

“읏.”

머릿속으로 기억에 없던 장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뭐지.”

마치 누군가와 함께 밤을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그럴 리 없었다. 머릿속에 든 생각을 빠르게 지웠다. 아무리 약에 취했었다고 해도 명훤은 자신이 허튼짓을 안 했을 거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쏴아아아.

바깥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멈칫. 밖에서 물 트는 소리에 어제 일을 더듬던 것을 멈췄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시간이 멈춰 있는 우리의 공간에 타인이 침범했다. 형용할 수 없는 불쾌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럴 리 없었다.

달칵. 문을 열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몇 년 동안 잊지 않으려고 매일같이 그렸던 모습이.

‘아직도 약에 취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잃어버렸던 일상이 되돌아와 있을 리 없다. 우연히 닮은 사람을 데리고 온 건가. 환상을 보고 있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닮은 사람을 주언과 겹쳐 보고 있는 걸까.

전에도 이런 식으로 모르는 사람을 길 가다가 멈춰 세운 적이 있었다. 환상을 본 적도 있었다. 아마 자신이 주언을 그리워하다가 미쳐버린 걸지도 몰랐다. 이렇게 생생한 적은 처음이었다. 약의 효과가 다 가시지 않았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만약 환상이 아니라면.

쓰레기 같은 자신의 행태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우리의 낙원에 타인의 침입을 허락하는 것도 아니고, 직접 데리고 오다니.

명훤이 눈을 쓸었다. 평소와 달리 눈이 뻑뻑했다. 손바닥으로 눈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상대도 명훤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몸을 휙 돌았다.

“마음대로 돌아다녀서 죄송….”

“이만 나가주시죠.”

주파수가 맞지 않은 라디오가 머릿속에 들어간 것처럼 시끄럽게 울리며 신경 줄을 계속 건드렸다.

명훤히 말허리를 잘랐다. 진짜 주언일리가 없었다. 주언이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퇴색된 믿음을 집요할 정도로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한편에서는 잡초처럼 끈질기게 자라난 절망이 있었다.

“알겠어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상대가 생각보다 쉽게 긍정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

“…잠깐만….”

“이거 놔요.”

팔이 거칠게 뿌리쳐졌다. 명훤은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몸을 굳혔다.

다른 사람이라고?

명훤이 얼빠져 있는 사이 상대가 식탁 의자에 걸쳐져 있던 윗옷을 집어 들고 도망치듯 공간을 빠져나갔다. 명훤이 버석거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말도 안 되잖아.”

네가 나를 못 알아보는 게.

쿵. 문이 거세게 닫혔다.

그런데 주언이 아닐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귀신에 홀렸더라도 이보다 덜 당황했을 터였다. 혼란스러운 정신과 달리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타닥! 명훤이 재빨리 닫힌 문을 열고 방금 나갔을 사람을 뒤쫓았다.

더 말이 안 되는 건, 내가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이 집에 데리고 오는 것이다.

“주언아….”

온 신경이 한쪽으로 쏠렸다. 뛸 때마다 사람이 걸리적거렸다. 순간 사람에게 능력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주언!”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흑백이었던 세상이 순식간에 제 색깔을 되찾는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달렸다.

“저기요!”

출근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너무 많았다. 명훤이 지나치며 어깨를 친 사람이 신경질적으로 불렀으나 명훤은 불에 뛰어드는 하루살이보다 맹목적으로 한곳만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이제는 선명해진 시야로 한 번 더 확인해야 했다. 네가 돌아왔다면… 네가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내게 실망했기 때문이라면.

“주언아.”

애원하듯 속삭인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절히 찾던 단정한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동그란 뒤통수와 얇지만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카락.

주언이 맞았다. 다른 사람일 리 없었다.

명훤이 손을 뻗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잡힐 것 같았다.

쿠우웅. 그리고 세상이 진동했다.

“꺄아악!”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모래 폭풍이 불어왔다.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틀어막았다. 모래 폭풍이 가시고, 사람들이 어떠한 반응도 보이기 전 하늘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부우우웅-!

곤충들이 하늘 위에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멀리 있었지만 뚜렷한 형태가 보였다. 일반 곤충보다 월등히 컸다.

그리고 몇몇 곤충은 현실에 없는 모양새를 띠었다. 가령 털과 뿔이 있고, 다리가 10개이며 날아다니는 동물 같은.

“꺄아악!”

던전 브레이크였다. 던전 브레이크는 던전을 오랜 시간 동안 클리어 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약화시키는 것조차 하지 못해 던전의 힘이 과열되어 수용 한계를 넘어 몬스터가 던전 밖으로 쏟아져 나옴을 뜻했다.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쪽을 쳐다보았다. 분명 주말 동안 공격 2팀이, 1지구 안에 생긴 던전을 처지하러 간다는 보고는 들었다. 방향도 들은 것과 동일했다.

‘B급 던전이었을 텐데.’

B급 던전을 처리해본 건 처음이 아니었고, 그렇게 난이도가 높은 일도 아니었다.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은 던전의 등급보다 과할 정도의 인원을 투입해 확실히 던전을 클리어했다.

살아있는 지옥도 같았다. 분주하지만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살기 위해 달리느라 서로 밀치고, 넘어졌다.

명훤은 사람들을 거슬러 올라갔다.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출몰로 거리가 조금 멀어졌지만 다시 따라간다면 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명훤이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의 옷자락을 붙잡아 세웠다.

덥석.

“여, 여명훤이죠…? 맞죠? 그 TV에 자주 나왔던…?”

도망치던 시민 중 한 명이 명훤을 알아보고 환희에 찬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주변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멈춰 서 명훤을 쳐다보았다.

“S급 에스퍼다!”

명훤이 대답하지 않자 의혹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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