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50화 (50/112)

#50

정선우의 능력으로 눈을 녹여 피를 대충 닦아내고, 동굴 안에 불을 피웠다.

‘이 비싼 걸 모닥불로 쓰다니.’

네 사람이 옹기종이 모여 있는 중간에는 돌이 있었다.

“돌 신기하다.”

“아이템이에요.”

아이템에 붙은 불은 일정한 크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능력을 흡수해 몇 시간 유지할 수 있어 공격 2팀에 배정받고 큰마음 먹고 산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곧 정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걸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아까 아이스 베어를 처치할 때 도움받아 놓고 자신이 가진 걸 내놓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제 어떡하지?”

“여기서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주언의 침착한 발언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구영과 수희는 안심됐는지 무릎을 껴안은 채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감독관님도 쉬셔도 돼요.”

“주원 씨가 쉬세요.”

“교대로 쉬어요. 저는 지금 잠이 안 와서요.”

숨을 쉴 때마다 옆구리가 아파서 잠을 자긴 그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체력을 비축하는 편이 나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정선우는 불을 바라보며 한참의 고민 끝에 입을 달싹였다.

“주언 씨. 대체….”

정선우는 주언이 아이스 베어를 처치하는 모습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정선우는 선배들한테 수없이 들었다. 재능의 영역은 분명 있지만, 경험에서 나오는 전투 센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지금 그 말이 뇌격처럼 정선우를 꿰뚫었다.

“네?”

“훈련생이 아닌 거 같은데 왜 다시 훈련을 받으세요?”

“감독관님이 아시다시피 훈련 기록이 없어요, 저.”

“…말하기 싫으시다면 됐습니다.”

굳이 구구절절 기억 상실이고, 진짜 이름은 사망 신고가 되어 있다고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절대 훈련생이 보일 법한 행동이 아니었다. 주언의 몸놀림이 전투에 특화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철저히 생존만을 위해 벼려진 행동이었다.

그건 전투에 천재적인 감각이 있어서 나타나는 행동이 아니었다. 만약 싸움에 특화되기만 했더라면 처음 보는 몬스터에 대한 무지함에 과감한 행동은 힘들었을 터였다.

‘수백 번, 수천 번 전투 경험이 있어야지만 보일 수 있는 과감함이었어.’

그 순간을 다시 생각하며 정선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공격 2팀에서도 연차가 높은 에스퍼들과 함께 던전을 돌았을 때나 봤던 모습이었다.

아마 능력을 제외하고 오래 훈련을 받았던 사람일 것이다. 정선우는 주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휘이잉.

밖에서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바람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언은 그냥 넘어가겠다는 듯한 정선우의 태도에 쓴 웃음을 삼켰다. 정선우의 질문의 답이 정말 궁금한 건 자신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각자 쉬는 시간에 먹으려고 챙겨왔던 과자나 초콜릿을 모두 균등하게 나누었다. 곰 고기는 양념할 게 없어서 잡내가 조금 났지만, 생존을 위해 조금씩 먹어두었다. 식수는 눈을 녹여서 마셨다.

불을 물끄러미 보던 구영이 중얼거렸다. 어느덧 동굴 안은 옷을 껴입지 않아도 될 만큼 공기가 따뜻해져 있었다.

“언제쯤 올까요?”

“체감상으로는 20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요.”

“아직 몇 시간 안 지났을 거예요.”

“무슨 조난 영화 같다.”

“머리가 낭만적이라 좋겠다.”

“울어봤자 해결되는 게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

티격태격 소리를 듣는데 이상하게 안심됐다. 주언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으려고 할 때였다.

그릉.

그르릉.

거센 바람 사이로 짐승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멀지 않은 곳에서 난 소리였다. 모두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몸을 경직시켰다.

쿵.

쿵.

둔중한 발소리가 서서히 더 가까워졌다. 아까의 평화는 모두 착각이라는 듯,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그대로 지나가라.’

주언이 눈을 질끈 감으며 간절히 바랐다. 아까 같은 경우는 운이 크게 작용했다. 이렇게 다친 몸으로 몬스터를 만나면 더 이상의 행운은 바라지 못할 것이다.

옆구리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덜 아플 줄 알았는데 반대였다. 상처를 살피면 주변에서 눈치챌까 봐 손으로 상처를 더듬어 보기만 한 게 문제였던 걸까.

쿠웅.

메아리치는 발걸음 소리에 주언이 인상을 구겼다.

“동굴 안에 들어왔나 봐요.”

구영이 속삭이듯 말했다.

“아까 분명 개별 행동 하는 몬스터라고 말했잖아요.”

진수희가 덜덜 떨며 마지막 희망의 끈을 잡아 보았으나, 주언이 착잡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짝짓기 시기였나 봐요. 그때는 두 마리가 같이 움직이거든요.”

“…제가 선두로 나가죠.”

정선우의 얼굴에는 긴장이 역력했다. 눈이 내리지 않는 동굴 안에서는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주언이 앞서 나가려는 정선우의 팔뚝을 잡았다.

“여기서 섣불리 능력 썼다가 동굴 무너지면, 몬스터를 쓰러트려도 이도 저도 안 돼요.”

크와아아아!

“그럼 어떡해요? 이번에도 주원 씨한테만 맡기란 소리예요?”

“그건, 읏.”

금방 멎을 거라고 믿었던 피는 쉴 새 없이 새어 나왔다. 앉아 있을 때는 어떻게 숨길 수 있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숨길 수 없었다. 핏방울이 기어코 바닥에 떨어졌다.

“다쳤어요?”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바로 옆에 있던 진수희였다. 진수희가 몬스터를 봤던 때보다 놀란 얼굴로 주언을 바라보았다.

“이거 몬스터 피가 아니고… 형 피야?”

“괜찮아. 견딜 만해.”

“아니 이게 어떻게 견딜 만해!”

쿵쿵쿵쿵쿵.

크와아아!

대답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입구에서 어슬렁거리던 몬스터가 불시에 안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감에 주언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아까 죽였던 아이스 베어의 피가 굳어 붉어진 창끝을 몬스터에게 겨누었다.

휘이이익!

거대한 근육질의 팔이 허공을 휘저었다. 막아내기 위해 창을 휘두르려는 것도 잠시, 옆구리에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읏.”

‘끝이다.’

아주 찰나의 순간으로 목숨이 판가름 나는 법이다.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주언이 그대로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람을 가르는 위협적인 주먹이 주언에게 닿기 직전이었다.

“비켜요!”

순식간에 코앞에 다가온 몬스터를 막아선 건 진수희였다. 수희는 주언을 재빨리 어깨로 밀쳐내고, 주언이 있던 자리에 섰다.

카캉!

기다란 검이 거대한 발톱을 잠깐이지만 막아냈다. 그녀가 온 힘을 다해 소리 질렀다.

“다들 일단 나가-!”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아이스 베어의 힘에 진수희가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수희가 배를 움켜쥐었다. 진수희가 숨을 버겁게 쉬다가 기침을 하자, 타액과 함께 피가 섞여 나왔다.

“진수희!”

구영이 비명을 질렀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몬스터가 진수희 쪽으로 다가갔다. 몬스터는 세 사람을 등지고, 수희를 먼저 처치하겠다는 듯 그녀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수희 씨!”

정선우가 움직였다. 화력이 허공에 피어올라, 아이스 베어의 머리 부근을 공격했다. 방금 주언의 공격을 보고 머리를 공격한 건 좋았다.

쿠와악!

아이스 베어의 위에 옮겨붙었던 불이, 팔짓 한 번에 사그라들었다.

“젠장.”

아쉽게도 아이스 베어의 털만 살짝 탔을 뿐 효과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아이스 베어를 아주 잠깐 멈춰 세우는 정도가 다였다.

짙은 무력감에 정선우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두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는데 이제는 무리였다.

‘여기서 모두 죽는다.’

도망쳐도 이곳은 던전 안이었다. 비굴하게 도망친다 한들 언제든지 다른, 더 강한 몬스터를 만날 수 있었다.

“고개 숙여.”

공포는 조금도 묻어 나오지 않는 고저 없는 평이한 어조였다. 낯선 목소리가 입구에서 들렸다. 낯선 목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주언이었다.

“숙여요!”

상황 파악 못 하던 두 사람은 주언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이었다.

타앙-!

총소리가 들렸다. 비명을 지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은 아이스 베어가 곧 둔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압도적인 강함이었다. 네 명이 달라붙어도 이기지 못하던 몬스터였다. 하지만 낯선 상대는 마치 시시한 장난감 다루듯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 아이스 베어를 제압했다.

“…허억….”

짙은 화약 냄새가 폐 깊숙이 스몄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냄새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살았다….”

송구영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잡으며,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았다.

주언은 아이스 베어의 머리 중앙을 완벽하게 꿰뚫은 총흔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완전히 관통한 것 같은데 총알은 남아있지 않았다.

“읏….”

입구에서 공격을 했었는지 발소리가 멀리서부터 서서히 가까워졌다.

터벅.

“지원이 온 듯합니다.”

정선우도 감독관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기 위해 참고 있었지만, 감격에 젖은 눈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는 공격으로 인하여 이미 지원군이 누구인지 알아차린 듯 보였다.

터벅터벅 동굴 안쪽으로 걸어들어오던 걸음이 멈췄다. 곧 뒤이어 짐승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우!

늑대 울음소리였다. 일제히 주언이 설명했던 아이스 울프의 특성을 떠올리곤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단체 생활을 하는 A급 몬스터.

마치 자신의 숫자를 과시하려고 하듯, 여러 아이스 울프가 동시에 하울링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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