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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51화 (51/112)

#51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 진짜….”

구영은 안심하면 계속 몬스터가 나타나니 안심하면 안 되겠다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숨 돌릴 틈을 조금도 안 주는구나 싶었다.

인간이 이런 곳을 클리어할 수 있다고?

말도 안 됐다. 이곳은 완전한 몬스터의 영역이었다. 지형도, 숫자도 모두 몬스터에게 유리한 곳.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에스퍼로 발현 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능력을 쓸 수 있게 돼서 대단한 사람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했었다. 하지만 A급 던전에 온 후에 그런 생각은 완전히 박살 났다.

“10분 있다가 나와요.”

압도적인 던전에 패배감에 짓눌린 사람들과 다르게 지원군의 목소리는 전혀 놀랍지도, 무섭지도 않다는 듯 평온했다.

“그 정도면 될 것 같으니까.”

“다른 지원군은 있습니까?”

“혼자 오는 게 효율이 제일 좋아서.”

남자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홀로 다시 동굴 밖으로 걸어나갔다.

“지원을…!”

“괜찮습니다. 금방 끝나요.”

정선우가 용기 내어 말했으나, 빠르게 거절당했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곧 완전히 사라졌다.

콰콰콰콰콰쾅.

끼에에엑!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와 폭발이 터지는 소리가 한데 섞였다. 구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A급 던전은… 진짜…. 하….”

그렇게 구영과 정선우가 온 신경을 바깥에 쏟은 사이 주언이 몸을 일으켰다.

“…수희 씨….”

주언은 몸을 일으켜, 몬스터 너머에 있을 수희 쪽으로 다가갔다. 자신을 구하고 위기에 빠졌던 수희가 괜찮은지 확인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뛰어가고 싶었지만, 상처가 욱신거려 이 속도가 최선이었다.

수희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미동 없는 모습에 주언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코 아래에 대었다.

새액, 새액.

고른 숨소리가 손가락 끝에 느껴졌다. 가장 최악의 생각을 했던 주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타격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큰 고통 탓인지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주언이 수희의 팔을 제 어깨에 걸치고 일어섰다. 축 늘어져 있는 사람을 온전히 지탱해서 고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형. 내가 할게.”

정신을 빠르게 차린 구영이 주언의 반대편으로 다가가 수희를 부축했다.

“고맙다.”

“형은 다친 거 숨기지 말고 구급함 가져가서 상처나 치료해.”

“나가서 치료할게. 생각보다 심각한 건 아니야.”

주언은 괜찮은 척했지만 벌써 시야가 흐릿했다. 여기서 어설프게 처치하려고 하면 시간만 잡아먹을 뿐이다.

“10분 정도 지난 거 같은데…?”

어느덧 바깥이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모두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지원 온 사람의 압도적인 능력을 봤으나 바깥의 소리를 듣고 짐작해보건대 여러 개체의 몬스터가 있었다.

“일단 나갑시다.”

불안해하는 구영과 달리 선우는 망설임 없이 동굴 밖으로 향했다. 구영도 별다른 수 없다고 생각하곤 선우의 뒤를 따랐다.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여전히 굵은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네 사람을 스쳤다. 바람결을 타고 소름 끼칠 정도로 짙은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혹시 감독관님 아는 분이세요?”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고 제가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상대입니다.”

선우가 동굴에서 빠져나와 눈을 밟았다.

“왜 가만히 서 계세요?”

그러곤 곧 구영도 동굴을 빠져나와 멈춰 선 선우의 옆에 섰다.

“여명훤. 능력자라면 이 이름을 모르진 않겠죠.”

선우가 경탄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쿵.

밖에서 들린 소린 줄 알았는데, 주언의 속에서 들린 소리였다. 선우의 입에서 들린 소리에 심장이 가라앉았다.

바람이 다시 한번 세차게 흘렀다. 멀지 않은 곳에서,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모든 것이 흰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흰색과 대비되는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를 경계로 반대편 부분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방대한 양의 피가 눈과 섞여내려 피의 강이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자신이 만들어낸 참극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구영이 질린 얼굴로 쓰러져 있는 몬스터를 눈대중으로 확인해 보았다. 대충만 봐도 족히 100마리는 넘어 보이는 몬스터들이 쓰러져 있었다. 개중에는 덩치가 다른 아이스 울프보다 족히 10배는 큰 거대한 개체도 있었다.

“저거 던전 보스 아니에요?”

“그런 것 같아요.”

“사람 한 명이 이런… 일을….”

걸어 다니는 재앙이 아닌가. D급과 C급의 차이보다 A급과 S급 차이가 더 크다고 했다. S급 이상의 등급이 없으니까.

여명훤은 S급 중에서도 특출나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주언의 과감한 판단을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여명훤은 감히 발끝에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경외감이 들었다.

주언은 아까부터 그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상처가 덧나서 그런 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감각이 비명을 지르며 한 명에게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오롯한 시선을 느꼈는지 여명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술에 취했던 때와 다르게 건조한 표정을 띤 단정한 얼굴은 금욕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세상에 단둘이 덩그러니 남겨진 듯한 감각. 시선이 허공에 맞닿았다.

“…다시 만났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완벽한 여명훤의 얼굴에 균열이 인다. 그 모습에 묘한 감동을 느꼈다. 술에 취했어도, 사람을 착각했어도, 그저 하룻밤 스쳐 지나간 사람일 뿐인 자신을 잊지 않았다.

“…너.”

여명훤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 갈라진 목소리 사이로 물기가 차올랐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제가 먼저 여기에 있었어요.”

이번에는 그쪽이 저를 찾아온 건데.

주언이 흐릿하게 웃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굴었으면서.’

이곳에 있는 사람 중 오직 주언만이 저 남자가 밤에 얼마나 달콤한지 알고 있었다.

“너 다쳤어?”

그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전류가 일었다. 열어서는 안 되는 부분을 억지로 들쑤시고 헤집는 기분.

명훤이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왔다.

“생각보다 심한 건 아니라….”

주언은 태연한 척하려고 했으나, 문장은 채 끝맺어지지 못했다. 발가락 끝으로 모든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감각과 함께 주언은 정신을 놓았다.

이제 한계였다. 이미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저 멀리서 그가 손을 뻗어왔다. 그의 손을 마주 잡으려고 했으나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털썩.

그의 당황한 표정이 주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깊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서서히 떠오르던 의식이 강제로 끌어 올려졌다. 주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이 무거웠다.

“흐어어어엉.”

다시 눈을 감고 싶었지만 자신의 의식을 끌어 올린 울음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주언은 눈알을 도로록 굴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 위해 애썼다.

“야. 그만 울어. 초상난 줄 알겠다.”

“친하다면서 매정하다. 진짜.”

구영의 신경질적인 타박에 수희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친한 걸로 울고 안 울고를 따지면 넌 왜 세상 떠나갈 것처럼 우는데.”

“우리 구하려다가 그런 거니까… 흑… 이대로 안 깨어나면 어쩌지?”

“뭐래. 그냥 네가 우니까 괜히 가만히 있던 사람도 불안해지니까 그렇지. 씨….”

구영의 목소리 끝이 염소처럼 떨렸다.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는데 목에 수분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웃음 대신 기침이 터져 나왔다.

“쿨럭…!”

“형!”

“나… 물 좀….”

주언의 말에 수희가 허둥지둥 물병 뚜껑을 열어 조심스럽게 주언의 입 안에 흘려 넣어 주었다. 정신이 완전히 깨어나니 옆구리 쪽이 당겨왔으나, 쓰러지기 직전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무사히 나왔구나.”

주언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엉엉 울었긴 했지만 진수희도 딱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형. 일주일 만에 눈뜬 거야.”

구영이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을 때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눈가에 눈물이 가득 찬 것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그래?”

주언이 덤덤히 말했다. 주언이 궁금한 건 자신이 며칠 만에 깨어났는지가 아니었다.

“저… 그… 다 괜찮아?”

“감독관님도 아까 오셨었는데 방금 가셨어. 내일 또 오실 거래.”

“어…어.”

주언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한 말이지만 정선우는 잊고 있었다. 주언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금 질문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을 때였다.

“미안해요.”

진수희가 겨우 멈췄던 눈물을 다시 터트리며 주언에게 사과했다. 그녀는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뒷말을 잇지도 못하고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왜 사과를 해?”

주언의 다정한 위로를 건네자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처음부터 말 잘 따랐으면 몬스터랑 안 마주치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건 비약이야. 던전 안에서 몬스터를 안 만나는 건 행운이지. 몬스터를 만난 건 누구의 탓도 아니야.”

위로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진수희가 등급 부정 등록을 하지 않았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면 아이스 베어를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로 더 안 좋은 상황에 다른 몬스터를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괜히 상관없는 일에 혼자 연관 지어 생각해서….”

“무슨 일?”

“저희 오빠가….”

진수희가 히끅거리며 사정 설명을 해주었다. 진수희에게는 에스퍼로 발현한 오빠가 있다고 했다. A급으로 발현되어 공격 2팀에 차출됐고, 운 좋게도 A급 가이드가 배정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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