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흠칫.
자신이 이토록 애달파 한 적 있었나. 한마디 한마디에 감정이 진득하게 묻어 나왔다. 상대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향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제껏 상실됐다고 생각했던 감정은 모두 기억 저편에 있었다. 어렴풋이 잊혔던 꿈 내용이 이랬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주언아.’
이 이름을 부르는 건 윤재여야 할 텐데, 유화 물감으로 칠한 것처럼 얼굴이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윤재가 아닌 것만 같았다. 윤재가 아니기를 바라는 걸까. 기억을 잃은 사이 변한 건 자신이라고만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삐삐삐삐—
삐이이이이———
시끄러운 소리가 측정실 안을 가득 울렸다. 주언은 수면 아래로 깊게 가라앉은 기억과 함께 잠수하려다가 수면 위로 끌어 올려졌다.
“이거 왜 이러지?”
멍하니 있던 직원이 퍼뜩 일어나 측정 기기를 살폈다. 혹시라도 다른데 정신이 팔려서 무언인가 실수했나 싶어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채로 점검했으나 실수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ERROR 010]
측정이 불가합니다.
측정을 재시작합니다…LOADING
[ERROR 010]
측정이 불가합니다.
측정을 재시작합니다…LOADING
화면은 붉어진 채 정상으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뭐지?”
결국 직원은 상급자를 호출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발견 못 한 실수가 있는 것 같은데, 혼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상급자는 모두 방금 C+급 에스퍼로 측정된 사람에게 가 있을 텐데….
“저 어떻게 되는 거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귀찮은 일에 불렀다고 욕은 좀 먹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보세요. 팀장님. 죄송한데 잠깐 일반측정실에 내려와 주실 수 있나요?”
-하필 또 이런 때 실수를 하냐. 뭐가 문제야?
앞에 팀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직원은 괜히 허리를 굽신거리며, 미안함이 듬뿍 묻어나는 어조로 상황을 설명했다.
“에러가 떠서. 네? 아뇨. 실수한 건 없는 거 같은데… 네. 죄송합니다.”
-껐다 다시 켜봐.
“다시 했는데 똑같이 나옵니다….”
-아. 알았어.
신경질적인 말과 함께 연락이 끊겼다.
2지구에서 B급 이상의 인재가 나오는 건 드문 일이었다. 높은 등급의 각성자는 주변에서 가만두지 않으니까. 능력이 일찍 발현됐다는 소식이 들리면 대부분 특수능력기관 본사까지 모시고 가 측정받게 한다.
다른 곳에서 종종 높은 등급의 능력자가 나오긴 하지만, 이곳에서는 한 번도 그런 경우가 없었다. 직원은 괜히 다시 한번 측정기기를 껐다가 재가동 시켰다.
[ERROR 010]
측정이 불가합니다.
측정을 재시작합니다…LOADING
“아. 계속 똑같이 뜨네. 에러가 자꾸 뜨는데… 잠시만요.”
그래서 직원은 측정기계의 문제라고 생각할 뿐, 주언의 등급이 높다는 걸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당황하고 있었다. 그사이 호출당한 팀장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직원의 어깨를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때렸다.
“팀장님?”
나중에는 깨지겠지만, 일단 이 상황이 해결될 거라는 생각에 직원이 팀장을 반겼다. 측정기기와 연결된 컴퓨터 앞에 선 팀장이 에러를 확인하곤 물었다.
“에러 뜬 이유는 확인해 봤어?”
“아, 아뇨.”
“설정에 들어가서 확인부터 해야지.”
팀장도 처음 보는 에러 넘버였다. 에러가 거의 난 적이 없는 탓에 직원은 처음으로 에러가 생길 시 에러 넘버를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에러…010….”
직원이 빠르게 에러의 번호를 찾기 위해 스크롤을 내리다가 멈칫했다.
ERROR 010: 해당 기기는 정상 가동 중이나, 측정 범주에서 벗어난 범위는 측정 불가합니다. 다른 기기로 재측정하시길 바랍니다.
“저 팀장님…?”
직원이 멍청한 얼굴로 측정기기를 보고 있던 팀장을 불렀다.
“왜.”
“다른 기기로 재측정하라는데요?”
“아까 전까지 잘됐는데 고장 난 거야?”
“그게 아닌 거 같은데요?”
직원의 얼빠진 목소리에 팀장이 신경질적으로, 직원의 옆에 갔다. 그러곤 팀장은 직원의 표정이 무색하게 한층 더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팀장님?”
상황 파악을 정확히 하지 못한 직원이 되묻자, 팀원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당장… 특별측정실 전원 켜.”
“네?”
“당장 특별측정실에 뛰어가서 전원 켜고 있으라고!”
그제야 직원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렴풋이 파악했다.
“……!”
1지구 외에는 한 번도 쓰이지 않았던 B급부터 S급까지 측정할 수 있는 특별측정실의 전원이 처음 켜진 날이었다.
**
주언은 검사 결과 종이를 쥐고 한참 동안 검사 센터 앞에 서 있었다.
‘A급입니다. 축하드려요! 등록해드릴까요?’
‘등록 전 유예기간이 있지 않나요? 지병이나 신체적 결함이 있으면 등록 전에 등급이 재조정 된다던데.’
‘잠시만요.’
‘…….’
‘어. 그런 조항이 있네요? 그럼 어떻게….’
‘일단 보류해주세요.’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구영이 타박할 정도로 능력자 관련 일은 아무것도 모르던 주언이었다. 전혀 모르던 정보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나왔다. 직원들도 일제히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등록 예외 사항을 검색해서 알게 됐을 정도였다.
“형, 다 끝났어?”
“…기다렸어?”
“응. 그런데 내가 검사받았던 때보다 오래 걸리더라. 심사받는 사람들 내가 받았을 때보다 적었던 것 같은데….”
“미안. 기다리게 해서.”
“내가 멋대로 기다린 건데, 뭐. 아까 위에 소리 크게 나던데. 뭔 일 있었어?”
“…어어.”
“형 표정은 왜 그래? 형 검사 결과 나왔어?”
꽉 막혀서 영원히 뚫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밀어내도 뇌는 과거의 기억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돌아오고 있었다.
“형?”
구영은 주언의 등 뒤로 가 주언이 쥐고 있는 검사 결과 종이를 살폈다. 딱히 숨길 생각은 없는지 주언은 구영이 종이를 확인하는 걸 그대로 두었다.
등급 측정 결과: A급
A급?
구영은 가장 크게 적혀 있는 글씨임에도 다시 한번 읽었다.
“형, 아까 능력자 심사 신청서 쓸 때 가이드 란에 동그라미 치지 않았어?”
구영이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검사지를 다섯 번째 읽어내리며 물었다.
“…어.”
구영은 순간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건 대박이다.
에스퍼의 숫자보다, 가이드의 수가 월등히 적었다. 에스퍼 폭주 방지 약이 개발된 이유도 가이드가 에스퍼의 숫자를 쫓아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인 A급 이상의 가이드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은 특수능력기관 본사로, A급 이상의 가이드가 채 30명도 되지 않았다. A급 에스퍼보다 A급 가이드가 더 귀했다.
“형 진짜 A급 가이드야?”
크게 터져 나온 구영의 물음에 주변 검사 결과를 끝마치고 나가는 사람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향했다. 아까 측정실 내부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걸 들었던, 주언 뒤의 대기자들의 시선이 매서웠다.
“일단… 나가자.”
주언이 마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충분히 기뻐할 일이었으나, 주언은 순순히 기뻐할 수 없었다.
**
잔뜩 흥분해 앞으로 어떡할 거냐는 구영을 진정시킨 후 주언은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집에 곧장 돌아가는 대신, 주언은 2지구에 있는 유일한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묻고 싶었다. 윤재가 이제라도 솔직히 말해준다면, 그러면. 조금 덜 원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윤재의 마음은 가짜가 아니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주언이었으니, 윤재가 누구보다 진심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이 원망은 오해로 비롯된 거라고, 자신이 윤재의 말을 꼬아 들은 거라고 확인받고 싶었다.
저 멀리서 윤재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왔어. 천천히 오지.”
“네가 기다리는데 어떻게 느긋하게 와. 웬일이야? 네가 먼저 밖에서 밥 먹자고 그러고?”
“그냥 얘기 좀 하고 싶어서.”
급하게 왔는지 윤재의 이마가 땀에 조금 젖어 있었다. 평소라면 긴장한 주언의 기색을 곧장 알아차렸을 테지만, 밖에서 식사하자는 주언의 제안에 몹시 기뻤는지 윤재는 주언이 평소보다 긴장하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하긴. 요즘 내가 바빠서 제대로 외출도 한 번 못 했네. 다음 주부터는 조금 한가해질 거야.”
한동안은 연구를 핑계로 여기에 박혀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윤재가 작게 웃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기분이 시궁창에라도 처박힌 것처럼 더러웠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졌다.
거창한 걸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주언이 제 곁에 있고, 두 사람 사이가 아주 천천히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주문부터 할까.”
“그래.”
주언이 메뉴판을 펼쳤다. 메뉴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을 시켜봤자, 맛을 느끼긴커녕 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부드러운 선율의 피아노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메꿨다. 곧 웨이터가 와인을 잔에 따라주었다. 와인 특유의 향이 코끝에 머물렀다.
윤재의 턱짓에 웨이터가 주언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너 나 술 마시는 거 안 좋아하잖아.”
“와인 한 잔 정도는 괜찮아.”
“…….”
“담당의로서도 괜찮다고 판단해서 말하는 거야.”
선뜻 말을 뗄 수 없었다. 주언은 와인 잔을 손에 들고 천천히 흔들었다. 술을 자주 마시지도 않고, 약한 탓에, 와인 특유의 향이 역겨울 정도로 강하게 느껴졌다.
이런 질문도 당연하게 넘겼지만 연인 사이에 흔히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니, 가까이에 있을 때는 괜찮아 보였던 우리의 관계는 어그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