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자신의 기준치가 높은 사람들은 대개로, 타인에 대한 기준치도 높기 마련이다. 여명훤도 그랬다.
게다가 여명훤의 주위에는 아무리 등급이 낮아도 A급밖에 없었다. 그 A급조차도 S급에 근접한 A급뿐이어서 여명훤은 몬스터 한 마리 제대로 잡지 못하고 요란법석을 피우는 두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으아악!”
“왜 이렇게 움직임이 둔하지?”
“아니… 속도가…!”
A급에 비하면 어찌어찌 상대할 수는 있다고 쳐도, D급 던전에 갔을 때처럼 원활하게 처리한다고 보긴 어려웠다.
“규칙적인 패턴으로 공격하는데 아직도 파악을 못 했군.”
여명훤이 한마디 힌트를 주자 진수희가 먼저 움직였다.
휘익-!
“고개 숙여!”
진수희의 말에 구영이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뒤에서 달려들던 몬스터가 두 동강이 나 바닥에 떨어졌다. 처음으로 정확한 타이밍에 몬스터를 베어냈다. 구영이 옆에 쓰러진 몬스터를 질린 눈으로 보았다.
“헉. 헉. 고맙다.”
“정신 줄 잘 잡아.”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턱에 고였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부근의 몬스터를 겨우 다 토벌한 두 사람이 어기적거리며 명훤의 옆에 서 있는 주언 쪽으로 다가갔다. 능력을 한계까지 써서 무거운 돌덩이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형…!”
“오빠…!”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뻗어 주언의 손을 붙잡았다. 주언은 익숙하게 두 사람의 손을 잡고 가이딩을 해주려던 때였다.
탁.
주언의 두 손에 잡힌 팔이 떨어졌다. 주언이 한 게 아니었다. 여명훤이었다.
여명훤은 주언의 팔이 아니라, 구영과 수희의 팔목을 쳐서 잡고 있는 손을 떼어 냈다. 세 명 다 동시에 여명훤을 쳐다보자, 그도 조금 민망하긴 했는지 헛기침을 했다.
“왜 그러세요?”
“실전에서 가이드 없을 때를 대비해서 약에 익숙해지는 편도 나쁘지 않아.”
구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걸 가정해서 실전을 뛸 거였으면, 주언이 입원했을 때 던전을 돌았으면 됐던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약… 안 맞으면요?”
“전 그냥 가이딩 해도 상관없는데.”
두 사람이 열심히 싸울 때, 주언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여명훤의 옆에 서 있어야 했다. 겨우 자신의 쓸모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명훤은 단호했다.
“이번 기회에 익숙해지는 편이 좋겠군.”
“맞는 말이네요.”
먼저 여명훤의 말에 수긍한 건 진수희였다. 오빠가 당했던 일을 생각했는지,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에스퍼님의 말에도 일리는 있고요.”
주언도 수희의 생각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 명훤의 말에 수긍했는지 이해했는지 수희의 쪽으로 돌아섰다.
“난 그냥 가이딩….”
구영은 은근슬쩍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이미 손에는 약이 쥐어져 있었다.
“여기 약.”
누가 봐도 가이딩 받는 대신, 약을 먹으라고 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구영만이 억울해하며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
“형.”
훈련소로 돌아온 구영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근육이 아팠다. 주언은 곧장 쉬는 대신 아침에 나가기 전에 널어둔 빨래를 갰다.
구영은 맞은편에 앉은 주언을 물끄러미 보다가 주언을 불렀다.
“응?”
“내가 진짜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여명훤 에스퍼님이랑 무슨 사이야?”
주언이 남은 빨래를 마저 개었다. 주언이야말로 궁금했다. 여명훤이 가이딩을 막고 약을 줄 때처럼 심술을 부릴 때는 있지만, 사적인 감정을 제외해도 두 사람의 성장에 도움이 될만하다고 생각한 행동만 했기에 주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모르겠어.”
단순히 하룻밤 상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거의 사람?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굳이 정의하자면 감독관과 훈련생. 이게 다였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 지어 말하기엔 주언도 알고 있었다. 여명훤에게 우주언은 특별했다. 어떤 의미로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른다고?”
“…응.”
“형이 모르면 누가 알아.”
구영이 사귀기 직전인 관계라서 애매한 거냐고 묻자, 주언이 허둥지둥 고개를 저었다. 너무 놀라서 마지막으로 개고 손에 쥐고 있던 빨래를 구겼다.
“나 애인 있는 거 너도 알잖아.”
“아.”
한동안 연락하는 걸 못 봐서 헤어진 줄 알았다.
“그럼 뭔데?”
아직 주언도 혼란스러웠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감정조차도. 윤재를 추악하게 의심한다고 지적받을까 봐 겁이 났다.
“예전의 나랑 알던 사이였던 거 같아.”
“알던 사이였다고?”
“응.”
구영은 예전에 주언이 해줬던 얘기를 떠올렸다. 그때 주언은 분명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예전에 형 기억 잃기 전에는 지인도 없었다고 하지 않았어?”
“…응.”
그러고 보니 직업도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유일하게 있는 윤재에게 잘하고 싶다고, 주언이 흘리듯 말한 걸 구영은 모두 기억했다.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고 은둔생활 했던 사람이 완전히 변하는 게 가능한가? 던전에서 보인 모습을 떠올리자 새삼스럽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형 애인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는데?”
이미 거짓말을 몇 번 해서 얄팍해진 믿음에 금이 점점 진해졌다.
“…만약 그런 거면 난 어떡해야 하지?”
“뭘 어떡해? 당연히-!”
“이제껏 윤재가 나를 위했던 것만큼은 진심이라는 거 나는 아니까.”
2지구에 있을 때 주언과 윤재를 아는 사람들은, 구영을 제외하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윤재 같은 애인 없으니까 잘해주라고. 저렇게 헌신적인 사람은 없다고.
주언이 마른세수를 하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주원이 형.”
“미안. 너도 내가 답답하지.”
이제껏 믿었던 유일한 한 사람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면, 그 안에 난 커다란 구멍은 혼자 메워야 한다.
“에스퍼님이랑은 얘기해 봤어?”
“윤재 먼저 만나서 얘기해 봐야 할 것 같아서.”
“작정하고 숨긴 거면 물어본다고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은데….”
“그때도 거짓말하면….”
주언이 쓰게 웃었다. 그 순간은 모면할 수 있어도, 다시 한 번 발각된다면 그때는 주언도 더 이상 이해해줄 수 없다.
“피할 수는 없는 거 나도 알아.”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하고.
그냥 폭풍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는 법이니까.
이 와중에도 여명훤의 시선이 눌어붙은 설탕처럼 뇌리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
쉬는 날 주언은 일부러 약속 장소를 훈련소와 멀리 떨어진 카페로 잡았다. 윤재와 대화하는 모습을 얼굴을 알 만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약속 장소를 멀리 잡은 건 주언이 나름 내린 타협안이었다.
날씨가 유독 화창했다. 어느덧 가을을 향해가는 날씨라 카디건을 챙겨 입었는데, 낮에는 아직도 조금 더웠다.
“주언 씨.”
훈련소 숙소를 빠져나와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감독관님?”
“어디 가요?”
“감독관님은요?”
“그냥 한가해서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있었어요.”
“…한가하시다고요?”
“네. 그런데 딱 마침 우주언 씨 만났네.”
주변에서 이쪽을 흘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훈련생들이 많은 곳이라 튀어도 너무 튀었다.
“저는 약속이 있어서요.”
그것도 여명훤에 관해 알고 싶어서, 윤재를 훈련이 끝날 때까지 만나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번복하면서까지 만나는 거였다. 속마음이라도 읽힌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약속이요?”
“…네.”
“누구랑?”
“말하면 아세요?”
“모르는데 궁금해서요. 휴일에 주언 씨가 누구 만나는지.”
주언의 요청대로 깍듯하게 주언 씨라고 불리는 건데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그냥….”
그냥 감독관과 훈련생의 사이라면 애인 만나러 간다는 말이 이토록 어렵진 않을 텐데. 그냥 친구라고 말하면 따라오기라도 할 기세에 주언은 마지못해 솔직히 말했다.
“애인 만나러 가요.”
괜히 찔려 볼륨을 줄여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주언의 대답에 명훤은 담백하게 수긍했다.
“아아.”
“그럼 먼저 가볼게요. 약속에 늦을 것 같아서.”
주언이 고개를 꾸벅한 후 걸음을 재촉했다. 주언은 지하철역 근처에 왔을 때쯤 돼서야 명훤이 자신의 뒤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저 혹시 따라오시는 거예요?”
“아뇨. 볼일이 있어서.”
분명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은데 저렇게 대답하니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지하철역에 도착할 때까지 주언은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뻣뻣한 뒷목이 온 신경이 뒤에 있음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지만 명훤도 말없이 주언의 뒤를 따랐다.
“S급 에스퍼가 지하철 같은 것도 타요?”
“타면 안 되나?”
“그건 아니지만….”
주변에서 다 그쪽만 쳐다보는 것 같은데요.
이목을 받는 여명훤은 신경도 안 쓰는데 주언만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시선을 의식했다.
빈자리가 그렇게 많은데 명훤은 굳이 주언의 옆에 앉았다. 평일 오후라 지하철 안이 한산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허벅지가 맞닿자 주언은 괜히 다리를 있는 힘껏 오므렸다.
“어느 역에서 내리세요?”
이대로 계속 같이 가다간 자신의 목적지에서 같이 내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주언이 선수 쳐 물었다.
카페에 혼자 도착하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명훤과 주언은 같은 카페에 도착했다. 방해할 생각은 아닌지 명훤은 얌전히 구석 자리에 앉았다.
저 구석에 저렇게 큰 몸을 숨기려고 해봤자 더 시선이 집중될 뿐인데, 본인은 전혀 모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