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집 밖에 나간 그 잠깐 사이에 집 안으로 들어온 여한올이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나긋한 목소리와 성별을 파악하기 모호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 그런 외적인 부분 때문에 어디를 가도 호의를 받는 남자에게 여명훤은 조금의 호의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여한올을 바라보며 말했다.
“쥐새끼처럼 오지 말랬지.”
“이렇게 안 오면 네가 안 만나주잖아.”
“안 만나는 게 나으니까.”
“나 여기 있는 거 아무도 몰라.”
여한올은 자신이 그것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 같냐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무슨 일인데.”
“요즘 네가 평소답지 않다는 소식이 내 귀에까지 들려서.”
“그래서.”
“그래서 잘 있나 보러왔지.”
“나이 먹더니 쓸데없는 걱정이 늘었군.”
여명훤이 기분 나쁘게 혀를 찼다. 여한올은 명훤의 신랄한 태도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소파에 있는 쿠션을 껴안았다.
“네가 요즘 연락이 뜸해서.”
“한동안 내실 다진다고 정보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 건 너야.”
“내가 그랬었나. 그냥 연락도 안 오니까.”
“애초에 한 적도 없으니까.”
명훤이 불청객을 빨리 떠나보내고 싶어 하는 노골적인 기색을 드러내자, 버티고 있던 여한올이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요즘 안 하던 짓 한다며.”
“네가 알 바는 아니지.”
여명훤은 자신이 경솔했던 태도를 드물게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만 연관됐다면 괜찮았을 테지만, 주언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정보 통제 요청을 해서 주언의 정보가 금방 드러나진 않을 터였다.
‘우주원이라고 이름을 바꿔서 그냥 비슷한 이름에 흔들린다고 생각할 확률이 높지만.’
하지만 정보를 뚫고 자신의 이상행동이 벌써 AGT 쪽에 새어 들어간 건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우리 쪽으로 대놓고 들어올 수도 없고, 네 말만 믿으면서 불안해하는 것도 우습잖아.”
“정보를 주는 걸로도 부족한가?”
4년 전부터 여명훤은 AGT와 내통하며 쓸모 있는 정보를 물어다 주었다. 여한올도 알았다. 여지웅이 불안한 여명훤의 심리 상태를 방치하며 뜻대로 주무르듯, 자신이 하는 짓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여기서 만족해야 했지만, 여명훤이라는 패가 너무 훌륭한 게 문제였다. 욕심이 생겼다. 그에게 사람을 붙이고, 돌발 행동 하는 것에 불안해하면서도.
여한올이 부스럭거리며 주머니를 뒤졌다. 영수증 종이라도 꺼낼 것처럼 굴었으나, 주머니에서 나온 건 칠흑색의 구였다.
“아이템?”
명훤이 주머니에서 나온 물건을 눈치채곤 물었다.
“구하느라 오래 걸렸어.”
“뭔데.”
“맹세 아이템. 네가 배신하지 않겠다는 증거가 필요해.”
여명훤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맹세 아이템. 물건의 강제성 때문에 합법적인 루트로는 절대 구할 수 없는 아이템이지만, 뒤에서는 없어서 못 파는 물건이었다. 한 명에게만 쓸 수 있지만 억 소리가 우습게 나는 아이템이다.
“네가 한순간에 우리 안면몰수 하지 않을 거라는 증거.”
여한올이 싱긋 웃었다. 목적은 이거였군. 명훤은 불길해 보이는 구를 잠시 쳐다보다가 낚아채듯 가져갔다. 이 아이템을 쓰는 방법은 간단했다.
“정부의 개로 살 일은 없을 거야.”
구를 들고 맹세를 하는 것.
명훤의 말이 끝나자 구가 스르륵 녹아내리며 손안에 흡수됐다. 혈관 안에 흘러들어온 불쾌한 감각에 명훤이 미간을 좁혔다.
만약 지키지 않으면 몸 안에 스며 들어간 구가 심장 안에서 터질 것이다.
“이게 얼마짜린데… 상의는 하고 말하지.”
“이게 네가 제일 바라는 거잖아.”
AGT에게 정보를 계속 제공해주는 것보다, 여명훤이 정부의 충실한 개로 살지 않는 것.
“그건 맞지.”
여한올이 눈치챘냐며 웃었다.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에도 여명훤은 감흥 없는 시선으로 한올을 바라보다 입을 뗐다.
“돈 제법 들었을 텐데, 답례로 하나 말해주지.”
“뭘?”
“나 걱정할 시간에 주변이나 신경 써.”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주변 너무 믿지 말라고.”
뜬금없는 충고였다. 명훤이 이 말을 하는 이유가 뭐지 싶었다. AGT는 테러 단체이긴 했지만 다수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었다.
“이런 거 가져왔다고 나 화나게 하려고 한 거면 성공이야.”
여한올이 한순간에 생글거리던 미소를 거뒀다.
소수로 운영하는 만큼, 여한올에게 AGT 사람들은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명훤의 말을 믿지는 않지만, 무심코 던져진 불안의 씨앗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알았다.
“볼일 다 봤으면 꺼지지?”
명훤은 여한올의 말에 대응하지 않았다. 그저 할 일 다 했으면 꺼지라는 듯 손을 휘저었을 뿐.
“다음에 보자.”
여한올이 창문을 열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명훤은 창문을 탁, 닫으며 중얼거렸다.
“주언이 냄새 없어졌잖아. 엿 같게.”
**
음산한 하늘과, 텁텁한 공기에 몸이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온다.”
선두에 선 진수희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구영의 손안에 스파크가 튀었다.
구우욱.
음울한 분위기 사이로 뼈가 부딪히며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 미친. 냄새.”
아직 살점이 다 떨어지지 않은 언데드 수십 마리가 일제히 삐거덕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빠르지는 않지만 생명력은 그만큼 질겼다. 베어내고 베어내도 다시 일어나 이쪽을 공격하는 모습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감독관이라 도와주지 못하는 만큼 정선우는 뒤에서 열심히 피드백을 해주었다면, 여명훤은 철저한 방임주의로 높은 등급에 와서 생사를 오가는 순간에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때때로 한마디씩 조언해 주었을 뿐.
공격의 패턴. D급 이하의 몬스터는 너무 행동이 단순했고, 그 이상의 등급의 몬스터를 마주쳤을 땐 살기 위해 검을 무조건 휘두르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
한참 동안 언데드를 베어내던 수희가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머리 안에 있는 마석을 노려야 되는 거 같아.”
여명훤의 조언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초반 언데드와 싸우며 언데드의 특성을 알아낸 진수희가 구영에게 알렸다.
“오케이.”
구영의 주변에 화살촉 여러 개가 허공에 떴다. 처음에는 두 개도 힘겨워 했던 것에 반해 컨트롤이 늘어 어느덧 5개까지 동시에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뒤에서 주언은 두 사람의 후방에 다가오는 몬스터를 처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호흡이 흐트러질 때쯤, 주언이 시기 좋게 방사 가이딩을 시작했다.
꾸룱? 구우욱.
언데드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몇 주 사이에 눈부시게 성장한 두 사람의 호흡 또한 좋아져서 등급 이상의 효과를 내고 있었다.
“저기 애들 엄청 성장하지 않았어요?”
주언이 눈을 빛내며 명훤에게 물었다. 고개를 휙 돌리자 명훤과 시선이 곧장 마주쳤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글쎄요. 안 보고 있었는데.”
“그럼 어딜…. 아니다 말하지 마요. 두 사람이 위험해지면 어쩌려고 안 보고 있어요.”
주언이 괜히 명훤을 타박하자 명훤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저 정도로 애먹으면 안 되죠.”
여명훤이 두 사람의 성장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 같아 괜히 뿌듯해졌다.
“끝났어요.”
여명훤의 말대로 두 사람의 클리어 시간이 비약적으로 줄었다.
두 사람의 손등이 스쳤다. 주언은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어 냈다. 다행히 수희와 구영은 티격태격하느라 이쪽을 보지 못한 듯했다.
윤재와 약속이 취소되고, 여명훤의 진심을 조금 더 알게 되고, 같이 저녁을 먹은 이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아주 미묘하게 바뀌었다.
마치 처음 연애를 시작하는 풋내기처럼 어색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뀐 건 주언뿐이었다. 여명훤은 주언이 바랐던 대로 전처럼 주언을 대했지만, 주언은 전처럼 명훤을 대할 수 없게 됐다.
그때 이후로 주언은 평소보다 명훤을 더 피했다.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온 신경이 그에게로 쏠렸다. 목숨이 오가는 던전 안에서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지 않으면 어느덧 명훤만 의식하고 있었다.
“주언 씨. 오늘 끝나고….”
“바빠요. 죄송해요.”
여유 있게 받아치고 싶었으나 그러기가 힘들었다. 명훤은 졸지에 말을 꺼내보기도 전에 거절당했다. 구영과 수희가 명훤의 눈치를 살폈으나,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아 보였다. 오히려 기분이 조금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 무슨 일 있었어?”
진수희가 구영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구영은 주언과 같은 방을 쓰니 무언가 알지 않을까 싶어 나온 질문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냥 모르는 척하자.”
“그래.”
두 사람은 괜히 멀리 떨어져서 걷기 시작했다. 가장 앞서 나가는 건 주언이었다. 마치 심장이 옮겨 간 것처럼, 아까 맞닿았던 손등이 쿵쿵 뛰었다. 주언은 손등을 다른 손으로 매만지며 걸음을 재촉했다.
“같이 가요.”
바로 뒤에 명훤이 바싹 뒤쫓아 왔다. 주언은 잠시 머뭇대다가 명훤을 불렀다.
“저기.”
“네?”
“저 정말 오늘 바빠서 거절한 거예요.”
뒤늦게 명훤이 상처받았을까 봐 변명하듯 말한 것까지 찌질함의 극치였다. 여유 있는 명훤에 비해 자신은 너무 여유가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알았어요.”
정말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명훤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건 또 그거대로 기분이 이상했다.
‘진짜 나 왜 이래.’
주언이 자신의 널뛰는 감정의 고삐를 잡기 위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런데, 주언 씨.”
“네.”
“그거 알아요?”
“뭐를요?”
“주언 씨 얼굴 빨개질 때, 뒷목도 같이 빨개지는 거.”
명훤의 말에 주언이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