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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53화 (53/112)

#53

스스로가 울기 직전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지 억지로 태연한 척하는 모습이 처연해 보였다.

“주언아….”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명훤이 주언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갰다. 마치 허락을 구하듯, 그는 아주 천천히 주언에게 다가갔다. 밀어내려면 충분히 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주언은 밀어내지 않았다. 명훤이 아랫입술을 훑었다. 굳게 닫힌 아랫입술에서 짠맛이 났다.

“…읏.”

아랫입술을 깨물며 뺨을 쓸자, 입에 미세한 틈새가 생겼다. 명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틈을 파고들었다.

한참 후에 주언이 아주 미약하게 명훤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명훤은 억지로 할 생각이 없다는 듯 곧장 물러섰다. 두 사람의 입술 사이에 투명한 실이 길게 이어졌다. 명훤이 이마를 맞댄 채 주언의 입술을 훑으며 물었다.

“왜 안 피해?”

“…갑자기 했잖아요.”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주언의 목소리에 열기가 가득했다. 주언이 힘없는 변명을 하며 엉덩이를 뒤로 뺏다. 명훤은 주언의 허벅지를 노골적인 의미를 두고 지분거렸다.

“흐으….”

옷을 입고 있는데 그의 손가락이 살갗 아래를 만지는 듯한 기분에 주언이 목을 움츠렸다. 명훤이 그의 귓불을 아프지 않게 살짝 깨문 후 속삭였다.

“이상하지.”

“…….”

“몸은 확실히 날 기억하고 있는 것 같은데.”

명훤의 노골적인 말에 주언이 스프링 달린 인형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달빛 아래에서도 식별 가능할 정도로 목 뒤까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여기 병원이거든요?”

“난 뭐 더 할 생각 없었는데.”

주언이 명훤의 숨결이 닿았던 귀를 틀어막았다. 명훤의 뻔뻔한 대답에 주언이 헛숨을 들이켰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래요?”

“뭐를.”

“이렇게… 막….”

느끼는 곳도 한 번에 알아내고, 아는 척하면서 사람 홀리고.

주언이 입을 뻐끔거렸다. 무슨 말을 해봤자 방금 느꼈다는 설명밖에 되지 않아 더 빨개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우리가 정말 한 번밖에 안 만났다고 생각해?”

용서해줄 마음이 없어서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상관없었다.

“…아니에요?”

주언이 무구한 시선으로 묻는다. 명훤은 주언이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걸까 가늠해 보았다.

“네가 원한다면 그런 걸로 해.”

명훤의 대답이 정답이었는지 주언이 노골적으로 안도했다. 왜 주언은 기억이 없는 걸까. 주언이 자신을 버리려고 모른 척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자 완전히 시궁창에 처박혔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태연한 척했지만, 손을 너무 세게 주먹 쥐어 손이 희게 질렸다. 명훤은 앞서 나가지 않도록, 그래서 주언이 도망치지 않도록 여유 있는 척 웃었다.

다시 만난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우리가 다시 이어질 인연이 아니었다면, 정말 다른 사람이 주언과 이어질 운명이었더라면. 자신은 감히 주언의 운명을 박살 내서라도 어떻게든 다시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은 괜찮다.

우리의 모든 건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

이른 아침부터 빈 회의실에 불려 나온 구영과 수희는 입술이 바싹 말라 괜히 앞에 놓인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본사에서 훈련소 있는 쪽 외에 가본 적 없던 두 사람에게는 본사의 중심부에 온 것만으로도 기가 질린다고 생각했다.

“감독관님이 저희 부르셨다고… 어?”

그리고 사무실에 들어선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있는 여명훤을 발견하고 그나마 유지하고 일던 일말의 이성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여명훤과 함께 있던 정선우가 두 사람을 열렬히 반겼다. 정선우는 인사를 나눈 뒤 곧장 본론을 말했다.

“이번에 이례적으로 감독관 교체를 하게 되어서요.”

“네?”

그런 얘기를 왜 여명훤을 데리고 하는 거지 싶었다.

“그런데 아주 감사하게도 여명훤 에스퍼님께서 제 역할을 대신 해주신다고… 해주셔서요.”

“네?”

아까부터 계속 되묻는 것만 했지만, 구영과 수희는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위험 부담이 대폭 줄어들 겁니다. 예외 상황이 발생해도 당연하겠지만 훨씬 더 안전할 거고요.”

정선우가 웃으며 말했지만, 그의 미소도 다소 경직되어 있었다. 곧 회의실 안이 정적으로 가득 찼다.

두 명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눈을 도로록 굴렸다. 구영이 그래도 수희보다 연장자라고, 그냥 넘길 수 없다고 여겼는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 저희는 정선우 감독관님으로도 좋은데요.”

“여러분을 위험에 빠트린 걸 통감해서 물러나게 됐습니다.”

“애초에 실수가 아니었지 않나요?”

이례적인 일을 겪어서 더 등급이 높은 에스퍼로 감독관이 교체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계속 한쪽으로 곁눈질하느라 눈이 아려왔다.

“그래서 뭐가 문제입니까.”

‘특별 취급을 받는데 분명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서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분명 대단한 에스퍼이고, 개인적으로 팬이긴 하지만. S급이 자리에도 맞지 않는 감독관을 한다고 하는데 마냥 좋아할 수 없지 않나.

“아니 많이 공사다망하실 것 같아서요….”

“제 일정은 여러분이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여명훤은 턱을 괴고 무심하게 말했다. 갑자기 햄스터 교육하는데 독수리가 온 꼴 아닌가.

“…….”

“…….”

“불만 있으면 말해봐요.”

정중한 말이었으나 어조는 고압적이기 그지없었다. 여명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무거운 공기에 폐가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같은 에스퍼라서 그가 얼마나 더 대단한지 가까이 가니 피부로 느껴졌다.

‘갑자기 S급이, 그것도 여명훤이 감독관을 한다니.’

수희는 구영과 주언이 나눈 대화와 자신이 쓰러졌을 때 왔던 구조원이 여명훤이라는 걸 떠올리며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도합해 보았을 때, 지금 이 순간이 주언 때문에 일어난 상황이라는 걸 눈치챘다.

“저기 많이 바쁘실 텐데… 저희가 시간을 빼앗을 수는….”

“그리고 특혜 논란 같은 게 있을 수도 있고. 물론 저희는 괜찮지만…!”

구영과 수희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저도 괜찮으니 피차 괜찮단 뜻 아닌가요?”

정선우가 시선으로 빌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그 어떤 대답도 섣불리 할 수 없었다.

명훤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여기서 더 따져 물을 간 큰 사람은 없어 모두 명훤의 말에 동의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 주원 형 의견도 들어봐야 될 것 같은데요.”

구영이 겨우 떠듬거리며 대답하자, 명훤의 시선이 돌변했다. 뭘 잘못 말했나?

“형?”

“…네?”

구영이 시간을 끌기 위해 말했다. 이번에도 금방 대화를 끊어낼 줄 알았는데 여명훤이 불쑥 되물어 왔다.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어버버 하는 사이 여명훤이 재차 물었다.

“주원 형?”

“네? 네.”

“많이 친한가 봐요?”

“네?”

“그 우주원 씨랑.”

구영이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 일종의 생존 본능처럼 강하게 들었다.

“같이… 알바를 했어서요.”

“알바?”

“네.”

“같은 쪽에 살았어요?”

“네.”

“어디요?”

“2지구 쪽이요.”

“2지구 어디?”

“북부요. 동두천 쪽….”

갑자기 집요해진 명훤의 질문에 얼떨결에 모두 대답했다. 걱정은 뒤늦게 따라왔다.

‘주원 형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많지?’

이제와 생각해보니 약속 시간에 한 번도 늦어본 적 없는 주언이 오늘따라 늦는 것도 이상했다.

벌컥.

주언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다가, 대치한 네 사람을 보곤 멈칫했다. 혹시 시간이라도 착각했나 싶어 서둘러 벽에 있는 시계를 확인했는데 자신이 생각한 시간이 맞았다.

“어? 시간에 맞게 온 거 같은데… 다들 일찍 도착하셨네요?”

주언은 항상 약속된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는데, 이미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게다가 이미 대화를 시작한 듯한 분위기였다.

“다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얘기하고 있었어요.”

명훤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주언을 반겼다.

‘사람이 한순간에 확 바뀌네.’

‘대체 무슨 관계지?’

‘…주원 씨만 30분 늦게 알려주라고 하셨던 이유가….’

처음 보는 표정에 세 사람이 경악하든 말든 명훤은 오롯이 주언만을 응시했다.

“왜 여기에… 계세요?”

한동안 다시 안 볼 줄 알았는데, 겨우 며칠 만에 다시 보다니. 처음 훈련소에 들어갔을 때는 보고 싶어도 못 보던 얼굴이었는데.

“제가 감독관 대신하기로 했거든요. 다른 친구들은 좋다고 하는데 주원 씨 의견만 들으면 돼요.”

“다른 애들이 알겠다고 하면 저도 따를게요.”

자신의 부상 때문에 던전을 한동안 돌지 못한 걸 신경 쓰고 있어서 주언은 두 사람의 의견을 따르고 싶었다.

주언의 대답에 구영과 수희는 직감했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무려 S급 헌터가 자신들의 감독관이 되리라는 사실을.

**

여명훤은 말만 감독관으로 있겠다고 한 게 아닌지, 던전에 가지 못했던 일주일 치를 메꾸기 위해 C급 던전에 가자고 제안했다.

이왕 확실하게 지켜줄 사람이 있을 때 가는 게 낫다는 판단이 섰다. S급 에스퍼가 감독관이 됐으니 더 높은 등급에 도전해서 실력을 쌓자 싶었다. A급 던전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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