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눈?’
눈을 뜰 수조차 없어 눈을 감은 채 양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주언의 뺨에 눈이 내려앉았다, 녹아내렸다.
쿠웅.
얼마나 버텼을까. 곧 문이 완전히 열렸는지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바람이 뚝 멈췄다. 각자 버티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뭐야…?”
모두 황망한 표정으로 문 너머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네 사람은 잠시 말을 잃었다. 흰 설산이었다. 예상치 못한 압도적인 풍경에 다들 얼이 빠져 움직이지 못했다.
띠. 띠….
힘없는 기계 소리에 모두 정선우를 바라보았다. 그가 질린 안색으로 화면을 틀어 세 사람에게 공유했다. 시침이 의미 없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B급까지 측정 가능한 기계인데… 고장 났어요.”
“네?”
“아니… 이게 뭐예요? 던전 안인데… 갑자기 바깥인데… 겨울이고… 우리가 들어왔던 곳도 아니잖아요.”
가장 패닉에 빠진 건 구영이었다. 구영의 상태가 안 좋다는 걸 알지만, 다른 사람들도 위로해줄 수 없는 상태였다.
딱!
“아.”
“그러게 문은 왜 건드려?”
“나만 건드렸냐?”
“네가 처음 만져서 그런 거 아니야?”
“뭔 개소리야.”
“그래도 개소리에 진정 됐지?”
진수희가 씩 웃으며 묻자 구영이 멈칫했다. 그녀도 덜덜 떨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에 입술이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
“아, 씨.”
“이게 바로 등급의 차이야.”
“…고맙다.”
“순순히 사과하니까 짜증 나네.”
흔히 있는 일도 아니었고, 정선우가 세 사람의 감독관을 할 정도로 경험이 많다고 해도 공격 2팀에 들어온 지 고작 2년밖에 안 되었다. 팀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거의 말단 직원에 속하는 입장이었다.
“지금 긴급 버튼 눌렀으니까 구조팀이 곧 올 거예요.”
“얼마나 걸려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낭패 어린 기색으로 정선우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중 던전이에요.”
가만히 있던 주언이 툭 말을 내뱉었다.
“네?”
일제히 시선이 쏠리자 주언이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갑자기 던전에 관한 정보가 마구 떠오르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으나, 이 상황에 그나마 제일 잘 아는 건 자신이니 일단 말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던전 안에 있는 던전이에요.”
“…던전이라고요?”
눈앞에 보이는 건 광활한 대자연인데, 이게 던전이라니.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던전 등급이 높을수록, 보스 몬스터 등급이 높을수록 영역에 대한 권한이 더 커져요.”
주언이 부연 설명을 덧붙이자 양팔을 껴안고 온기를 잃지 않기 위해 계속 제자리걸음하고 있던 진수희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우리 X 됐다는 소리 아니야?”
“야. 무슨 말을…!”
“맞아요. 일단 희망을 잃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해 봐야죠.”
“지금 이중 던전 열렸고, 지금까지 얘기한 거 종합해보면 새 던전은 A급 이상이라는 소리잖아요.”
“…….”
“…….”
아마 이 말까지 하면 세 사람은 더 낙심하겠지만, 일단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아마 우리가 들어온 입구는 막혔을 거고, 밖에서 새로운 던전 입구를 찾아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돼요.”
“여기서 기다려요.”
정선우의 말에 주언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 몬스터들이 몰릴 확률도 있어서, 나가서 안전한 곳을 찾는 게 나아요.”
주언이 이마를 쓸었다. 도망치는 동선은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겠는데, 문제는 추위였다.
“일단 취락에서 위에 걸칠 수 있는 것부터 찾아봐요.”
주언의 말에 모두가 취락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지시를 내리는 게 주언이 됐지만, 그 누구도 이의 제기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나온 건 수희와 주언이었다. 두 사람은 구석까지 살핀 후 쓸 만한 물건을 가지고 나왔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살 수도 있겠네요. 여기 A급 두 명이나 있으니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는지, 진수희가 비꼬며 말했다. 정선우만이 수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분명 들었거든요. 저 2차로 등급 측정하러 갔던 날에. A급 나왔다고. 그런데 우리 세 명만 같은 곳에서 왔는데 A급이 없다고 말하니까….”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는 일이었기에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다. 안에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서 그녀가 C급이라는 걸 알게 된 주제에, 자신의 정확한 등급은 완전한 비밀로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걸 어떻게….”
구영이 흘끗 주언을 바라보았다. 진수희는 이것으로 대답이 됐다는 듯 주언을 향해 따져 물었다.
“맞다는 소리네. 부정 등록 아니에요?”
“지금 그게 중요해? 너 알고 처음부터 그렇게 띠껍게 굴었냐?”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숨기면 안 되죠. 목숨이 걸린 일인데.”
“…….”
“본인 목숨만 부지하면 다인 건 아니죠?”
진수희의 뾰족한 말에 주언이 드물게 당황했다. 이런 순간에 갑자기 누가 자신이 나름 숨기고 있던 비밀을 폭로할 줄이야.
“…아니, 그게 아니라.”
가만히 들으며 상황 파악 하고 있던 정선우가 인상을 굳혔다.
“숨긴 거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하죠. A급 가이드가 있으면 생존에 더 유리하긴 하겠네요.”
주언을 중심으로 단합하려던 사람들 사이에 균열이 갔다. 구영이 눈치를 살폈다. 사느냐 죽느냐로 치열하게 고민해도 모자랄 판이다.
“너보다 높은 등급 나와서 이목 뺏긴 게 그렇게 억울했냐? 이런 때에 뭉쳐도 모자랄 판에…!”
“네가 왜 날뛰어. 너한테 안 물어봤어.”
수희의 말에 구영이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주언의 개인 사정이라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주언은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나중에 주언이 자신에게 욕을 하더라도 여기서는 이유를 밝히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섰다. 구영은 살고 싶었다.
“형은 숨긴 게 아니라 지병이 있어서 등급 낮춘 거거든? 뭘 알고나 말하든가.”
“…뭐?”
“아.”
정선우는 드물지만 그런 경우가 있다는 걸 상기해내곤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예민한 문제이니 그럴 수 있죠.”
“…….”
“부정 등록한 건 아니야. 네가 오해할 수도 있었겠다.”
“…….”
수희가 입술을 달싹였을 때, 정선우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사과했다.
“옷도 옷이지만, 거처를 구하면 그래도 오래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제가 화염 계통 능력자라서요.”
그러곤 자신의 능력을 말함으로써 지금 생존에 자신도 진심임을 은근슬쩍 어필해왔다.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천만다행이었다. 일단 지붕이 있는 곳만 찾으면, 한동안은 괜찮을 거라는 계산이 섰다.
“그럼 일단 나가요.”
저 멀리서 우우-! 하는 짐승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정말 이곳에서 나가야 할 때였다. 세 사람이 분주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네 사람이 찾은 건 고블린이 걸치고 있던 옷 중, 줄을 꼰 망토 같은 옷이었다.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은 게 아쉽지만 없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주언이 앞서 나가고, 남은 두 사람이 뒤따라갔다.
“야. 안 와?”
구영이 뒤를 돌아보며 까칠한 목소리로 굳은 듯 서 있는 수희를 불렀다. 수희가 그제야 발걸음을 재촉해 세 사람을 뒤쫓았다.
“갈 거거든?”
진수희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두 사람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지만, 주언은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고, 전에 들었던 게 있으면 충분히 오해할 만했다. 경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상황이 이렇게 만들었을 뿐. 그래서 어린애한테 사과하라고 닦달하고 싶지 않았다.
“아까 고맙다. 빠르게 수습해서 다행이야.”
주언은 구영에게 작게 고맙다고 속삭인 후, 문 너머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
여명훤은 오랜만에 이른 아침부터 공격 1팀 사무실로 출근했다. 직원이 많아졌다고 한들, 가장 상위층에 있는 공격 1팀의 일은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았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강노훈이 건네는 일상 인사에 반사적으로 대답한 명훤은 자리에 앉았다.
세상은 여전히 흑백이었다. 주언이 떠난 이후 명훤은 한 번도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다. 조금만 깊게 잠들어도 꿈에서 자신을 원망하는 주언이 나왔다.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그날이 우리의 마지막인 걸 알았더라면, 네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조금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이제는 알 수 없는 주언의 마음을 감히 짐작해볼 때마다 잠을 잘 수 없었다.
조금씩 사라지는 주언의 자취를 볼 때마다 괴롭고, 그럼에도 여전히 이 아파트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명훤은 그 아파트 안에서 천천히 시들어갔다.
‘강윤재.’
여명훤의 육감은 시종일관 강윤재를 향해 적색 신호를 켰다. 몇 년 전부터 그의 뒤를 파고 있지만, 전문가를 동원해도 주거지를 쉽게 알아낼 수 없었다.
강윤재가 특별히 남들에게 드러나는 걸 꺼려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전문가까지 동원했는데 그의 종적을 자세히 알 수 없는 건 분명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자존심 강한 강윤재가 여지웅 밑에 들어간 이유를 알아야 했다.
“커피 먹을래요?”
이호윤이 불쑥 끼어들어 명훤에게 김이 나는 뜨거운 머그잔을 건넸다.
“됐습니다.”
명훤은 이호윤이 무안할 정도로 단호하게 거절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자리지만, 만약 그대로 앉아 있으면 이호윤은 한참 서성이다 떠날 게 눈에 보였다.
피로는 괴물처럼 명훤의 어깨에 앉아 기생했다.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거대해지는 피로에 명훤이 눈가를 꾹꾹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