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41화 (41/112)

#41

“여명훤…?”

이름을 읊조릴 때마다 이름이 달콤하게 혀에 감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처음 듣는 이름이 분명한데….

‘주언아.’

그런데 왜 같이 밤을 보냈던 남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유명한 에스퍼 같았는데.’

그런 사람이 만취한 채로 길거리에 서 있었을 리 만무한데. 자신을 뒤쫓아 나왔다가 던전 브레이크를 막기 위해 멈춰 서서 자신을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다니. 미취학 아동이나 할 법한 생각이 아닌가.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갈 거라는 착각. 나이 서른이 돼서도 그런 생각을 하면 문제지 않나. 자의식과잉이 지나쳐도 병이다.

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읽는다면 민망할 것 같다는 허무맹랑한 생각까지 들어 주언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무의식적으로 떠올랐던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여명훤이 왜?”

“1지구에 있을 때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렸었거든. 그때 그 에스퍼 이름 부르던데… 혹시 알아?”

구영이 알 거라는 기대 없이 주언이 물었다. 묻기 위해 나온 말이 아니라, 얼떨결에 나온 이름 석 자 때문에 질문을 덧붙인 꼴이었다.

“여명훤?”

드르륵. 구영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주언에게 추궁하듯 되물었다. 늘 침착함을 잃지 않던 구영이 드물게 흥분한 모습이었다.

“…어? 응.”

생각 외로 격하게 돌아오는 반응에 주언이 짓씹던 빨대를 뱉어내고 고개를 주억였다.

“왜? 내가 뭐 잘못 말했어?”

구영답지 않은 격한 반응에 주언이 당황하며 묻자, 구영이 곧 과하게 반응한 게 멋쩍어졌는지 뒷목을 긁으며 앉았다.

“형은 어디 산에서 살다가 나온 사람 같아.”

구영의 말에 주언이 변명하듯 말했다.

“윤재가 집에서 핸드폰 보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자제하다 보니까 나도 자연스럽게 안 보게 되더라.”

“형은 무슨 재미로 살아?”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없을 수도 있다. 집 안에 꼭 필요한 가전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건 단순한 TV의 문제가 아니라, 애인이 통제하는 부분이 너무 심한 게 문제였다.

주언이 고민을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몇 가지 사실만 조합해 추론해 보았을 때 정상적인 관계처럼 보이지 않았다.

눈이 시뻘게져서 카페를 부술 듯 찾아왔던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멀끔한 생김새와 다르게 살벌하기 그지없던 눈빛. 마치 주언을 완전히 고립시키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 같았다.

“형 애인… 괜찮은 거 맞아?”

“…걔는 나한테 뭐 하지 말라고 한 적 없어.”

주언은 윤재의 명의로 된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눈치를 본 것뿐이었다. 하지만 주언의 말에도 구영은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래도, 형….”

구영은 남의 연애에 참견해봤자 돌아오는 건 욕밖에 없다는 말을 굳게 믿었다. 그럼에도 구영은 주언에게 한 번쯤 밖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일반적인 연인의 모습과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관계의 그림에 너무 가까이 서 있어 전체적인 그림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구영은 주언에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보라는 듯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주언이 쓰게 웃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구영에게까지 걱정을 사다니. 신경 써주는 게 고마웠고, 동시에 민망했다.

자신은 윤재를 배신했으니까.

“…그… 여명훤이라는 사람은 검색하면 나오는 사람이야?”

노골적인 회피였다. 더 이상 이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 그 이상의 참견은, 상대가 요청하지 않는 한 오지랖일 뿐이다. 구영이 음료를 쭉 들이켜며 설명해주겠다는 듯, 제 핸드폰에 검색어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뉴스 틀면 많이 나오는 사람이긴 하지.”

조금이라도 에스퍼에 관심이 있으면 모를 수 없는 이름이라고 했다.

“그래?”

새삼 당장 앞가림하느라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얼마나 무심했는지 깨달았다.

“능력자가 소속된 팀을 기밀 부서로 취급해서 처우도 안 좋았는데 그것도 공론화하고, 가이드랑 에스퍼 업무 위험 대비 저임금이라는 문제도 수면 위로 끌어 올렸잖아.”

뭐 그거 말고도 많긴 하지만.

구영이 마치 친한 지인을 자랑이라도 하는 양 어깨를 으쓱였다. 곧 원하는 사진을 찾았는지 핸드폰 화면을 주언에게 들이밀었다.

누가 나와 하룻밤 잔 사람이 유명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는가. 검색해볼 생각조차 못 했다.

‘애초에 이름조차 묻지 못했으니까.’

화면을 확인한 주언은 입 안의 커피를 겨우 삼켰다.

“…이 사람이야?”

목소리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왜 처음 듣는 이름을, 하룻밤 보낸 남자의 얼굴에 겹쳐 생각했을까. 사진 속 사람은 세상이 무료하다는 듯 무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응. 이 사람 봤어?”

구영의 신나 하는 목소리에 주언이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그리고 왜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상상이 현실이 되어 있는 걸까.

“1지구에 언제 간댔지?”

“아직 정해진 건 아닌데, 아마 조만간 정해질걸.”

“…거기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

“응? 어디?”

“그 훈련소.”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만나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보는 거라도 상관없었다. 멈췄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바를 통째로 빌려 바 안은 한산했다. 재즈 음악의 선율이 부드럽게 흘렀다. 보디가드를 양옆에 대동하고 등장한 여지웅을 본 강윤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여지웅이 앉으라고 손짓하며 윤재의 맞은편에 앉았다.

“바쁜 사람 오라 가라 하기 어렵지. 충분히 이해하네.”

여지웅의 턱짓에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바텐더가 분주히 움직였다.

“잔 세팅 도와드리겠습니다.”

앞에 얼음과 잔, 양주가 놓이고 바텐더는 볼일을 마친 후, 눈치껏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그래. 이번에 수고했네.”

“지원이 없었으면 이렇게까지 빨리 결과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윤재의 덤덤한 말에 여지웅은 크게 만족했는지 껄껄 웃으며 윤재의 잔에 호박빛 술을 가득 채워주었다.

“겸손하긴. 우리 아들이 자네를 보고 좀 배워야 하는데.”

윤재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하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드님께서도 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남자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목이 타는 것 같았으나, 윤재는 내색하지 않았다.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이름도 상황도 아님을 잘 알고 있으니까.

“잘해봤자지.”

애인이 사라진 이후 여명훤은 여지웅의 명령을 모두 이행했다. 하지만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이 계속 여지웅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렇게 안 좋은 상황인가요?”

“흐름이 안 좋아. 이번에 미국 모든 주랑 독일이 능력자 관련 사기관 창설을 합법화하게 되었더군.”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쁜지 미간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린 여지웅이 혀를 작게 찼다.

이미 내부에서 끝난 이야기를 국가 소속의 젊은 S급 에스퍼 여명훤의 입으로 낸 것만으로도, 국가 기관을 향한 비난이 줄었다. 여명훤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는 정부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좋은 패였다. 근래 국제적으로 화두되는 사 길드 합법화에 대한 안건을 국제연합총회에서 나선다는 소문이 도는 만큼 여명훤의 역할은 중요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끝이 보이는 일이었다. 세계의 큰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여지웅이 잔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래도 예상치 못한 던전 브레이크로 당분간은 그 얘기로 떠들썩할 테지요.”

“그래. 그 이야기가 잠잠해질 때쯤에는 새로운 사건을 터트리면 그만이니까.”

여지웅이 비릿하게 웃었다.

언론을 다루는 건 쉽다. 논란이 생기면 더 큰 논란으로 덮으면 된다. 소수가 전의 논란을 잊지 말자고 외쳐도 결국 큰 흐름을 만들어내는 건 대중이다.

“던전 브레이크 때 사망자가 제법 나왔어도 좋았을 텐데 말이야.”

“예?”

“그럼 더 극적인 연출이 되었겠지 않나.”

사람 목숨을 논하는 목소리는 고저 없이 평온했다. 평이하다 못해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잔을 쥔 윤재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군요. 생각하신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강윤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지웅이 한 톨 내어주는 권력을 내칠 수 없었다. 이 모든 건 주언을 위해서였다.

주언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평온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 지저분하고 추잡한 건 자신이 다 할 테니까. 혼자 편하게 살려면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는 덫을, 윤재는 기꺼이 제 두 발로 걸어 들어갔다.

만약 여지웅이 주언이 살아있는 걸 알게 된다면, 그는 자신의 밑에 들어온 여명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주언을 해할 게 분명하니까.

지금 2지구에 내려가 있는 것도, 큰 성과를 내고 쉬고 싶다는 변명을 대고 내려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필요악이라고 부르곤 하네.”

의미심장한 말투였다. 여지웅은 제 의지에 거스르는 모든 존재를 싫어한다.

“AGT 말씀이십니까. 그러고 보니 한동안 AGT의 테러 활동이 잠잠하군요.”

윤재가 눈치 좋게 물어오자 여지웅이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은 잠잠하겠지.”

여지웅과의 대화는 늘 그랬다. 의미심장한 말을 한두 마디 던져놓고, 자신이 그의 심중을 맞추면 그는 그제야 설명을 해준다. 끊임없이 강윤재가 여지웅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바란다는 노골적인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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