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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47화 (47/112)

#47

“어? 우리 처음 온 날 형 막 쳐다보던 사람 아니야?”

구영은 뒤늦게 진수희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많이 놀랐는지 손가락질까지 하자 주언이 구영의 팔을 내리며 작게 속삭였다.

“전에 측정받을 때 같이 대기했었어.”

대수롭지 않은 사이였다. 왜 저렇게 자신을 의식하는지 모르겠지만, 괜히 이쪽도 날 선 반응을 보여봤자 좋을 것 없었다. 아까 들었듯 죽이 되나 밥이 되나 지금 조는 바꿀 수 없다. 그러니까 웬만하면 원만하게 지내는 편이 좋다.

호명되기 편하도록 가슴팍에 붙여져 있는 명찰을 확인했다. 등급과 이름을 확인했다.

B-, C급 에스퍼. 그리고 B급 가이드.

이번 분기에 가장 높은 등급의 능력자는 B+급이라고 얼핏 들었다.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다. 흘끗 보니 3명으로 이루어진 조는 2~3팀 정도뿐인 듯했다.

‘이름이 진수희구나.’

한참 명찰을 뚫어져라 보던 진수희가 입을 열었다.

“둘 다 같은 2지구 북부기관에서 등록하시고 오신 거예요?”

“…네.”

“이번에 2지구 북부기관에서 본사 훈련소까지 온 건 세 명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그런데요?”

구영의 까칠한 대답에 진수희가 머뭇거리더니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뭔지 모르지만 다짜고짜 왜 그렇게 물어봐요?”

“…구영아.”

구영은 뭐라고 더 말하려고 했으나 곧 담당 헌터를 배정하겠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조끼리 다 모인 것 같으니까 새롭게 개편된 남은 훈련 과정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훈련소를 통솔하는 사람은 공격 2팀 소속 에스퍼였다.

“능력자로 발현된 후 3년간 훈련을 거치는 일반 과정과 달리, 단축 훈련을 하는 현 과정에서는 현장에서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20% 더 높습니다.”

A급 이상의 헌터는 정부에서 생활비를 지원해주며 3년 훈련 과정을 이수하지만, 그 밑 등급부터 정부의 지원이 끊기며 훈련 기간을 정할 수 있었다.

에스퍼가 대폭 늘었지만 그만큼 사고도 늘었다. 훈련 기간에 따라 지원할 수 있는 곳에 제한이 생기지만 아무리 안전한 곳에 지원한다고 해도 사고는 예기치 못하게 생기는 법이다.

6개월은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생과 사를 오가는 일에 닥쳤을 때, 6개월 훈련 경험만으로는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던전을 많이 클리어할수록 추가 점수를 매기도록 하겠습니다.”

던전을 많이 클리어할수록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2개월 동안 실전을 미친 듯이 나가 전투 감각을 익히라는 뜻이다.

평가는 배정된 현직 헌터가 할 것이며, 위험이 생길 시 헌터의 손을 빌릴 수 있지만 감점 요인이 된다는 둥 부연 설명을 했다.

**

C조의 능력은 상성이 나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좋은 편에 속했다. 구영은 염력계 능력자로 뒤에서 서포트가 가능한 역할이었고, 진수희는 검에 특화된 능력을 구현해서 단거리에 능했다.

구루룩.

구룩.

초록색의 거친 피부를 가진 고블린이 몽둥이를 들고 이쪽을 위협했다. 고블린은 던전 끝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취락을 지키는 고블린이 요란한 소리를 내자 흩어져 있던 고블린이 일제히 이쪽으로 몰려왔다.

쉬익!

진수희가 가볍게 뛰어올라 바로 앞에 있는 고블린의 몸을 빠르게 베어냈다. 순식간에 앞에 있는 고블린의 몸에서 피가 솟구쳤다.

진수희가 뒤로 물러서자, 구영이 염력을 이용해 단도를 일제히 고블린 무리를 향해 던졌다.

촤촤촤촥!

“야! 내가 더 멀리 갔을 때 던지라고 했잖아. 피 다 튀었네.”

“도와준 거잖아. 더 늦었으면 다칠 수도 있었어.”

구영의 말에 진수희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세세한 걸 컨트롤 못하니까 네가 C급인 거야.”

“턱걸이 B급 주제에 설교는.”

“나는 열아홉에 B급이니까 발전 가능성 있거든?”

두 사람은 능력을 쓰며 쉴 새 없이 서로를 헐뜯기 바빴다.

“뒤에!”

구영이 고개를 숙이자, 진수희가 바로 뒤에 있는 고블린을 베어냈다.

“말 안 해줘도 알고 있었어.”

“거짓말.”

촤아악! 자비 없는 검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끔찍한 비명 소리가 난무했다.

구에에엑—!

말싸움을 하며 두 사람은 순식간에 고블린 취락을 멸망시켰다. 속수무책으로 D급 던전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이제 거의 하루도 안 돼서 D급 던전을 클리어하네요.”

“다른 사람들이 비해 빠른가요?”

“가끔 주언 씨가 물어보는 거 들어보면 정말 던전을 잘 몰라서 물어보는 건지, 눈이 너무 높은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

“고작 두 명에다가 훈련생인데… 전투 센스가 압도적이네요.”

연계가 좋긴 했지만 빈틈이 제법 많았던 것 같았는데. 주언은 굳이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분명 능력의 상성은 좋았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아마 능력의 상성만 보느라 성격의 상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걸까.

늘 살갑던 구영은 이상할 정도로 진수희에게 반감을 드러냈고, 조용했던 첫인상과 다르게 진수희도 구영에게 공격적으로 굴었다.

“…참… 둘 다 따로 보면 좋은 사람들인데 성격이 안 맞네요.”

C조와 함께 다니는 A-급 에스퍼 헌터 정선우가, 바로 옆에서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언에게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그러게요.”

“성격까지 맞았으면 바로 공격 2팀 영입하고 싶을 정도예요.”

주언이 멀리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양반은 못 되는지 두 사람이 맹렬한 기세로 주언 쪽으로 다가왔다.

“형! 나 가이딩.”

“가이딩은 등급 순으로 받는 거거든요?”

두 사람 다 아직 괜찮았다. 아직 전력의 반도 쓰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이 경쟁하듯 다가왔으나 주언은 두 사람의 팔목을 동시에 잡았다. 주언이 가이딩을 시작하자 두 사람이 유순한 양처럼 조용해졌다.

“이제 갈까요?”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선우가 말하자, 진수희가 취락 안쪽을 흘끗 본 후 입을 열었다.

“아, 감독관님.”

“네?”

“저기 안에 문 같은 게 있는데, 저게 뭔지 아세요?”

“어디요?”

“저-기요. 골목 꺾으면 있는 공간 안에 들어가면 있던데요?”

두 사람이 동시에 한쪽을 가리켰다. 고블린이 가장 거세게 반항했던 곳인지, 가리킨 곳은 피가 낭자했다.

“어디요?”

“저기 안에 들어가면 엄청 높고 큰 공간이 나오던데요?”

“이상하네?”

정선우는 D급 던전에서 이런 경우를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래도 만약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측정 오류가 났을 수도 있지 않나.

“잠시만요.”

혹시 몰라 휴대 마력 측정기기를 켰다.

“던전 측정 오류난 건 아니죠?”

진수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띠. 띠. 띠이이이.

기계 소리가 길게 늘어지며 결과를 알려왔다. 마력 농도는 여전히 D급 던전 수준이었다.

“아니에요. D급 던전 맞아요.”

“감독관님도 저게 뭔지 몰라요?”

“네. 처음 보네요.”

정선우가 거의 언덕이 되었다 싶은 고블린의 시체를 피해, 앞장서서 문을 살폈다.

“안에 보물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고블린의 키는 일반 남성의 허리까지 오는 게 보통이었다. 방금 순식간에 토벌한 취락도 사람이 산다고 하기엔 굉장히 조잡하고, 모든 게 작았다.

“문이 너무 큰데?”

하지만 두 사람이 찾아낸 문은 일반 사람 기준으로 봤을 때도 무척 컸다. 족히 3m는 되어 보였다. 문에 새겨진 정교한 무늬에 고블린의 피가 튀어 음산해 보였다. 문 앞에는 다른 곳보다 월등히 많은 고블린의 시체가 있었다. 두 사람을 피해 이 문으로 도망치려고 했던 것처럼.

“이 문 그냥 장식 아니야? 손잡이가 없는데?”

“아마 장식일 확률이 높을 거예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라이벌 의식을 불태운 탓인지, C조의 활약은 단연코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던전을 많이 클리어했다.

이제는 D급 던전을 몇 개 클리어했다고, D급 던전의 수준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는 구영이 말했다.

“새로운 장소가 있을 리 없잖아.”

조잡한 취락에 비해 상당히 정교한 무늬. 존재하지 않는 손잡이. 거대한 문.

새로운 장소가 있을 리 없다는 구영의 말에 동의한 정선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에 새겨진 정교한 무늬를 매만졌다.

주언도 세 사람이 있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서자 벽 특유의 냉기에 목을 움츠렸다. 무엇인지 형용할 수는 없는, 마치 손톱 아래에 가시가 찔린 것 같은 불편함에 주언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느낌이 안 좋았다. 마치 다른 던전으로 이어진 것 같은….

오싹.

이 생각이 들자마자 주언이 반사적으로 반걸음 뒷걸음질 쳤다.

“거기서 손 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세 사람이 일제히 주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오로지 주언만이 모든 순간을 놓치지 않고 봤다.

덜컹.

끼이이익.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둔중한 문은 오랫동안 닫혀 있었다는 듯 문이 열릴 때마다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던전 전체가 진동하고 있었다.

드드득. 문이 반쯤 열렸을 때, 아직 전원을 끄지 않았던 휴대 마력 측정기에서 미친 듯이 소리가 났다.

띠띠띠띠띠띠- 띠이이이이—

“어?”

정선우가 다급하게 마력 측정 기계를 확인했다. 마력 측정 기계가 한계치를 벗어나 시침이 널을 뛰기 시작했다. 정선우가 기계를 껐다 다시 켜보았으나 한 번 고장 난 기계는 재측정이 불가능했다.

“왜요?”

“이게 왜 이러지?”

“뭔데 그래요?!”

문이 반쯤 열리자 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이가 떨릴 정도로 시린 바람이었다.

휘이이잉.

거센 바람에 네 사람의 몸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에, 소리치듯 목소리를 내야 겨우 서로의 말이 들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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