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그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고 물으려고 했으나, 여지웅이 중간에 강윤재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래.”
AGT와 유착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이제껏 있었던 테러는 모두 의도하에 이뤄진 거라는 소리일까? AGT의 수장 여한올은 분명 여지웅이 입양한 양자였다.
여지웅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제 손에 쥐고 있는 걸까. 새삼 그의 음험함에 혀를 내둘렀다. 음험하지만, 그만큼 쥐고 있는 게 많기도 했으니 될 수 있는 한 윤재도 여지웅을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부탁할 게 있네.”
여지웅의 눈이 음산하게 빛났다. 이 모든 대화는 지금 본론을 이야기하기 위한 잡담일 뿐이었다.
“에스퍼의 폭주를 막기 위한 약이 있다면, 그 반대도 만들 수가 있겠나?”
“…예?”
생각지도 못 한 여지웅의 제안에 강윤재는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여지웅은 굳이 다시 설명하는 대신, 느긋하게 기다렸다.
억제제는 가이딩을 해줄 가이드가 없을 때 섭취하는 보조제였다. 이제껏 이와 관련된 연구는 어떻게 해야 약을 일반 가이딩 하는 것만큼의 효과를 끌어 올릴 수 있을지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약의 부작용으로 에스퍼가 폭주했던 경우가 더러 있어 이에 각별히 주의했던 적은 있어도, 의도적으로 에스퍼를 폭주시키려는 약을 개발하는 건 생각하지도 못 했다.
에스퍼는 귀한 국가의 재산이니까.
윤재는 방금 했던 대화를 되짚어 봤다. 좋지 않은 예감밖에 들지 않는다. 제발 아니길 바라며, 윤재가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것까지는 알 것 없고.”
단호한 어조는 강윤재의 궁금증을 묵살시켰다.
“…….”
“내가 원하는 대답은 하나뿐이네.”
여지웅의 말마따나 강윤재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너무 깊숙이까지 발을 들였던 게 문제였다. 강윤재는 여지웅과 한 배를 타고 있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보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난 우리 윤재가 눈치가 참 빨라서 좋아.”
그가 빈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윤재는 술을 그의 잔에 천천히 따라주었다. 강윤재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윤재의 대답에 여지웅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
“형. 어디 가는 건데?”
구영이 조금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주언이 충동적으로 나선 길에 얼떨결에 따라나선 구영은 불안한 표정으로 주언을 졸졸 쫓으며 물었다.
“구영아. 안 따라와도 돼….”
“아니. 갑자기 그렇게 비장한 표정으로 나서면 따라나설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에 1지구에 간다고 했다가 하루 동안 연락 두절되지 않았냐며 구영은 자신이 따라가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번에는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가기 싫은 거면….”
“여기야.”
“응? 여기?”
능력자를 전문적으로 양성하겠다는 정부의 포부와 함께 각 지구에 설립된 능력자 센터는 다른 건물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가장 높고, 견고해 보이는 건물을 향해 주언은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여기라고?”
불과 얼마 전에 이곳에 들렀던 구영이기에 이곳이 어디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주언은 대답 대신 리셉션에 있는 사람에게로 걸어갔다. 안내원이 상냥한 목소리로 주언을 응대했다.
“어떤 일로 오셨나요?”
“심사받고 싶어서 왔는데요.”
“형? 심사받게?”
“예약하셨나요?”
“아니요.”
“그럼 여기 신청서 작성해주시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주언은 대답 대신 안내원이 건네주는 신청서를 받아 들고 펜이 놓여 있는 테이블 쪽으로 갔다.
주언은 능력자 심사 신청서를 막힘없이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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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 심사 신청서
성명: 우주원
나이: 30
생년월일: 20XX년 06월 10일
심사 희망 능력: 에스퍼 / 가이드
*에스퍼의 능력을 이미 발현하였을 경우 능력 종류를 별도로 기입해 주십시오. (예: 염력계, 정신감응계 등)
개인 고유 번호:
주소:
연락처:
한국 정부 특수능력 기관에 정보 제공을 동의합니다.
신청인: ________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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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 희망 능력에 표시하기 전, 주언은 밑에 주소와 연락처 그리고 개인 고유 번호부터 적었다.
그리고 다시 심사 희망 능력 란으로 올라간 주언이 잠시 망설이다 가이드 칸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옆에서 지켜보던 구영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형. 각성했어? 갑자기 심사를 받는다고?”
“…응.”
“아니. 언제? 가이드는 능력 발현된 거 알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이야기를 여기서 구구절절 하다가는, 겨우 먹은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
“나중에 얘기해줄게.”
서류를 접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명된 이름에 주언이 구영에게 눈인사를 한 후, 안내원을 뒤따랐다.
**
등급이 높은 능력자일수록 능력이 일찍 발현한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나, 능력 발현에 관하여 관심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심사를 대기하고 있던 인원 중 가장 어린 진수희는 주변을 쓱 훑어본 후 슬쩍 웃었다.
‘보나 마나 여기서 내가 제일 잘 나오겠네.’
에스퍼와 가이드가 능력을 측정받는 공간은 같았다. 이곳에서는 C에서 E급까지 측정할 수 있는 측정실만 개방했다.
“차례대로 번호표 받고 앉으세요.”
2지구에서 평일에 능력을 측정받는 사람은 대부분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갑자기 능력을 각성한 경우. 제대로 된 직장이 없어서 혹시 하는 마음에 심사를 받는 경우.
직원도 대기 인원을 큰 기대 없는 시선으로 바라본 후, 측정실 안에 앉아 차례대로 호명하기 시작했다.
“D-급 염력계 에스퍼입니다. 나가셔서 안내 사항 듣고 출력된 검사결과지 받아 가세요.”
“내, 내가 D-급이라니…! 이럴 수가.”
앞에 호명된 사람은 후자였는지, D급이라는 말에 눈물까지 흘렸다. D-는 E보다 조금 높은 등급으로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없으나, 2, 3지구에서는 인력이 항상 부족했으니 직장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게 분명했다.
사람이 줄어들수록 주언은 괜히 긴장됐다. 윤재가 말하는 뉘앙스로는 대단하지 않은 등급의 가이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윤재와 상의도 없이 충동적으로 검사를 받으러 오다니.
검사받는 비용은 모두 정부가 부담해서 대부분 장난삼아 가기도 하는 곳이었다. 진수희의 반 아이들도 능력이 없어도 큰 뜻 없이 검사를 여러 번 받은 친구도 있었다. 검사도 매일 오전, 오후, 저녁에 나눠서 진행될 정도로 접근성이 쉬웠다.
“왜 그렇게 긴장하세요?”
진수희는 옆에 앉아 있는 주언을 몇 번 흘끗거리다가 용기 내어 말했다. 나이는 자신보다 훨씬 많아 보이지만 얼굴이 멀끔했다.
“그러게.”
“등급이 높았으면 진작 본사에서 데리고 갔을 걸요.”
“그러니?”
주언은 손에 짙게 밴 땀을 바지에 닦아냈다. 긴장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없지 않나.
“진수희 님.”
곧 진수희가 호명되었다.
어차피 등급이 높지도 않을 텐데 왜 저렇게 긴장하나 싶었다.
‘능력이 아예 없는 걸 알고 찾아온 건가?’
가끔 그렇게 절박한 사람이 있다고는 하니까. 그녀는 흘끗 뒤에 있는 주언을 보곤 측정실 안으로 들어갔다.
드물게 측정하는 직원이 들뜬 목소리로 첫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려요. C+급이네요. 진수희 님.”
“그래요?”
“혹시 모르니까 특별측정실에서 다음 주에 측정 한 번 더 받도록 해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직원이 따로 나와 진수희에게 특별 주의 사항과 혜택을 알려주겠다며 진수희를 모셔갔다.
일주일 후에 특별측정실에서 재측정 받아볼 수도 있다며 직원이 흥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껏 이곳에서 나온 등급 중 가장 높은 등급이었다.
“와. C+면 거의 B급에 근접했다는 거잖아.”
주변에서 부러워하는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주언은 작은 소란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제 차례를 기다렸다.
다른 때보다 뒷사람이 호명되는 게 늦었다. 주언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우주원 님.”
이제 주언의 차례였다.
손에 피가 통하지 않는 기분이 들어 손을 몇 번 주먹 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측정실 안에 들어가기 전, 남은 대기자들의 안타까운 시선이 주언의 등에 닿았다. 앞에 진수희가 모두의 이목을 가져갔으니 뒤에 사람이 자괴감이 들리라는 건 당연한 생각의 흐름이었다.
주언이 안에 들어갔음에도 직원은 문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급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진수희를 데리고 간 게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측정기기 안에 들어가세요.”
“네.”
주언은 캡슐처럼 보이는 측정기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색감이라, 안에 들어가면 냉기를 느낄 줄 알았는데 안은 생각보다 아늑했다.
“10분 정도 소요됩니다.”
직원이 턱을 괴며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파란색 불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빛이 밑에서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피부 안을 샅샅이 훑는 듯한 감각에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빛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쯤, 주언은 눈을 감았다.
‘긴장돼?’
이상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아닌 낯선 사람의 목소리다.
‘너랑 등급 너무 차이 날까 봐 무서워.’
‘왜 그런 안 좋은 생각부터 해?’
‘가이드는 측정받기 전까지 짐작하기 어려우니까….’
‘나 감당할 수 있는 사람 너밖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