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윤재야.”
주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리 단어를 고르고 골라도 윤재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밖에 없는 대화 주제다. 주언의 부름에 윤재가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곤 잔을 내려놨다.
“우리 밥 먹고 얘기하자.”
“나… 알바 그만둘까 봐.”
예상치 못한 대화의 물꼬에 윤재가 미간을 좁혔다. 크게 놀라거나 속상해할 발언은 아니었다.
“알바는 갑자기 왜?”
“나도 제대로 된 직장 알아봐야지.”
“돈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그러지 마.”
주언은 모르고 있지만, 주언이 일하고 있는 카페는 윤재가 매수한 곳이었다. 신경 쓰게 하기 싫어서 명의를 바꿔뒀으나 주언이 받는 것에 익숙해지면 카페 명의를 주언에게로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럼 나는 평생 너한테 얹혀살아? 부모 자식도 수틀리면 연 끊는 세상이야.”
“그럴 일 없어.”
“…….”
“만약 그렇더라도 내가 너를 그냥 내쫓을 거라고 생각해?”
윤재의 말에 주언이 이마를 짚었다.
“우리 지금 이 대화 자체가 이상해. 윤재야.”
대화를 하면 할수록 죄책감은 가라앉고, 이를 대신해서 서서히 다른 감정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대화를 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윤재도 알고 있었다. 주언이 윤재에게 부채 의식과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방관했다. 방관이라기보다는 가만히 있음으로써 주언이 제 죄책감에 지쳐 떨어져 나가 윤재가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주언아. 너 조금 이상해.”
“이상해진 게 아니라 이제 정신을 차린 거겠지.”
윤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자신을 보기 위해 1지구에 가려던 때, 그가 자신이 가이드임을 기억해냈을 때 더 신경 썼어야 했다. 괜히 섣불리 행동했다가 주언이 기억을 더 되찾을까 봐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했던 게 악수였다.
“이제껏 너 아팠어.”
“그래. 그렇다고 쳐. 근데 이제는 아니잖아.”
주언은 완치 판정이 났다. 주의 사항이 있긴 했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윤재는 전과 다른 단호한 주언의 태도가 신경 쓰였다. 늘 성실하던 주언이 무작정 일을 그만둔다고 할 리 없었다.
“…뭐 생각해둔 거라도 있어?”
“전에 했던 직업.”
“…….”
“가이드. 다시 해보려고.”
“안 돼.”
윤재의 강압적인 대답에 주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격렬한 어조로 안 된다고 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만두는 건 너에게 동의를 구하는 게 아니라 결정 난 걸 말해주는 거야.”
“주언아. 하… 우리 이러지 말자.”
윤재가 짙은 한숨을 내쉬며 팔을 뻗어 주언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이 주언의 손등을 덮었다. 애원하는 윤재의 시선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기억을 상실한 게 미안해서, 연고 없는 자신을 책임져줘서 고마웠다.
“뭘 이러지 마?”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
“난 항상 너를 생각해.”
“…….”
“그러니까 안 돼.”
고마웠다. 너무 고마운 일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이제껏 윤재가 바라는 대로 생활했다. 윤재는 주언이 변했다고 했지만, 변한 게 아니었다. 그저 깨달았을 뿐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앞길을 재단할 권리까지 쥐여준 적은 없다는 사실을.
“이유는?”
“…경과 더 지켜봐야 돼.”
지금 말한 것들이 이제껏 억눌려왔던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이 생각이 묵살당하도록 둘 수 없었다.
“언제까지?”
“…….”
“이미 1년이나 지켜봤어. 임상 시험은 성공이잖아. 인공 장기 단 사람들 다 일상생활 멀쩡히 해.”
주언은 답지 않게 씨근덕거렸다. 이성적인 생각으로는 여기서 진정하고 차분히 대화하는 게 낫다는 걸 알지만 한 번 과열된 감정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윤재도 할 말을 잃은 채 있었다. 때마침 음식이 나왔다. 갓 나온 음식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먹을 기분이 들지 않았다. 먹은 후에 얘기하는 게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랬으면 무조건 속에 얹혀서 고생했겠지.’
이 싸움 하나로 모든 게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 대화를 일단락하고, 진정한 후에 얘기하는 게 맞다는 걸 알았다.
“나한테 할 말 없어?”
“할 말?”
“숨기고 있는 거 같은 거.”
“…없어.”
주언이 찬물을 들이켰다. 식도를 타고 차가운 물이 흐르자 격해졌던 감정에 흐릿해졌던 정신이 맑아졌다.
“나 벌써 가이드 등급 측정받았다. 윤재야.”
“뭐?”
“A급이더라.”
윤재가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종말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망연한 얼굴이다.
“지금 너 혼자 심사까지 다 받고, 다 결정하고 나한테 말하러 온 거야?”
“…윤재야.”
“하… 진짜 개 같다. 이 상황이.”
“고작 심사 한 번 받는 건데 왜 그래.”
“고작 심사? 너한테 고작인 거면 내 부탁대로 안 받을 수 있었던 거잖아.”
“왜 받으면 안 되는데? 과거랑 연관 있어서?”
“…….”
“나 알고 싶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윤재가 숨기는 게 있다면 듣고 싶었다. 자신과 관련 없는 비밀을 말해달라는 게 아니라, 자신이 관련된 문제이니까 말해달라는 거였다.
“그래. 그래서….”
“아직도 나한테 할 말 없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게 중요해? 여기까지 와서?”
공격적으로 쏘아붙이는 윤재의 얼굴에 절망이 잠시 스쳤다.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주언이 알 수 있는 건 주언이 겪고, 본 상황뿐이었다. 윤재를 이해해보려 했으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걱정된다는 말조차 이제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 속였다는 거에 사과는 할 거라고 생각했어.”
“…….”
치솟는 감정은 가라앉지 않고 점점 더 심하게 주언의 속에서 일렁였다.
“우리 잠깐 시간 좀 갖자.”
정신이 맑아져도 도저히 윤재와 감정을 풀고 집에 나란히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주언의 말에 윤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굳었다. 몹시 충격받은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 주언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상처를 주고 싶은 건 아니었다.
“주언아.”
윤재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주언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가, 목적지에 닿지 못하고 허공에 멈췄다.
“…고마운 건 내가 어떻게든 갚을게.”
주언이 윗옷을 챙겨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동등한 선에 서게 되면 우리 관계가 바뀔까. 뒤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들렸으나 주언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모든 시발점은 그 남자 때문이었다. 화려한 밤사이 우두커니 적막에 잠겨 있던 남자. 그 남자의 품에 휩쓸려 들어갔을 때 모든 게 송두리째 바뀌었다.
“흐윽…윽….”
꼴사납게 눈물이 났다. 자신을 지켜준, 오래된 애인에게 아무리 애써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은 그 남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벅차올랐다.
탁-!
손목이 거세게 붙잡혀 몸이 강제로 틀어졌다. 뒤따라왔는지 윤재는 재킷조차 걸치지 않은 채, 이 밤거리를 뛰어 달려왔다.
“헤어지자는 소리야?”
“…나중에 얘기하자고 했잖아.”
주언이 대답을 피하자 윤재가 고개를 젖히며 헛웃음을 토해냈다. 강윤재는 주언을 갖기 위해 자신답지 않게, 꼴사나울 정도로 노력했다. 여지웅에게 계속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것도, 자신의 성과를 개인의 것으로 두지 않은 것도. 모두 주언을 위해서였다.
기억을 잃어서 새 삶의 출발선에 선 주언조차도 자신을 거부한다는 생각에 머리의 퓨즈가 나갈 것 같았다.
“고마운 걸 갚는다고? 주언아. 내가 그거 갚으라고 널 내 옆에 둔 줄 알아?”
둘이 같이 연인다운 건 해보지도 못했다. 언감생심 꿈꾸지도 않았다. 그냥 소매가 가랑비에 젖어들듯, 주언의 인생에 한 칸이라도 차지할 수 있으면 좋을 거라고 여겼다. 어차피 제 자리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 지금까지 망설이지 않았을 텐데.
휙!
윤재가 주언의 팔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주언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윤재의 행동에 주언이 속절없이 끌려갔다.
츠읏, 츳.
뜨거운 입술이 순식간에 맞물렸다. 주언이 눈을 크게 떴다. 아랫입술이 아플 정도로 깨물렸다.
“윽.”
입술을 너무 세게 부딪쳤는지 입 안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퍽.
뒤늦게 정신을 차린 주언이 윤재의 가슴팍을 거세게 밀쳤다. 윤재도 더 할 생각은 없었는지 순순히 밀려났다. 타액에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훑은 주언이 윤재를 향해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너 뭐 하는 짓이야?”
“애인 사이인데 할 수도 있는 짓.”
윤재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타액을 붉은 혀로 훑으며 대답했다.
“강윤재!”
주언이 비명처럼 윤재의 이름을 부르자, 윤재가 중얼거렸다. 바로 옆 간판이 켜졌다. 붉은색 간판 탓인지, 윤재의 눈가가 조금 붉어 보였다.
“내가 널 위해서 뭘 버렸는지… 넌 몰라.”
“뭘 버렸는데.”
주언이 멈칫했다. 단순히 2지구까지 내려와서 담당의가 된 것에 관해 하는 말이 아니다. 말의 뉘앙스는 조금 더 깊은 속내를 담고 있었다.
“네가 뭘 버렸는지,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난 몰라.”
“주언아. 그냥 우리 전처럼 지내자.”
차라리 이대로 속내를 터놓고 싶었으나, 윤재는 또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나 당분간 집에 안 들어갈게.”
갈 곳은 없지만, 철면피를 깔고 그 집에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척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아니. 넌 집에 가. 춥다. 감기 걸릴라.”
주언이 갈 곳이 없는 건 윤재 또한 아는 사실이었다.
“…윤재야.”
“같이 가자는 거 아니야. 내가 나가 있을게. 난 연구소에 숙소 있으니까, 거기서 지내면 돼.”
“…….”
“…다음에 얘기하자.”
이번에 먼저 자리를 떠난 건 윤재였다. 주언은 윤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 동안이나 제자리에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저녁은 한 입도 먹지 않았는데, 체한 것처럼 속이 너무 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