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다신 예전처럼은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주언의 세계의 중심에는 윤재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방심했다. 주언이 절대 자신을 밀어내지 않을 거라고 내심 믿고 있었다. 절대적인 게 얼마나 헛된 수치인지 알고 있으면서.
“전에는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
윤재는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손을 세게 쥐었다. 기억을 잃고, 주변의 모든 걸 통제해도 주언은 언제나 자신의 품을 벗어날 길을 알고 있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날 때부터 모든 걸 가진 윤재였다. 모든 게 시시할 정도로 쉬운 삶.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졌다. 명예, 권력, 돈. 모두 다 자연스럽게 윤재를 뒤따랐다. 오로지 주언만이 공기처럼 윤재의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갔다.
주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침대로 들어가 주변을 다 잊고 쉬고 싶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어.”
“주언아.”
“그리고 해가 되는 일이라도 내가 선택할 일이지.”
윤재가 손을 뻗어 주언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주언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느껴지는 감정이 있다면 자신의 한마디에 세상이 무너진 듯한 윤재의 표정에서 기인한 측은함과 배신감뿐이다.
“그냥… 놀라서 그런 거지. 나도 좋아.”
“나는 내가 이 나이 되도록 알바만 하니까 과거의 나는 한심스럽게 살았구나 싶었어. 그래서 너한테 더 미안했어.”
주언은 윤재의 손을 뿌리쳤다. 눈꺼풀을 가리고 있던 막이 걷혔다. 이제 절대 전처럼 되돌아갈 수 없었다. 자신은 이제껏 윤재에게서 뭘 보고 있었던 걸까.
“평생 숨길 생각이었어?”
“아니야. 다 설명할 생각이었어.”
윤재가 다급하게 말했다. 조금의 언질이라도 줬으면 지금 우리는 다른 대화를 하고 있었을까. 기억을 찾았나 매번 확인하던 게 혹시 내가 기억을 찾으면 현재와의 괴리감에 충격을 받을까 봐 그런 게 아니라, 말해주지 않은 사실을 떠올릴까 봐 불안했던 거라면?
“언제?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었는데.”
혼란스러웠다.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균열은 생각보다 깊게 새겨졌다. 오히려 이제야 눈치챈 게 이상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선이 그어진 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너 정말 누구 만난 거 아니지?”
대답 대신 던져진 질문에 주언이 눈을 홉떴다. 윤재는 항상 침착했다. 어떤 일에도 크게 흥분하는 일이 없었다. 늘 이성적으로, 자신이 받아주지 않는 것도 다 ‘기다리면 될 일.’이라고 했다. 늘 여유가 있어서 애가 달은 건 주언 쪽이었다.
이성적인 감정을 떠나서 윤재는 유일하게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하는 지탱해주는 존재였다.
“누구 만났으면?”
주언의 까칠한 태도에 윤재가 주언의 발치에 앉아 주언의 무릎을 껴안았다. 허벅지 위에 제 얼굴을 올린 윤재가 고해성사하듯 뇌까렸다.
“다 너를 생각해서였어.”
“나를 생각해서?”
“지금 네 상태로는 던전 못 가는데, 괜히 말했다가 너 간다고 할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서… 모른 채로 잘 살았잖아.”
눈가가 뜨거웠다. 왜 잘못한 건 너인데, 네가 더 상처받는 표정을 짓는 걸까. 왜 하필 이럴 때.
“그건 내가 정할 일이고. 네가 내 담당 연구원이고, 의사였고, 연인이었는데. 네가 거짓말을 하면 나는….”
과거가 백지인 상태로 있는 건 상상 이상으로 무서운 일이었다. 과거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슨 일을 해서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는지, 어떤 생각으로 실험에 참여하게 됐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갑자기 덩그러니 낯선 행성에 서게 된 것 같았다.
발밑에 아무것도 없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불안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시울이 기어코 뜨거워졌다.
“주언아 제발. 울지 마.”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나는 믿을 사람 너밖에 없어. 네가 한 말은 다 믿을 수밖에 없는 상태라고. 그런데….”
“미안해. 그런데 정말 오해하지 말아줘. 다 너를 위해서였어. 너를 생각하지 않고 정한 건 아무것도 없어.”
윤재의 말에 가슴이 아팠다. 더 대화를 이어나갔다가는 감정에 휘둘릴 뿐일 것 같아 주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따라 일어선 윤재가 주언의 팔목을 붙잡았다.
주언이 차갑게 응수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다루기 더 편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지.”
“우주언!”
윤재의 언성이 높아졌다. 주언이 어깨를 움츠렸지만 말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왜? 아니야?”
“…….”
“아니. 대답하지 마. 어차피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해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래. 오늘은 쉬어. 내가 너무 몰아붙였네.”
어쩌면 우리는 동시에 이 관계의 종말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아랫입술을 너무 세게 짓씹어 비릿한 맛이 났다. 나도 다 떳떳한 건 아닌데.
‘가증스러워.’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더 짜증 나는 건 이 와중에도 하룻밤을 같이 보냈던 남자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누굴 만났느냐고 묻는 윤재의 태도에 그 남자가 자신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거… 새길 때 아팠어?’
‘으읏….’
흰 허벅지 안쪽을 보며 말하던 그의 입김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다시 상기시키고 싶지 않았다.
“윤재야.”
“어.”
“나 하나만 뭐 물어볼게.”
이때가 아니면 다시 물어볼 기회가 언제 찾아올 줄 몰랐다. 아직도 밑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주언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
의식하고 있었으나 차마 묻지 않고 있었던 질문.
“솔직하게 대답해줘.”
“그래.”
여기까지 왔으니 윤재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기저에 깔려 있었다.
“…내 허벅지 안에 있는 문신. 무슨 뜻이야?”
Remember OSIS
이건 대체 무슨 뜻일까. 시험에 참여하기 전 자신은 무엇을 결심하며 허벅지 안에 문신을 새긴 걸까. 리멤버. 자신이 기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새긴 것 같은데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어 볼 때마다 답답해지던 문신.
“난 네가 짐작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윤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마치 대답하길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윤재가 벽에 어깨를 기대며 시선을 맞춰왔다.
“내가?”
“그거 알파벳 아니고 숫자야.”
“숫자?”
“내 생일이잖아. 5월 15일.”
“…아.”
김이 빠졌다. 기억하고 싶어서 몸에까지 새기고 싶었던 게 윤재의 생일이라고? 하지만 그럴듯하게 들어맞는 날짜이기도 했다.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았는데. 납득되지 않았지만 아니라고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까지 윤재가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나도 하나만 물을게.”
“그래.”
“나 보러 갔을 때 누구 만났어?”
주언은 확신했다.
“…아니. 그냥 기차에서 깜박 졸아서 종점까지 갔어.”
모든 과거의 실마리는 1지구에 있음을.
“그래?”
“나 그럼 방에 들어갈게.”
“그래 쉬어.”
윤재가 안도의 한숨을 남몰래 쉬는 모습을 닫히는 문 틈새로 보았다. 그리고 윤재는 결코 주언이 기억을 찾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
달칵. 불시에 열린 문에 주언이 서둘러 이불을 뒤집어썼다.
‘자?’
‘…아니.’
한발 뒤늦게 이불을 뒤집어써서 다 봤을 텐데도 묻는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침대 시트가 주언의 손에 휘감겨 형편없이 구겨졌다. 주언의 시선이 잠시 시트에 머물렀으나 오래 가지 않았다. 뒤에서 주언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허리를 지그시 누르며, 그의 뒷목에 입 맞추는 목소리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뭐 하고 있었어?’
‘…언제 돌아왔어?’
‘왜?’
다정함을 뒤집어쓰고 있는 욕망이 드러났다. 명훤이 곧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내가 있는데 왜 혼자 그렇게 놀고 그래.’
하지만 꿈이라고 인지해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은 지나간 기억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니까.
‘알면 눈치껏 빠져줄 수도 있잖아.’
‘혼자만 재미 보는 게 섭섭해서 그러지. 내가 만족 못 시켜 준 적 없는 것 같은데.’
낯부끄러운 말에 등에 입을 맞추고 있던 숨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 얘기는 나중에 하면 안 돼?’
‘나 나가면 뭐 하려고?’
그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닌데. 좋아서 그러는 건데?’
‘읏.’
‘놀린다고 생각하니까 제대로 해야겠네.’
주언이 침대를 손으로 짚으며 그의 무게를 감내했다. 쾌감이 척추를 꿰뚫는 것 같았다. 머리에 열이 너무 올라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주언아.’
‘사랑해. ——아.’
감정이 벅차올랐다. 주언은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감정에 정신이 혼미했지만 주언은 그의 이름을 입안에 몇 번이고 불러보았다.
잊지 말아야 해. 이 이름은 현실까지 끌고 가야 한다.
눈이 퍼뜩 뜨였다. 이제 익숙해진 시간 루틴에 알람보다 먼저 깼다. 주언은 핸드폰에 맞춰진 알람을 우선적으로 해제했다.
“헉… 헉…….”
숨을 몰아쉰 주언은 호흡이 진정되자, 몸을 반쯤 일으켰다. 이불을 들추자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미쳤나. 이게 무슨 일이야.”
꿈에서 봤던 그 긴장감 넘치고 달콤했던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했던 것 같다. 1지구에 올라가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이후부터, 주언은 종종 이런 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때를 생각하자 또다시 온몸에 열이 들끓는 것만 같았다.
“미쳤어….”
이 나이 먹고, 꿈 하나에 이렇게 열이 오르다니. 주언은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식히며 서둘러 씻으러 욕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