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왜 갑자기 돌아온 거야?”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게 돼서. 뭐 이 이유밖에 더 있어?”
“이번에도 기밀이야?”
“어. 그게 궁금해서 온 거야?”
“풍화증 치료 개발한 것도 축하 인사 아직 안 한 것 같아서. 짧은 시간 안에 결과 내려고 투자 엄청 받았다며?”
“…….”
“마치 빨리 치료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여명훤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윤재에게 닿았다. 작은 변화라도 그의 시선 아래에 낱낱이 까발려질 것 같았다. 평범한 사람이었더라면 동요를 드러냈을 테지만, 윤재는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할 얘기 다 했어? 나도 이제 슬슬 나가야 돼서.”
“…….”
“…….”
“아. 맞아. 여 의원님은 잘 계셔?”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 여지웅의 일정은 그의 음침한 성격답게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그 장소에 있던 사람은 모두 여지웅의 사람들이었다.
상대가 여명훤이니만큼 어쩌다가 우연히 일정을 알게 됐을 수는 있어도 대화 내용까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윤재는 문 쪽으로 다가가 명훤의 앞에 마주 섰다.
“네 아버지 일을 왜 나한테 물어봐?”
“나보다 널 더 아끼시더라고. 어느 순간부터.”
여명훤이 어깨를 으쓱이며 윤재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윤재는 일정한 보폭으로 걸었다.
“그런데 윤재야.”
뚝. 걸음이 멈췄다. 피부가 따끔할 정도의 공기에 윤재는 뒤돌아보지조차 못했다. 능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공기가 명훤의 감정에 감응해 사납게 일렁이는 것이다.
“…어….”
압도적인 존재감에 윤재가 숨을 죽였을 때, 명훤이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주언이 어디에 있어?”
“…나한테서 무슨 대답을 바라는 질문인지 모르겠는데.”
“그래?”
입술을 깨문 윤재의 턱이 도드라졌다. 굳은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걷기 시작했다. 윤재가 복도에서 벗어날 때까지 다른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아. 또 꿈이다.
주언은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감지하며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한 번 과거와 관련된 꿈을 꾼 이후로, 주언은 주기적으로 이런 꿈을 꿨다. 이곳에서 주언은 제삼자였다. 감각은 선명하지만, 몸은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의 얼굴도 흐릿한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주언은 어떤 남자의 배 위에 뺨을 대고 누워있었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주언의 머리카락을 쓸고 있었다. 사락거리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하지만 튀어나온 목소리는 퉁명하기 그지없었다.
‘안 해?’
주언의 노골적인 물음에 남자의 손이 멈칫했다.
‘너 아플 바에는 평생 안 하는 게 나아.’
‘…그래서 안 한다고?’
‘응. 난 괜찮아.’
남자가 주언의 등을 토닥였다. 그의 다정함에 질식할 것 같았다. 이 순간을 줄곧 한 사람만이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에 숨이 턱 막혔다. 주언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이미 일어났던 일의 파편은 착실히 그 순간을 재연했다.
‘아니…!’
‘어?’
‘그렇게 만지작거리기만 하면 내가 감질난다고.’
‘…뭐?’
‘내가 하고 싶다고.’
‘네가?’
남자의 손이 멈췄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놀랐을 거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 나도 그런 말 할 수 있어.’
‘아니….’
‘왜, 뭐. 왜.’
멋쩍어서 괜히 소파를 짚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서.’
남자가 강한 힘으로 주언의 허리를 덥석 안아 들었다. 갑자기 허공에 붕 뜨는 감각에 다리를 버둥거렸으나 잡은 팔은 미동조차 없었다. 발이 다시 바닥에 닿았을 때에는 침대 위였다.
‘평생 안 해도 된다면서. 뭐가 좋은데.’
‘너도 나를 미친 듯이 원하는 거.’
그가 주언의 이마에 살짝 입맞춤했다. 불도저처럼 침실로 끌고 올 때는 언제고, 그의 입술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살결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공기가 뜨거웠다.
‘조금 아파해도 멈추지 마.’
‘나 여기서 더 부추기지 마.’
‘읏. 부추기는, 게… 앗. 아니라.’
피부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주언은 있는 힘껏 그에게 매달렸다. 그에게서 절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이.
감정이 벅차올라 눈가가 뜨거워졌다.
‘울지 마. 응?’
‘으…응.’
그의 붉은 혀가 눈가를 쓸었다. 다정한 말투와 다르게 절제가 풀린 짐승은 몰아붙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움직일 때마다 촘촘하게 박혀 있는 등 근육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사이렌 같은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주언은 온몸이 땀에 젖은 것을 확인하곤 이마를 짚었다.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꿈속 광경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주언은 잽싸게 일어나 욕실에 뛰어들어 갔다. 구영도 일어났는지 문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치겠네.”
훈련소에 들어온 이후부터 꿈의 횟수가 더 잦아졌다. 혼자 방을 쓰는 것도 아니라 민망했다.
쏴아아아. 욕실 안의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주언은 물을 가장 세게 틀었다.
**
특수능력기관 본사의 훈련소에 오는 사람은 손에 꼽아 바깥에서는 선망의 눈빛을 받지만, 기관 내에서 훈련생은 햇병아리나 다름없었다.
여명훤은 자타공인 모두가 인정하는, 국가에서조차 대외적으로 밀고 있는 S급 에스퍼였고 자신은 훈련생 신분이었다.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어서 훈련소에 오자마자 만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스쳐 지나가지조차 못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반 팀으로 배정받아도 못 보는 게 공격 1팀인데, 한낱 훈련생이 어떻게 S급 능력자를 봐.”
그리고 당연하게도 여명훤을 보고 싶어 하는 훈련생은 비단 주언뿐만이 아니었다. 능력자들 사이에서도 최정점에 군림하는 여명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았다.
“여기서 나가기 전에 볼 수 있을까?”
“형도 여명훤 좋아했나?”
별 뜻 없이 한 말이란 걸 아는데 대답을 쉽게 할 수 없었다. 그냥 다른 사람처럼 단순한 팬심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어.”
“아마 힘들지 않을까?”
이제 곧 돌아갈 날만 남겨두고 있었다. 주언은 아직 진로를 정하지 않아, 훈련소에 더 남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었으나 솔직히 더 배울 만한 것은 없었다.
처음에는 체력이 부족해 조금 힘들긴 했다. 하지만 체력이 조금 붙은 순간부터 주언은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성장세를 보였다.
“형이 본사에서 일하면 언젠가 한 번쯤은 볼 수 있지 않을까.”
“…….”
“어떡할 거야?”
구영과 룸메이트로 지낼 수 있는 건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아직 모르겠어.”
여기에 있고 싶었다. 윤재의 걱정과 다르게 주언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이 생활이 편했다. 윤재가 재촉하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 연락이 닿을 때마다 윤재는 자신이 돌아오길 바란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형 정도면 본사에서도 반길 텐데. 형 애인이 그렇게 싫어해? 어차피 1지구에 원래 직장이 있다며.”
“조금 더 생각해 보려고.”
다시 한번 그를 만나면 뭔가 바뀔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느낌이 들었다.
“뭐 아직 더 고민할 시간이 있으니까.”
막상 만나면 근거 없는 느낌이 순식간에 녹아 사라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그 남자를 어떻게든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주언의 머릿속에 강하게 심어졌다.
**
처음 2개월은 체력 향상을 위해 훈련했고, 그 후 2개월은 능력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훈련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2개월은 곧바로 현장에 투입되어도 괜찮을 정도의 전투 감각을 기르기 위한 훈련이었다. 현직 헌터의 지도로 낮은 등급의 던전에 실제로 들어가는 실전 위주의 훈련이 진행된다고 했다.
마지막 2개월, 첫째 날. 평소 훈련해야 하는 시간 모든 훈련생은 실내 체육관에 모였다. 훈련생들을 일렬로 세우고 한 명씩 호명하며 종이를 배부했다.
“우주원 씨.”
주언도 호명을 받아 앞으로 나가자, 종이를 나눠 받았다.
우주원
가이드 / B급
C조
그제야 전에 보지 못했던, 바닥에 적혀 있는 알파벳이 뜻하는 의미를 알아차린 훈련생들이 제 조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였다.
“밸런스를 생각하고 짠 팀 조합이니까 팀끼리 잘 지내는 편이 좋을 겁니다.”
임무를 클리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서라 인원은 최소한으로 구성됐다. 현직 헌터가 일종의 안전장치로 따라나서는 것으로, 위험을 최소한으로 두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대충 어떤 식으로 조를 짰는지 감이 잡혔다. 능력이 괜찮을수록 소수로 그룹이 편성되었다.
“형. 어디야?”
“C조.”
“나돈데. 와. 잘됐다.”
“넌 어디에 배정됐어도 적응 잘했을 텐데.”
아는 사람이 같은 조라니. 말주변이 없는 주언이야말로 다행이었다.
하지만 구영은 주언의 옆구리를 슬쩍 치며 “형 진짜 등급보다 더 나은 등급 있는 사람 없을걸?”이라고 속삭였다. 주언이 괜히 의식해 주변을 둘러보자, 구영이 이미 주변 살피고 말한 거라며 씩 웃었다.
“잘 부탁할게.”
“나야말로 잘 부탁해. C조는 저기로 가면 되나? 다른 팀원도 괜찮으면 좋겠다.”
“그러게.”
‘인원은 적으면 세 명, 많으면 8명까지네.’
주언이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구영이 먼저 C조라고 쓰여 있는 곳으로 가서 사람 좋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
“…….”
주변을 파악하느라 주언이 뒤늦게 인사했다. 먼저 도착해있던 진수희가 고개를 한 번 까닥였다. 이쪽을 번갈아 보는 시선이 가늠하듯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