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55화 (55/112)

#55

얼음이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웃던 것도 잠시 주언은 자신의 자리와 명훤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여기서 대화하면 다 들릴 것 같은데.’

카페 내부는 제법 넓었지만, 에스퍼의 오감은 일반인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오면 자리를 옮길까. 윤재와 함께 다른 곳으로 떠나면 그때는 따라오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미간을 찡그리며 빨대로 커피를 쭉 빨아 먹었다.

차가운 커피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자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주언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윤재는 약속 시간이 지나도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얼음이 녹아, 컵 표면에 물방울이 맺혔다. 주언은 시간을 확인했다. 혹시 몰라 보냈던 약속 시간과 장소도 다시 한번 확인해봤다.

Rrrrr.

주언이 윤재에게 전화를 걸기 직전 윤재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주언아, 어디야?

“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일 있어?”

주언의 물음에 전화 너머에서 잠시 앓는 소리가 났다.

-일에 문제가 생겨서. 미안한데 약속 다음으로 미룰 수 있을까?

“다음?”

-급한 일이야? 네가 먼저 만나자고 하고.

그렇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일을 그만두고 여기에 오겠다는 말투에 주언이 서둘러 윤재를 만류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지금 전화로 말하긴 어려운 일이야? 아니면 저녁쯤에 기관 앞에서 봐도 되는데.

“아냐. 그냥 다음에 보자.”

전화로는 할 수 없는 얘기였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확인해야 하는 일이었다. 주언의 목소리가 다소 차가운 걸 눈치챘는지 윤재가 재차 사과했다.

-미안해. 일이 갑자기 터져서.

“아냐. 일 때문인데 뭐. 괜찮아.”

주언이 통화를 마무리하고 남은 음료를 들이켰다. 화가 났지만 그건 바람을 맞아서가 아니었다. 그가 이곳에 오지 않아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여전히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여명훤을 아무렇지 않은 척 대하는 시간이 길어진 것에 대해 화가 났다. 그런 생각을 한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여기에 오기까지 힘겹게 마음을 먹었던 만큼 허탈하기도 했다.

“저도 약속이 취소됐네요. 때마침.”

어느 틈에 다가온 건지, 명훤이 주언 앞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자연스럽게 앉았다. 던전에서 나온 후에 명훤이 몇 번 식사를 제안했지만, 주언은 번번히 거절했다.

“…저 지금 바람맞았다고 놀리시는 거예요?”

“네?”

“약속 없으셨는데 저 따라오셨던 거잖아요.”

“아, 미안해요.”

명훤이 순순히 사과를 해왔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가 순순히 수긍할 거라곤 생각 못 했다.

“…따라오신 거 진짜 맞아요? S급 원래 이렇게 한가해요?”

아마 지금 무음으로 바꿔놓은 핸드폰은 불타고 있을 것이다. 주언을 만난 이후 기계같이 스케줄을 소화해내던 여명훤은 증발했으니까. 주언의 얼굴 한 번 보겠다고 개새끼처럼 새벽부터 훈련소 앞 카페에 있었던 명훤이 쓰게 웃었다.

지금 나서지 않는 게 낫다는 걸 알지만, 사춘기 애새끼처럼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었다.

“기회 놓치고 싶지 않아서요.”

“무슨 기회요?”

이제껏 주언의 정보를 은폐해왔을 게 분명한 그 애인이라는 새끼는, 꼬리가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있었다.

“애인이랑 사이 별로 안 좋은 거면 나한테는 좋은 일이니까.”

‘오늘은 일단 그 새끼 얼굴만 보려고 했는데.’

예상외의 수확이었다. 주언이 다른 새끼랑 나란히 걷는 상상만 해도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으니까.

그 자리는 원래 자신의 것이다.

명훤은 주언이 원하는 두 사람의 거리감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사실은 존댓말을 쓰는 것도, 그저 공적인 관계로 얽혀 있는 것도 싫었다. 명훤은 예전의 자신의 했던 말이 날카로운 둔기가 되어 자신을 후려치는 불유쾌한 경험을 실시간으로 하고 있었다.

“…사이 좋거든요?”

죽일까.

명훤의 얼굴에 잠시 살기가 스쳤다. 하지만 명훤은 곧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주언 씨는 애인이랑 사이가 좋은데, 처음 본다는 남자랑 막 자고 그래요?”

“…그건.”

주언이 얼굴을 확 붉혔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주언이 손을 파닥이며 얼굴을 식혔다.

“이유는 말하지 말아요.”

“네?”

“별로 듣고 싶은 이유는 아닐 것 같아서.”

듣고 싶은 대답이 나오지 않을 걸 아는 명훤은 주언의 말허리를 잘랐다.

“내가 만약에 그쪽이 찾는 사람이 아니면 어떡하려고 이래요?”

“착각 안 하는데.”

“…….”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가 다리를 꼬았다. 느른하게 내리깐 속눈썹을 멍하니 쳐다보았을 때였다. 그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자 주언은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자신과 다르게 아주 단단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절 사람 착각하는 병신으로 보지 말아요.”

자신이 어떤 말을 하든, 이 남자는 자신의 생각하는 바를 바꾸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무슨 사이였는데요?”

명훤이 손가락으로 잔을 쥔 주언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주언이 화들짝 놀라자 명훤이 씁쓸한 얼굴로 손을 뗐다.

“말하면 감당할 수는 있어요?”

겨우 이 정도로 놀라면서.

감당. 의미심장한 발언이었다. 마치 지금의 우주언을 믿지 못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리고 분하게도 그가 말을 함으로써 자신이 아직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가이드였던 과거의 자신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벅차하는 중이었다.

20년여간의 기억이라는 지반이 없는 주언은 너무도 연약했다. 자신에 대한 것들을 건너 듣는 게 아닌, 자신이 직접 두 발로 알아내고 싶었다.

“…그건… 장담할 수 없지만….”

“기억해줄 때까지 기다릴게요.”

“평생 기억이 안 나면요?”

“그래도요.”

“…부담스럽네요. 기억은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주언이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명훤이 테이블에 뺨을 대고 주언을 올려다보았다. 자신보다 키가 몇십 센티는 훨씬 더 큰 남자인데도 자신을 올려다보는 표정이 귀여워 보였다.

“나를 잊고 싶어서 잊은 걸까 봐 무서워.”

“…무섭다고요?”

장난이라고 생각해서 가볍게 웃었으나, 웃음은 곧 멎었다. 진지한 얼굴에 잔잔했던 바다에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주언은 예상치 못한 명훤의 말을 한참 동안이나 곱씹었다.

“…우리 사이 안 좋았어요?”

관계의 깊이까지는 생각해 봤어도 사이가 나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내가 실수를 너무 많이 해서. 나를 싫어할지도 몰라요.”

그가 소심하게 주언의 손끝을 잡았다. 손가락 첫 마디만 겨우 잡은 손이 애달팠다.

“내가 엄청 이기적인 거 아는데.”

“…….”

“그래도 곁에 있는 거라도 하게 해줘.”

“…….”

“기억이 돌아왔을 때, 네가 내 곁에 있기 싫다고 하면 그땐 사라져 줄 테니까.”

사라져 준다는 말이 어떤 의미냐고는 묻지 못했다.

우리는 정말 어떤 사이였을까. 감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방금 대화로 주언은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

다른 때보다 홀로 돌아오는 길이 길었다. 불이 켜지지 않은 집 안에는 서늘한 공기가 풍겼다. 명훤은 셔츠 윗단추만 풀고 그대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하아….”

처음에는 그냥 주언을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을 즐기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다음에는 명훤의 능력으로도 쉽게 정보를 알아낼 수 없는 그 애인이라는 새끼의 얼굴만 볼 생각이었다.

‘우와.’

주언이 예전부터 좋아하던 식당에 데려가자, 처음 먹는데 입 맛에 맞다며 놀라 하던 주언이 떠올랐다. 오물오물 씹는 입에 제 혀를 쑤셔 박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느라 힘들었다.

인내심이 마지막에나마 발휘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전에 다른 무거운 감정은 줄줄 흘러나와 버렸으니까.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

처음에는 주언이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만족했는데, 곁에 있으면 있을수록 욕심이 새어 나와 큰일이었다. 아무리 억눌러도 작은 틈을 비집고 나오는 욕망은 쉴 새 없이 명훤을 충동질했다.

여전히 부드러운 손. 어색해하지만 숨기지 못하는 자신을 향한 호의.

생각만 해도 몸이 뜨거워졌다. 천천히 기다리지 못하는 자신에게 겁먹고 도망칠까 봐 무섭다가도, 오래 기다렸으니까 이 정도는 봐줬으면 하는 양가감정이 들었다.

“우주언.”

명훤의 손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다시 희미하게 생겨난 주언의 체취에 명훤이 미간을 좁혔다. 사람을 돌게 만드는 체취다.

“주언아.”

원망하더라도 좋으니 자신의 존재가 주언의 안에 크게 자리 잡도록 기억을 되찾았으면 좋겠고, 자신을 싫어하는 건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니 지금의 주언이 자신을 좋아해 주길 바랐다.

“하….”

명훤의 입에서 한숨에 가까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주언의 앞에서는 이성적인 사고가 어려워 자신의 행동이 엉망진창이 된 걸 알았지만, 안다고 해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명훤이 여운에 잠겨 있었을 때였다. 적막을 깨고 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Rrrr.

전화를 무시하려고 했으나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명훤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때 맡겨 주셨던 사람 개인 정보 아직 다는 못 찾았는데, 일단 찾은 정보는 취합해서 보내드렸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정보가 드디어 손에 들어왔다. 전화를 끊자마자 명훤은 집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 앞에 종이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

명훤은 봉투를 들고 집 안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멈춰 서서 뒷목을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도 명훤이 눈치챈 걸 알아차렸는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물어왔다.

“어디 갔다 와?”

적막한 공기 사이를 뚫고 느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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