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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45화 (45/112)

#45

진수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생각보다 높은 등급인 C+등급이 되었을 때는, 기관 직원들이 특별측정실이 처음 개방되겠다며 호들갑을 떨어 내심 ‘설마 내가 B급 이상?’이라는 꿈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진수희는 기대대로 재측정을 했을 때 B-등급이 떴다. 거의 턱걸이로 된 B급이지만, 2지구에서 드물게 나온 B급이라 진수희는 내심 열렬한 반응을 기대했다.

하지만 정확한 측정을 위해 일주일의 텀을 둔 후, 재방문 한 기관은 처음 C+급이 떴을 때와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결과가 나온 후에도 직원들의 태도는 전과 다르게 차분했다.

묵묵히 있는 게 제일 낫지만, 궁금증이 입을 뚫고 나와버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네?’

‘전보다 …어수선한 거 같아서요.’

정확히 말하자면 이쪽이 갑자기 찬밥 된 것 같아서 물어본 거였으나, 들떠 있는 직원은 그녀의 말에 숨은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정보를 누설하고 말았다.

‘아. 이번에 여기서 A등급 나왔거든요.’

‘네?’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건데, 비밀 유지 부탁드릴게요.’

이미 물을 엎질러 놓은 직원은 아차 싶었는지 낭패 어린 기색으로 부탁했다.

A급 나타날 수 있다. 국가에 이바지할 인재가 늘어나는 것이니 기쁜 일이다. 그런데 왜 하필 자신이랑 측정 시기가 겹치냔 말이다.

추천서를 받아 1지구 특수능력기관 본사 앞에 선 진수희는 새로이 마음을 다짐했다. 고작 한 명 때문에 오늘 처음 훈련소에 입소하는데 풀 죽어 있을 수 없었다.

“어?”

“……?”

훈련소에 구영과 함께 들어가던 주언은 자신을 보고 놀란 듯 보이는 어린 학생을 보며 이마를 좁혔다. 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저기. 나이가 어떻게 돼요?”

“…서른.”

불쑥 들이밀어진 질문에 주언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진수희가 말갛고 단정한 얼굴을 잠시 보다가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럼 아닐 텐데…. 누구지.”

고개를 저으며 사라지는 진수희의 뒷모습을 보던 주언이 뒤늦게 그녀를 어디서 봤는지 깨달았다.

“형. 아는 사이야?”

사소한 거 하나하나에 감탄하느라 뒤늦게 따라오던 구영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그녀가 사라지자 곧장 물어왔다.

“전에 측정받았을 때 같이 있던 사람이야.”

“이번에 특별히 정보 공개했던데, 거기서 언급된 B-급 에스퍼가 저 사람인가?”

“그런 것 같더라.”

구영이 어째서인지 질 수 없다며 비장한 표정으로 큰 보폭으로 앞서 나갔다.

주언은 건물 안에 들어서기 전 잠시 멈춰 서, 2지구에 있는 건물과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긴장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기억을 찾는 게 무서웠다. 생각보다 자신이 형편없는 사람일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곳에는 자신의 과거가 잠들어 있다.

뚜렷하게 떠오른 기억은 없지만 주언은 확신했다.

**

윤재는 2지구에 있는 사무실을 정리하고, 원래 근무하던 본사로 돌아왔다. 주언이 1지구로 간 이상 윤재도 그곳에 있을 필요 없었다.

주언과 연락하고 있진 않지만, 오늘 훈련소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괜히 블라인드 틈새를 벌리고 밖을 쳐다보았다. 지금쯤이면 자리를 이동할 시간이었다. 블라인드를 들추는 그 순간, 주언이 타이밍 좋게 그곳을 지나갈 확률이 희박했다. 그래도 사소한 일에라도 의미부여 하고 싶었다. 우리가 운명이라면 어쩌면, 그런 필연에 가까운 우연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이 들었다.

윤재가 의자 등받이에 무게를 실었다. 고개를 젖혀 천장을 응시했다.

“우주언.”

고작 사소한 일이고, 혼자 멋대로 기대한 것뿐인데 기분이 바닥을 기었다. 주언의 존재는 이성적이고 냉철해야 할 윤재의 머리를 매번 헝클어 놓는다. 희박한 확률에 희망을 거는 건 멍청한 일인 줄 아는데도, 머저리같이 구는 걸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본사 훈련소와 본사는 같은 건물이긴 하지만, 훈련소와 S급 사무실은 정반대였다.

오히려 등잔 밑이 어두울 수도 있다. 자신이 이곳에 온 건 때마침 여지웅이 부탁한 것도 있으니 의심을 피할 이유는 많았다. 주언만 들키지 않으면, 윤재가 이제껏 일궈놓은 모든 것들은 금방 다시 자리를 잡을 것이다.

윤재는 핸드폰을 꺼내 단축키 1번을 눌렀다. 신호음은 짧았다. 주언은 전화를 받는 대신 끊고, 곧장 톡을 보내왔다.

-곧 설명회래. 무슨 일이야? 급한 일 아니면 나중에 연락할게.

나중에 연락하자. 윤재는 답장을 보낸 후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는 희박한 확률의 우연이, 여명훤에게만 일어날 리 없다. 우주언은 이제 자신의 사람이니까.

1지구 훈련소에 지원서를 쓸 때까지 윤재와 주언은 냉전 상태였다. 주언이 입을 옷이 떨어져서 집에 가지러 며칠 만에 들렀을 때 마주친 두 사람은 다시 대화할 수 있었다.

‘안 막을게.’

윤재는 마음을 바꿨다. 이제는 막는 순간, 휘지 않는 대신 일정 압력 치를 넘어서면 부러지는 나무처럼 두 사람 관계는 부서질 테니까.

‘뭐?’

‘지병이 있다고 하고 B급 가이드로 등록해.’

‘뭐?’

‘그러면 조금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나중에 갱신해도 늦지 않잖아. 난 늘 네가 우선이야.’

틀린 말이 아니었다. 윤재는 주언의 안전이 가장 우선이었다.

‘알겠어.’

이 합의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느꼈는지 주언은 입술을 달싹였으나, 곧 윤재의 대답에 긍정했다.

주언은 아마 가이딩 할 때 폭주할까 봐 걱정하는 거라고 믿고 있을 테지만, 윤재는 그 사실을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여지웅의 존재도, 여명훤의 존재도 그냥 모르는 편이 제일 나았다.

혹시 몰라 집은 그대로 뒀다. 주언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도록.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은 됐다. 윤재는 고개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념에 젖을 시간은 이제 더 이상 없었다.

‘대체 에스퍼 폭주를 일으킬 수 있는 약은 왜 필요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윤재는 안경을 끼고, 연구소 가운을 챙겨 입었다. 다시 돌아온 이상 아무도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모르도록 성과를 내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 이곳에서 입지를 다지려면 능력을 쉴 새 없이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본사에 수석 연구원으로 있었을 때, 자신을 유독 따르던 주임 연구원이 윤재가 새로 개설하는 팀으로 옮긴다고 하더니 벌써 인사 온 건가 싶었다. 다른 연구원들에 비해 성과도 잘 내서, 그녀가 합류해준다면 윤재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이제는 주임 연구원이 아니라, 책임 연구원이라고 했었나.’

윤재의 허락에 문이 벌컥 열렸다. 윤재가 문 너머의 사람을 확인하기 전, 상대가 먼저 윤재에게 인사를 해왔다.

“오랜만이다.”

나갈 준비를 하려고 다른 쪽을 보고 있던 윤재의 시선이 순식간에 문 쪽으로 옮겨졌다.

윤재는 방금까지 생각하고 있었지만, 마주칠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눈앞의 인물을 놀란 듯 바라보았다. 연구 부서 쪽은 굳이 찾아오지 않는 이상 우연히 오기 힘든 곳이었다.

“…그러게.”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다?”

여명훤이 턱을 당기며 웃었다. 분명 미소 짓고 있는데도,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올라간 입매에 비해 강윤재를 바라보는 여명훤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나 오늘 왔는데, 네가 제일 먼저 볼 사람이 될 줄 몰랐으니까.”

명훤은 안에 들어가는 대신 문턱에 멈춰 서서 윤재의 사무실 안을 훑어보았다. 방금 와서 안은 휑하기 그지없었으나 명훤의 시선은 집요했다.

“소식이 참 빠르다? 웬일이야?”

“비공개 실험에 참여했다가 본사로 돌아왔다는데 인사는 해야지.”

그 소식을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말해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오랜만에 가까이서 본 여명훤은 전보다 낯설고 위험한 기운을 풍겼다.

주언이 공식적으로 사라지기 전, 4년 전에 본 이후로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인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가라앉은 시선이 윤재를 탐색하듯 훑었다. 켕기는 게 있어 보이고 싶지 않아 윤재도 턱을 꼿꼿이 세워 여명훤을 마주 보았다.

“그래?”

“우리가 인사도 못 하는 사이는 아니잖아.”

“…….”

윤재가 가늠하듯 명훤을 바라보았다.

“아닌가. 인사도 못 하는 사이인가?”

“이런 말장난 칠 사이는 아니긴 하지.”

여명훤이 비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무언가 알고 온 건가?

여명훤은 전보다 표정을 읽기 힘들어졌다. 예전에는 그저 무뚝뚝해서 짐작하기 어려운 거였다면, 지금은 표정을 익숙하게 숨겨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굳이 인사하러 와줘서 고맙네.”

아니 그럴 리 없다. 만약 무언가 알았더라면 이런 떠보는 듯한 인사를 할 리 없었다.

윤재가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며, 챙기려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무슨 꿍꿍이인 줄 모르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인사만 하고 서둘러 지나가려 했으나, 명훤이 자연스럽게 문을 가로막았다.

“뭐, 딱 인사만 하기 위해서 보러 올 사이가 아닌 건 확실하고.”

“…용건이 뭐야? 너 많이 바쁘잖아.”

명훤은 기관에서 가장 유명한 S급 에스퍼였다. 단순히 공격 1팀의 업무만 해도 업무가 많았다. 팀을 개편하고 인원 증원을 했다고 한들, 던전은 끊임없이 생기고 있으니까.

기관에서 요청한 대로 언론에 모습을 비치는 것만으로도 그의 일정이 분 단위로 쪼개져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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