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40화 (40/112)

#40

쏴아아아.

세면대 물을 가장 세게 틀었다. 전등 아래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분명 뭐를 기억해야 했던 것 같은데….”

주언이 머리를 헝클이며 고민해 보았으나 이미 묻힌 기억은 도통 떠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낱 꿈 때문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에 주언은 자괴감이 살짝 밀려왔으나, 꿈의 영역은 제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언은 꿈을 열심히 떠올려 보았다. 자신은 뭘 그렇게 간절하게 기억해내고 싶었던 걸까. 유심히 생각하면 할수록 남자와 함께한 그 밤만 떠오를 뿐이었다.

성 정체성을 고민했던 게 우습게, 자신은 그 남자한테 완벽하게 끌렸다.

다만 문제는….

“윤재인가?”

꿈의 상대가 도저히 윤재라고 생각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 주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키는 엇비슷해 보이지만 몸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윤재의 몸도 나쁘진 않았지만, 결국 윤재는 연구원이었다. 필수적으로 운동을 해서 적당히 근육이 붙어 예쁜 몸이긴 했지만. 조금 달랐다.

꿈속에 나온 남자는 조금 더 생활형 근육이었다. 평소에도 몸을 많이 쓰는지 필요 없는 부분은 모두 제거된 듯한, 촘촘히 짜인 근육.

‘그때 그 남자처럼.’

주언은 다시금 되돌아간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서둘러 샤워를 하고 나가야지 싶었다. 자기 직전에 샤워했지만 밤새 몸이 땀에 젖어 찝찝했으니까.

쏴아아.

물 아래 들어간 주언은 차마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하고 한참 동안이나 찬물을 맞고 있어야 했다.

‘알바에 늦을까 봐 찬물에 식히는 꼴이라니.’

성욕이 없는 게 고민이었던 과거의 날들이 우스웠다.

**

전에 구영이 자신 대신 대타 뛰어준 대가로, 이번에는 주언이 구영 대신 며칠 대타를 뛰어주었다. 갑자기 급한 사정이 있다고 구영이 사전 설명까지 덧붙여서 주언은 흔쾌히 응했다.

“여기 아이스 고구마 라테 하나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구영아!”

“한 잔은 형 거. 지금 바빠?”

오늘 알바가 없는 구영이 손님으로 카페에 들렀다.

“딱 일부러 한가한 시간에 와놓고.”

“들켰네.”

“앉아 있어. 만들어서 가져갈게.”

마침 손님이 다 빠져나가 한가할 때라 주언이 서둘러 음료를 만들어 구영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구영은 전에 주언이 윤재를 만나러 갔다가 사라진 일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주언이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자 그것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구영은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아 편했다. 그래도 최소한의 설명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주언은 잠시 단어를 골랐다.

“얼마 전에 고마웠어. 제대로 얘기 안 한 거 같아서.”

“형 말하고 싶지 않은 거 굳이 캐물을 생각 없어.”

“그런 것치고 전화를 많이 했던데.”

주언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자 구영이 민망하다는 듯 양팔을 껴안았다.

“그건 내가 중간에 껴서 그런 것도 있고, 갑자기 연락 안 받으니까 걱정된 것도 있고.”

“그래.”

“애인이랑은 잘 풀었어?”

구영은 윤재가 사람 하나 죽일 기세로 카페까지 찾아와서 조금이 아니라 많이 쫄았었다며 음료를 쭉 들이켰다.

“잘 모르겠어.”

구영은 눈치껏 그때 찾아갔던 일이 주언에게는 큰일이었으나, 두 사람의 관계에는 결코 긍정적인 일이 되지 않았으리라는 걸 알아차리곤 구태여 더 묻지 않았다.

주언은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봤다. 표면만 본다면 전과 다름없었다.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윤재는 정기 검진에서 주언의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주언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가이드였던 건 맞는데, 다시 가이드로서 일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반대야.’

‘왜?’

‘아직 가이드가 정확히 어떤 메커니즘으로 에스퍼를 가이딩하는지 밝혀지지 않았어. 인공 장기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고….’

‘그래도 재발 위험은 이제 없잖아. 나는 평생 알바만 하고 살아?’

‘등급 생각하면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지.’

‘…….’

대체적으로 긍정적이지 않은 의견이었다. 윤재는 그러라고 말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렇게 말했다가는 싸움밖에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 입을 꾹 닫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다른 일을 찾아봐도 되잖아.’

윤재는 평정심을 잃었던 그날의 모습을 잊고 싶다는 걸 간접적으로 말하듯 평소보다 더 완벽한 애인의 모습으로 주언을 위로했다.

윤재는 여전히 주언이 바라는 대로 거리를 둬주었다. 하지만 윤재는 대가를 바랐다. 주언이 바라는 대로 거리를 둬주었으니, 주언도 어느 정도 윤재의 선에 맞춰주는 것에 응하길 바라는 기색이 여실했다.

“주원이 형?”

구영의 부름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미안. 사람 앞에 두고 다른 생각 했네.”

주언이 멋쩍은 얼굴로 사과했다. 구영이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돌렸다.

“괜찮아, 그나저나 내가 왜 자리 비웠는지 말했나?”

“아니? 무슨 일 있어?”

주언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구영이 가슴을 의기양양하게 폈다. 오늘 알바하는 날인데 구태여 찾아온 이유는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형 듣고 깜짝 놀랄걸.”

“뭔데 그래?”

구영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모습에 주언이 고개를 갸웃했다. 구영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나 에스퍼로 각성했다?”

“에스퍼?”

주언이 얼떨떨한 얼굴로 구영을 새삼스럽게 살폈다. 에스퍼로 각성했다고 해도 갑자기 얼굴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주언은 화들짝 놀라, 구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C급이긴 하지만.”

곧 구영이 어깨에 줬던 힘을 빼며 배시시 웃었다. 주언의 시선이 멋쩍은지 뺨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그제야 주언이 응시하던 시선을 서둘러 거뒀다.

“그럼 이제 에스퍼로 활동하는 거야?”

“응.”

“어디서. 1지구?”

“아니. 2지구. 2지구는 C급이라도 대우 나쁘지 않으니까.”

“너무 아쉽다.”

“그러게 형이랑 알바하는 거 재밌었는데.”

“알바는 언제 그만둬? 앞으로 전처럼 자주 못 보겠네.”

“자주 보게 될걸?”

구영은 자신이 가장인데 중간에 훈련소에 처박혀 붕 뜨면 가족은 어떡하냐며 웃었다. 아쉬운 듯 보였지만 결정을 번복할 일은 없어 보였다.

“훈련 오래 받아야 되는 거 아니야?”

왜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질문이 튀어나왔다.

“가장으로 등록되어 있고 정부 기관 본사 말고, 정부 소속 하청 업체에 소속되면 훈련 덜 받아도 된다더라고.”

그래도 훈련 기간은 기본이 반년이라고 했다.

“그래?”

“등급이 아주 높으면 훈련소에 있으면서 노력해 볼 법한데… 뭐.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구영이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원섭섭한 듯했지만 동시에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이제 앞길을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놓인 듯 보였다.

“전혀 몰랐어.”

“꼼수니까. 이번에 들어가기로 한 곳에서 내 편의를 많이 봐줬어.”

이런 류의 대화는 처음 해서 주언은 구영의 소식이 아주 갑작스러웠다.

“그렇구나.”

주언이 창밖으로 흘끗 시선을 돌렸다. 모두 바쁘게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아가는데, 자신만 한 곳에 고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 이제 너무 어린애 취급하지 마.”

구영이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목소리는 어색했지만 오랫동안 생각했던 말이라는 듯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왜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어린애 취급을 하지는 않았지만, 설령 그랬다 한들 구영은 개의치 않아 할 거라고 생각했다. 주언이 아는 사람 중 구영은 가장 중심이 잡혀 있어 단단한 사람이었으니까.

“내가 너한테 고민 상담을 얼마나 했는데 어린애로 보겠어.”

“그럼 됐고.”

“오히려 난 너한테 고민 많이 말했는데, 네 고민은 하나도 몰라서 자괴감 느끼는 중이야.”

주언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는지 이번에는 구영이 다급히 변명했다.

“내가 일부러 더 얘기 안 한 거야. 괜히 말하고 다녔다가 아니면 곤란하고….”

“그래도 조금 서운해.”

“형이 딱히 관심 있어 보이지도 않고.”

“그래도 언질이라도 줬으면 덜 놀랐을 텐데.”

“형. 화났어?”

“아니. 축하해. 엄청 놀랐어.”

구영은 주언의 축하에 조금 민망한지 짓궂은 목소리로 주언에게 말했다.

“전혀 안 놀라 보이는데?”

“충분히 놀랐거든?”

주언이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커피를 쭉 빨아 마셨다. 정말 놀랐다. 마침 자신도 과거에 가이드였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인지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구영에게 잠깐 기억이 조금 돌아왔다고 말할까 했으나 구영이가 기뻐하는 순간에, 자신의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훈련은 언제부터야?”

“아직 모르겠어. 1지구에 있는 쪽에서 훈련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

“왜?”

“일단 훈련 질부터 다르다니까. 짧게 다닐 거면 확실히 배워둬야지.”

구영은 현실과 타협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완전히 놓은 것도 아니었다. 의욕이 있는 건 좋지만 괜히 걱정이 되었다.

“그냥 이쪽에서 훈련받는 게 낫지 않아?”

“왜 그래? 형답지 않은 말이네.”

“…갑자기 위험한 일이 터질 수도 있잖아.”

“그런 경우는 거의 없는데… 얼마 전에 뉴스 뜬 거 때문인가? 그런데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집에 TV 없다며.”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르는데 위험하다는 건 어떻게 아는 건가 싶어, 구영이 추궁하자 주언은 숨길 생각 없다는 듯 순순히 말했다.

“나 1지구에 갔을 때 던전 브레이크 터져서 몬스터 코앞에서 봤거든.”

“던전 브레이크에 형도 있었어? 종점까지 갔었다며.”

그리고 문득 자신이 1지구에 있을 때 사람들이 일제히 부르던 이름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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