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여기 구하러 왔나요? 대체 갑자기 왜 몬스터가 여기에 나타난 거예요? 빨리 구해주세요.”
“비켜! 저기 우리 아이가 있어요!”
“이런 도시 한복판에 이런 일이 생기게 두다니 정부는 뭐 합니까? 세금 아깝게!”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려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명훤에게 닿았다. 사람들은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으나, 한가지 뜻은 일맥상통했다.
지금 이 아비규환을 그가 당연히 해결해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부우웅-
휘익!
가장 선두에 오고 있던 곤충형 몬스터가 수직으로 하강했다. 그것이 신호였다는 듯, 다른 몬스터들이 뒤따라 사람들을 일제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가장 피해가 극심한 곳은 사람이 너무 많아 움직이기 힘든, 지하철로 내려가는 계단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으아악!”
살짝 긁히기만 했는데도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다친 사람도, 다치지 않은 사람도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화르륵, 펑!
그 순간이었다. 몬스터의 몸에 불이 붙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몬스터의 몸이 일제히 폭발했다. 명훤과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이어서 순간 사람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상황 파악을 굳이 시키는 대신 명훤은 다시금 능력을 발현시켰다. 하늘이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화르륵, 펑!
명훤은 무자비하게 몬스터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사람들을 뒤로하고 갈 수 없었다.
퍼퍼퍼퍼펑!
끼에에에엑…….
퍼엉, 퍼펑!
마치 폭죽처럼 하늘에 있는 몬스터들이 화염에 터져나가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던전 내부를 클리어하는 모습이 공개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에스퍼의 능력을 실제로 본 일반인은 거의 없었다.
에스퍼의 능력은 일반인이 있는 장소에서 쓰는 걸 법으로 제재하였고, 던전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으니까. 인간 외의 경이로운 능력에 사람들이 할 말을 잃었다.
몬스터 대부분이 순식간에 공격도 해보지 못하고 사라졌다. 명훤이 잠시 너무 빠른 페이스를 조절하기 위해 공격을 멈췄다. 정적이 가득 채웠을 때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잉.
-특수능력기관에서 알립니다. 다들 지시에 따라 움직여주십시오.
다른 에스퍼들이 왔으니 안내에 따라 대피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명훤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았다. 이제 할 일은 다 했다.
“하….”
하지만 명훤이 시선을 돌렸을 때. 주언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명훤 씨!”
저 멀리서 오늘은 가족이랑 늘어지게 있을 거라고 행복해하던 강노훈이 달려오고 있었다.
“피해는?”
“부상자는 소수 있지만 사망자는 없습니다.”
“하… 다행이다. 명훤 씨 수고했어. 어떻게 딱 여기에 있었냐.”
노훈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부의 안일한 대응에 맹렬한 비난이 쏟아질 게 뻔했다. 그나마 사망자가 없어서 다행일까.
“그럼 저 먼저 가겠습니다.”
“그래 수습은 내가 해야지. 들어가 봐.”
“네.”
AGT 검거도 되지 않는데, 던전 브레이크까지 일으켜 부상자를 내다니. 관계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지만 언론이 그런 사정까지 봐줄 리 없다.
미국이나, 유럽의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한국과 비교하며 적나라하게 한국 특수능력기관을 비판하는 뉴스가 쏟아져 내릴 게 자명했다.
“지금 지우 씨나 호윤 씨도 긴급 호출해서 올 텐데 조금 기다릴래?”
“비상약 있으세요?”
“있긴 한데. 조금 기다렸다가 가이딩 받는 편이 낫지 않아?”
“괜찮습니다.”
“지금 상태 안 좋아 보여.”
능력을 너무 써서 손끝이 찌르르 떨렸다. 감각이 예리해질 대로 예리해졌다.
“괜찮습니다.”
결국 노훈은 명훤에게 비상약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노훈이 건넨 억제제를 물도 없이 짓씹어 삼켰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몸이 환희로 가득 찼다. 온몸의 세포가 헐떡이며 주언을 원했다. 명훤은 주언이 사라진 쪽으로 달렸으나, 지하철역에 다다를 때까지 주언을 발견할 수 없었다. 허탈한 표정으로 역 앞에 선 명훤이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주언의 뒷모습을 그렸다.
어젯밤 일은 꿈도, 착각도 아니었다. 왜 나타났다가 사라진 건지, 이제 괜찮은 건지, 왜 자신을 못 알아보는 건지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지금은… 이걸로 만족할게.”
지금은 그거면 됐다. 명훤이 한 손을 주먹 쥐었다.
세상이 우리가 만나는 걸 방해하는 것 같았다. 정말 세상이 우리 사이를 방해하는 거라면. 명훤은 기꺼이 그 세상을 부수리라 다짐했다.
**
잠에서 깼을 때 주언은 자신이 후회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엎드려 자고 있느라 조금밖에 보이지 않는 옆모습을 훔쳐본 주언은 만약 낮에 만났더라도 자신이 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걸 직감했다.
‘내가 그런 짓을 하다니.’
하지만 놀랍게도 조금의 후회도 들지 않았다. 주언은 바닥에 허물처럼 떨어진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기억을 잃은 주언은 극단적으로 인간관계가 좁았고, 깨어난 순간부터 연인이 있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관계였다.
몸을 숙이자 허리와 민망한 부위가 아릿하게 아파와 얼굴을 붉혔다. 주언은 침실 문을 닫고 나와 거실과 주방을 번갈아 보았다.
‘왜 아파트 구조가 익숙하지.’
정말 모든 게 이상했다. 자신답게 행동하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이대로 조용히 나가는 게 나을 텐데, 싶었지만 주언은 나가는 대신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아무것도 없네….”
대체 뭘 해먹고 사는지, 달걀 하나 없는 냉장고는 생수만 가득 차 있었다. 그나마 먹을 만한 건 싱크대 위쪽 서랍에 있는 허브티 티백 하나뿐이었다.
‘같이 밥 먹자고 하면 싫어하려나.’
주언이 전기 포트에 물을 담아 올렸을 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마음대로 돌아다녀서 죄송….”
“이만 나가주시죠.”
귀찮다는 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내뱉어진 축객령에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알겠어요.”
쪽팔렸다.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망상을 했는지 깨닫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이 사람이 자신과 잔 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서였다. 일어나서 맨정신에 인사하면 남자가 새삼스럽게 자신에게 반하기라도 할 거라고 내심 생각한 건가.
‘같이 밥 먹으면 뭐.’
주언에게는 윤재가 있었다. 주언을 감싸고 있던 방울이 터지고, 현실이 피부에 차갑게 와닿았다.
주언이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갔다.
집 안에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밖에 나와 빠르게 걸으니 어젯밤의 여파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눈치챘다.
“읏.”
걸을 때마다 허리가 욱신거렸다. 그렇게 사정없이 몰아붙여 댔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치 제가 어디를 더 잘 느끼는지 모두 꿰뚫고 있다는 듯 거침없이 움직이던 손가락. 움직일 때마다 몸 위로 떨어지던 굵은 땀방울. 쉴 새 없이 몸을 훑던 입술. 그 아래에서 숨을 헐떡이던 자신.
“읏.”
일어나서 비슷한 이름을 불렀다며 대화를 해볼 생각이었다. 잠깐 과거의 자신과 연관된 사람이 아닐까 싶었으나 그럴 리 없었다. 자신의 원래 이름은 사망 신고가 된 지 4년이나 됐다.
‘너는 가족을 일찍 잃어서 계속 혼자였어. 그래서 임상 시험에 참여하기로 한 거고.’
윤재 말로는 자신을 4년 동안 기다릴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했다.
주언이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휘휘 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흘끗 주머니 안에 처박아 뒀던 핸드폰을 보자 부재중 통화가 여러 건 와 있었다.
강윤재
39통의 부재중 전화.
송구영
3통의 부재중 전화.
톡을 보니 톡은 이미 99+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 확인하기가 두려워 메시지를 보지 않았다.
시간을 흘끗 보니 출근 시간이었다. 아직 윤재는 같은 곳에 있을 것이다. 윤재보다 더 빨리 돌아가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부우우웅!
날개가 빠르게 진동하는 소리가 하늘 전체를 메웠다. 사람들이 일제히 패닉에 빠져 비명을 지를 때쯤이 돼서야, 생각에 빠졌던 주언은 한발 뒤늦게 주변의 변화를 눈치챘다.
주언이 행동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더 빨랐다.
“아아악! 비켜요!”
“밀지 좀 마세요!”
퍽. 사람들이 주언을 밀치며 지나가 몸이 휘청였다.
-주언아!
주언은 사람들이 일제히 가는 방향 쪽으로 몸을 틀었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 같았는데.
“어…?”
자신을 부른 사람을 찾기 전 주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하늘에 떠 있는 몬스터가 순식간에 재가 되는 모습이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빛이 터질 때마다 몬스터가 비명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형태를 잃었다.
비명이 난무했던 게 거짓말이었다는 듯, 모두의 이목이 한쪽으로 쏠렸다. 도망치려던 몇몇은 여전히 분주히 이곳에서 벗어나려 움직였지만 대부분 사람은 기적처럼 사라지는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아아악!”
밑까지 내려온 몬스터가 터져 나갈 때는 짧은 비명이 울려 퍼졌으나 잠시였다. 곧 한 이름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지금 몬스터 잡는 거 여명훤이래.”
“여명훤 어디에 있는데?”
“여명훤?”
“저기에 있다!”
쿵.
분명 처음 듣는 이름인데, 몹시 큰 충격이 덮친 것처럼 심장이 가라앉았다. 주변에 전염되기 시작한 이름에 놀란 건지, 아니면 그 이름의 주인이 바로 근처에 있다는 사실에 놀란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전혀 연관 없는, 같이 밤을 보냈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사람 이름도 모르는데….’
주언은 빠듯해진 숨을 내쉬며 심장을 부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