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이대로 출세 가도를 달릴 거라고 다른 사람들이 안 가는 던전까지 망설임 없이 갔어요.”
하지만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첫 직장이었고, 일에만 신경 써서 주변에서 그를 어떻게 보는지 그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C급 던전에 들어갔는데 던전 측정이 잘못되어서 B급 던전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 정도는 충분히 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중요한 순간에….”
진수희가 울먹거렸으나 시선에 새겨진 짙은 분노가 눈물을 말렸다.
“설마.”
주언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가이드가 등급을 속여서 등록한 걸 거기서 알게 된 거예요.”
주언과는 반대 경우였다. 주언은 A급이 나왔지만, B급으로 등록한 경우였고, 수희의 이야기 속 가이드는 C+급 가이드였지만 A급 가이드로 속이고 공격 2팀에 있었다고 했다.
“부정 등록이라니….”
게다가 등급이 한 단계도 아니고 두 단계 건너뛰었다. 주언이 미간을 좁혔다. 에스퍼가 가이드를 믿고 능력을 썼는데, 가이딩을 해주지 않는 건 살인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저희 오빠만 몰랐던 거예요.”
사고가 생긴 후에야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고해성사 하듯 비밀을 털어놓았다고 했다.
“주변에서는 다 알고 있었어요. 그 사람이 고위직 인사 자식이라 낙하산으로 입사했단 거.”
씨근덕거리는 목소리에는 전혀 해소되지 않은 분노가 날뛰고 있었다. 그 전에 누가 언질이라도 줬으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통속이 되어 속인 사람들도 공모자였다.
“…지금 그럼… 어떻게 되셨어?”
“다시 현장에 갈 수 없어서 은퇴했어요.”
다행히 목숨까지는 잃지 않은 듯했다. 목숨을 건진 게 어딘가 싶었지만, 의욕적인 에스퍼가 젊은 나이에 은퇴하는 건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신고는 안 했어?”
“했는데 보상금만 조금 더 얹어주고 끝이었어요.”
“뭐? 그게 말이 돼?”
“법적으로는 스스로 폭주한 거니까, 도의적 책임은 있되 법적 책임은 물을 수 없대요.”
“…….”
“그래서 경우가 전혀 다르지만 제가 알고 있는 등급이랑 다르게 등록되어 있어서… 죄송합니다.”
진수희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평소라면 옆에서 딴지를 걸었을 구영도 착잡한지 뺨을 쓸며 묵묵히 서 있었다.
“아니야. 사정이 있었잖아.”
주언이 동그란 수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본래 성격은 선했는데, 일련의 일을 겪으며 분노에 찬 상태였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을 테니까. 어쩌면 자신도 같은 일을 겪을까 봐 두려웠던 것일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하고 용서를 구하는 건 어른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큰 사고를 당해서 기억을 잃었어. 지병도 있어서 장기는 대부분 내 장기가 아니고.”
완전한 진실은 말해줄 수 없지만, 그래도 그녀가 이렇게 진심을 터놓고 얘기한 이상 자신의 사정도 말해주고 싶었다.
담담한 말투와 다르게 자신의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이야기에 수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앞으로 잘 지내자.”
“…네.”
구구절절 더 설명할 필요 없었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형은 다 나을 때까지 던전 못 가지.”
“지금 중요한 시기인데 여기서 멈추면 아깝잖아. 나는 뒤에서 빠져 있을게.”
“감독관님이 이건 상부랑 얘기해보고 알려준대.”
구영이 단호하게 대화를 끊어냈다.
“괜히 갔다가 또 다치는 것보다, 평가에 불이익 조금 받는 게 나아.”
“맞아요.”
구영의 말에 수희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두 사람의 맹렬한 기세에 주언이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그런데 있잖아….”
“응?”
“그 우리 구조하러 왔던 사람.”
“…어.”
진수희는 쓰러져 있어서 여명훤이 구하러 온 순간을 보지 못했지만, 구영은 똑똑히 봤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남이 함부로 끼어들 수 없는 공기가 흘렀다. 몬스터를 수백 개체 도륙하고도 무감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인외의 존재가 주언의 앞에서 순식간에 허물어져 한없이 인간적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봐서는 안 될 걸 본 기분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 사람은… 여기 안 왔어?”
“그….”
“아니, 아니다. 괜한 걸 물어봤다.”
구영이 대답하기 전, 주언이 구영의 말허리를 잘라냈다.
구영도 그래서 여명훤과 무슨 사이냐는 질문은 꺼내지도 못했다.
**
잠이 오지 않았다.
표정을 일그러뜨렸던 건 고작 하룻밤 스쳐 보냈던 사람을 만나서 불쾌했기 때문일까? 여명훤이 나타났을 때 거의 한계에 다다랐어서 자신이 좋을 대로 해석했던 건가.
주언이 무릎을 껴안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나 혼자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서른 먹고 첫사랑 하는 사람처럼 혼자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다시 기대하길 반복했다.
‘미련 맞게, 고작 하룻밤 가지고.’
여명훤이 착각했던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럽다는 생각까지 하다가 피식 웃으며, 핸드폰 화면을 켰다. 훈련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로 윤재와 연락을 뜸하게 해서 다행이었다. 윤재도 한동안 많이 바쁠 거라고 했다. 그 말이 진짜였는지 윤재의 연락도 뜸했다.
주언은 윤재에게 다쳤다는 사실을 굳이 알리지 않았다. 굳이 알려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
때마침 어제저녁, 며칠 만에 윤재가 톡을 보냈다. 이 정도면 적당히 바빴다는 핑계를 대고 얼버무릴 수 있겠다 싶었다.
-벌써 연락 안 한 지 거의 일주일 됐네. 훈련은 어때? 잘 지내지? 시간 되면 중간에 한 번 보고 싶은데 그건 많이 어려울까?
이쪽도 연락 안 한 건 마찬가지였는데. 이제야 진수희와 겨우 관계가 괜찮아지는데, 본사에서 유명한 윤재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여 괜한 오해를 사는 건 사양이었다.
-미안. 어제 늦게까지 훈련하느라고. 훈련 끝날 때까지는, 훈련에만 집중하고 싶어.
톡을 보낸 후 주언은 답장을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핸드폰 화면을 끄고, 베개 아래 넣었다.
드르륵.
예기치 못한 순간 문이 노크 없이 열렸다. 이 밤중에 올 만한 사람은 윤재밖에 없었다. 주언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어?”
주언이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주언아.”
명훤이 새벽의 적막을 가르고 주언을 찾아왔다. 새벽 공기 사이로 떨려 나오는 이름이 너무도 애달파서 말문이 막혔다. 명훤은 주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주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주언을 있는 힘껏 껴안았다. 몸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뜨거운 살갗과 빠르게 맥박치는 심장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이것… 좀 놓고….”
주언이 당황해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려 했으나, 그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너무 오래 기다렸어.”
지친 목소리가 젖은 휴지처럼 가슴 위에 달라붙었다.
“오래 기다리다니….”
“그날은 왜 그냥 갔어? 생각해 보니까 다시 내가 미워서?”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 버리지 마.”
명훤의 애원에 주언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신만 여명훤을 기억할 거라고 땅을 파고 있었는데, 그는 훨씬 전부터 자신을 알고 있다는 듯이 굴었다.
그의 체취는 느껴져도 술 냄새는 조금도 맡을 수 없었다. 그는 제정신이었다.
‘헷갈린 게 아니었다고?’
윤재가 1지구에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이토록 애절해하는데, 윤재가 자신에게 이것조차 거짓말한 거라고? 이건 자신을 걱정해서 숨긴다는 변명조차 통하지 않는 일이다.
“버린다니… 그게 무슨….”
“다신 안 놓을게.”
주언은 마지막으로 윤재를 믿어보기로 했다. 자신의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보았던 윤재도 분명 진짜였을 테니까.
‘비겁한 새끼.’
어쩌면 죄책감일지도 몰랐다. 눈앞의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버린 것에 대한 속죄. 그의 절절한 말에 목에 메었으나 주언은 목을 가다듬었다.
“…겨우 하룻밤 보낸 사람치고는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그렇다면 지금의 우주언이 여명훤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뭐?”
침묵할 때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옭아맸던 팔이 풀어졌다.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언을 마주 보았다.
“나 알아요?”
“장난치는 거야?”
명훤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지금 이런 장난까지 받아줄 여유는 없다고 중얼거렸다. 거친 호흡이 몇 번 내뱉어졌다.
“장난 아니에요. 그리고 저 애인도 있어요.”
“…뭐?”
나지막이 불리는 이름은 자신의 이름이었다. 우주언. 명훤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입을 틀어막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 버리는 것도 못한다는 뜻… 앗.”
그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주언의 허리께에 얼굴을 묻었다. 차마 그것조차는 밀어낼 수 없어서, 주언은 어정쩡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사이 아니라고 말하지 마.”
주언의 그의 머리에 손을 대려다가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거뒀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매분 매초 생각했던 얼굴이었고, 거의 10년 넘게 붙어 지냈던 얼굴을 착각할 리 없었다.
명훤은 자신의 애원에도 아무 말 하지 못하는 주언을 바라보았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 안쓰러웠다. 명훤은 주언의 턱을 들어 올렸다.
“장난 하나도 안 웃겨.”
눈을 아래로 내리깐 주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저도 장난하는 거 아니에요.”
명훤은 자신에게 누구냐고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물어보는 주언을 바라보았다.
“주언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