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흐윽….”
생존 본능이 달리라고 속삭였다. 주언은 사람들이 향하는 쪽을 잠시 보았다. 타다닥. 하지만 곧 사람들이 향하는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상해….”
주언은 저 능력을 알고 있었다. 멀미가 날 정도로 머릿속에 어떠한 형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속이 메슥거렸다.
다른 지하철역에 다다를 때까지 주언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허벅지 사이가 경련하듯 떨렸다.
“괜찮으세요?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옆에 있던 여자가 주언의 심상찮은 안색을 보곤 물어왔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괜찮아요.”
주언이 무릎을 짚으며 말했다. 관자놀이에서 흐른 땀이 턱 끝에 매달렸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열차가 곧 도착합니다.
여자가 재차 권유하고 싶은지 주변을 서성였으나 곧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지하철 안에 겨우 몸을 들였을 때였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피가 발가락 끝으로 순식간에 다 빠져나가는 것처럼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집에 돌아가야 되는데.’
그런데 내 집이 어디였더라. 그 생각은 아주 찰나 주언의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곧 형태가 이루어지기 전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여기 누가 쓰러졌어요!”
자신에게 괜찮냐고 묻던 여자가 소리쳤다. 그냥 안 괜찮다고 말할 걸 그랬다. 지금 쓰러지는 게 더 민폐 같은데.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든 생각이었다.
**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돌아오는 내내 주언의 어깨가 무거웠다.
Rrrr.
구영에게서 온 전화였다. 주언은 집 안에 들어가기 전 전화부터 받았다.
“여보세요.”
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구영이 말을 쏟아냈다.
-형. 왜 전화를 안 받아? 어디야? 무슨 일 있던 건 아니지?
“이제 집 앞이야.”
-어제 형 애인 보러 간 거 아니었어?
“…….”
-무슨 일 있었어? 형 애인이 알바하는 카페까지 찾아왔었어. 나는 형이 간 줄 알고 못 만났냐고 했는데… 못 만났다고 하더라고.
구영이 재잘거리다 말끝을 흐렸다.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내가 가서 말할게. 걱정하지 마.”
-진짜 별일 없었지? 목소리 안 좋은데.
“응. 나 괜찮아.”
그냥 몇 가지 물어볼 게 생겼을 뿐이다. 윤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을 설득할 것이다.
-그럼 다행이고. 연락해.
“응. 고마워.”
전화를 끊고 문 앞에 섰다. 문 앞에 자동 센서 등이 몇 번 꺼지고, 켜지고 반복한 후에야 주언은 겨우 들어갈 결심을 세울 수 있었다.
소통의 부재로 생긴 오해일 것이고, 곧 우리는 또다시 지루하리만큼 잔잔한 일상을 되찾을 테지.
주언이 마른침을 삼키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참으로 긴 하루였다. 사람이 변해버릴 만큼 너무도 길었던 하루.
띠띠띠디-
달칵.
무거운 문이 열렸다. 문 바로 앞에서 서성이던 윤재와 시선이 마주쳤다.
“주언아.”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윤재가 주언을 있는 힘껏 껴안았다.
“주언아 너 도대체… 내가 이 동네에만 있으랬잖아. 너 몸 아직 다 안 나았다고.”
“…너를 보러 갔었어.”
주언의 덤덤한 태도에도 윤재는 쉽게 진정을 되찾지 못했다.
“그래. 들었어. 아는데… 다음부터는 어디 안 갔으면 좋겠다. 날 보러 와준다는 건 고맙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주언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윤재를 관망했다. 주언은 답답하다는 듯 이마를 짚고 있는 윤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저 말이 정말 순수하게 걱정돼서, 의사로서 자신에게 하는 말일까 하는 의심만 들었다. 응급실에서 깨어난 이후부터 생각이 뒤죽박죽이었다.
“윤재야. 정말 나 기억 잃기 전에… 친하게 지내던 사람 아무도 없었어?”
윤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왜 그런 걸 물어봐? 거기서 누구 만났어?”
마치 자신이 물어봐서는 안 되는 질문을 한 것처럼 윤재는 불안해 보였다. 여기서 물러서면 나중에 다시 물어봤을 때 윤재는 철옹성같이 모든 질문에 대비하고 대답할 것이다. 주언이 아는 윤재는 철저한 인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예상치 못했을 때 묻는 게 가장 솔직한 대답을 끌어낼 수 있다.
“나 가이드였어?”
“뭐?”
갑자기 널뛴 질문에 윤재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가 당황했을 때 나오는 표정이다.
“나 가이드였냐고.”
주언이 재차 물었다. 지하철 안에서 쓰러졌을 때, 쓰러졌던 충격 탓인지 이상한 기억이 떠올랐다. 현실이 아니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디테일했고, 꿈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생생했다.
‘가이딩 해야 되니까 손 줘요. 괜찮아요?’
‘그렇게 하면 효율 떨어지지 않아요? 아 ——씨 때문에 안 되려나?’
‘아니에요, 그런 거.’
손끝을 타고 흐르는 묘한 감각. 낯설지 않은 이 감각을 주언은 알고 있었다. 가이딩 할 때, 특유의 감각.
‘빨리 돌아와! 이쪽 힘들다고!’
‘고마워, 주언 씨!’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생동감이 넘치는 장면들. 현실에서는 전혀 관련 없는 장면이 갑자기 보일 일이 무엇인가.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어쩌면 이 기억들이 제 과거의 파편이라는 것.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윤재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맞구나.”
대답은 따로 필요 없었다. 시체처럼 희게 질린 윤재의 얼굴이 답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주언이 비죽 웃자, 윤재가 순식간에 다가와 주언의 양팔을 쥐고 흔들었다.
“어떻게 알았냐니까? 누구 만났지. 누구 만났어? 그래서 연락 안 된 거야?”
윤재는 시뻘게진 눈으로 자신을 무섭게 내려다보며 대답을 종용했다. 제 양팔을 붙잡는 힘이 매서웠다.
1지구에 만나선 안 되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 대화를 대비하지 못했던 윤재와 다르게, 주언은 오는 길에 여러 번 생각했다. 어떤 질문을 할지, 그리고 만약 이런 대답이 돌아오면 어떻게 대꾸를 할지.
“생각났어.”
“뭐? 생각이 났다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쩌다가?”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왜 그렇게 놀라고 그래.”
주언은 윤재를 지나쳐 거실 소파에 앉았다. 윤재가 재빨리 주언을 뒤쫓아 왔다. 주언의 바로 앞에 선 윤재는 주언을 내려다봤다. 그는 웃고 있었으나, 미소가 한없이 어설펐다.
“나 보러 1지구에 갔다는 애가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돼. 근데 지금까지 쉽게 안 떠오르던 기억이 갑자기 났다잖아.”
“…….”
“연락도 안 되고. 걱정할 수밖에 없잖아. 무슨 일 있던 건 아니지?”
윤재는 억지로 표정을 풀었으나 굳은 말투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이를 꽉 깨무느라 턱이 도드라져 보였다.
주언의 심상찮은 기세에 윤재가 재차 물었다. 무슨 일. 그 남자의 얼굴이 다시금 떠올랐다.
있었다. 무슨 일.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 주언은 자신이 지금 화낼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잘못의 경중을 따지자면 자신의 잘못이 더 클 것이다. 쓴 물을 억지로 한입 가득 마신 것처럼 혀끝이 썼다.
만약 그냥 윤재에게 바로 갔으면, 아니 애초에 가지 않았으면… 자신이 불안해할지언정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응. 주언아? 어디에 갔었어? 누구 만났는데. 어제는 왜 못 왔고. 오늘은 왜 돌아오는데 늦었어? 무슨 일 있었어?”
대답 없는 주언을 바라보던 윤재는 뒤늦게 오늘 아침 기관 근처 역에 던전 브레이크가 있었던 사실을 떠올려냈다. 아침에는 이미 주언이 연락이 안 되는 걸 파악한 후 신경이 온통 주언에게로 쏠려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너 설마 그 현장에 있었어?”
“…….”
하지만 그때 주언이 있었으면. 윤재는 무심코 넘겼던 뉴스 내용을 되짚어 보았다. 공격 1팀 강노훈 팀장이 출동했다고 들었다. 출동한 인력 중에 여명훤의 이름은 없었다.
“아니지?”
“할 말은 그게 다야?”
“…그게 다냐니?”
주언의 심드렁한 대답에 윤재가 멈칫했다. 가늠하듯 쳐다보는 시선을, 턱을 치켜들고 똑바로 마주했다.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걸까.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 중요한 기억은 스스로 떠올리는 쪽이 회복에 좋다고 해서 환자에게 굳이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기억을 잃기 전 기본적인 인적 사항은 환자에게 고지할 의무가 있었다.
“나 1지구에 만날 사람 없다고 한 건 너인데 왜 자꾸 물어봐.”
“…….”
그리고 그 인적 사항에 자신이 가이드였다는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없었다. 안 좋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발밑이 푹 꺼져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서 이 대화의 종착지가 결코 좋지 않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약 반대 입장이었다면… 다 큰 성인이 늦을 수도 있으니까 기억 돌아온 거에 기뻐하거나, 네가 그렇게 기억을 찾는 거에 집요하게 물어봤었으니까 검사부터 할 거 같거든.”
“…….”
“그런데 지금 너. 기억이 돌아온 거에 전혀 기뻐하고 있지 않잖아. 내가 충격을 받은 것도 신경 안 쓰는 거 같고.”
“…….”
담당의로서도, 연인으로서도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피가 차갑게 식는다.
“마치 내 기억이 돌아오지 않길 바랐던 사람처럼.”
싸늘한 주언의 지적에 윤재가 할 말을 잃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내, 가 너한테 해 되는 일 시키지는 않잖아.”
“…….”
“주언아.”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하루아침에 주언이 달라졌다.
‘아니, 달라진 게 아니지.’
예전과 비슷해졌다는 게 더 정확했다. 자신에게 선명하게 선이 그어져 있던 그때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게 무색하게 주언은 다시금 선을 긋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