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앞장서서 자연스럽게 얼굴을 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명훤의 말에 목이 한층 더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수고했다고 둘 말고 저 두 명까지 껴서 같이 밥 먹자고 하려던 건데. 그래도 싫어요?”
“…저 놀리는 거죠.”
“조금?”
명훤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얄미운데 저 웃음소리를 들으면 순식간에 짜증이 가라앉았다.
“그래서 싫어요?”
사실 바쁘다는 말은 핑계였다. 하지만 주언은 곧 수희가 오빠의 병문안을 가야 한다는 말을 기억해냈다.
“…내일은 괜찮아요.”
주언이 헛기침을 했다. 내일은 윤재에게 만나자고 할 생각이었다. 요즘 무척 바쁜 듯해서 당일에 시간 되냐고 물어보려고 해서 약속을 잡지는 않았다.
“내일은 쉬는 날인데….”
명훤도 주언의 애인을 염두에 두고 말한 듯 물어왔다.
“아… 내일 약속 있으세요?”
하지만 주언은 명훤의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되물었다. 바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근래 매일 함께하니까 당연히 내일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야 쉬는 날에도 만나도 좋지만, 주언 씨가 시간 괜찮냐는 소리였어요.”
명훤이 주언의 생각을 정정해 주었다. 그제야 명훤이 주언의 애인을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이라는 걸 눈치챘다.
“…괜찮아요.”
아직 윤재와 약속을 잡은 건 아니니까. 지금 약속을 더 먼저 잡았으니까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이 여명훤을 사적으로 알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훗날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주언은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
밖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온 구영은 벌써부터 누워있는 주언을 발견하곤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윗옷을 벗고 장롱에 넣으며 부산스럽게 돌아다녔지만, 주언은 무엇이 그렇게 바쁜지 자신이 온 것도 눈치 못 채고 있었다.
“형?”
구영이 침대 앞에까지 가서 손을 흔든 후에야 주언이 구영이 돌아온 걸 눈치챘다.
“깜짝이야. 언제 왔어?”
“온 지 조금 됐는데.”
“그래?”
“그런데 형 오늘 약속 있는 거 아니었어? 바쁘다며.”
“오늘 일찍 쉬어야지. 내일도 나가는데.”
“…그래.”
주언은 침대에 누워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핸드폰을 잘 쓰지 않았던 주언은 기숙사에 돌아오자마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여명훤은 아주 유명한 상대 아닌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검색하면 되잖아.’
궁금하면 찾아볼 수 있는 상대니까!
주언은 스스로의 생각에 감탄하며 여명훤 세 글자를 검색창에 적었다. 그때부터 주언은 저녁을 먹는 것도 잊은 채 검색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세간의 관심은 생각보다 훨씬 뜨거웠다. 각종 커뮤니티에 여명훤 사진과 여명훤 본 썰 그리고 여명훤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 같은 여러 가지 게시글이 끊임없이 계속 나왔다.
하지만 유명세에 비해 여명훤의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검색을 타고, 타다가 페이지 끄트머리에 있는 한 기사 제목을 보곤 멈칫했다.
[연예톡톡] S급 에스퍼 여명훤은 연애도 S급일까? 에스퍼의 사생활 (1)
주언은 홀린 듯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타사에서 진행된 인터뷰를 발췌해서, 나머지는 기자가 열심히 써내려간 추측밖에 없었다.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좋아할 사람은 한 명뿐이라는 소리처럼 들리시는데요?
-네, 뭐
앞뒤 인터뷰는 다 잘리고 발췌된 부분은 딱 이 부분뿐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 한 명이 누구일지에 대한 추측과 그 사람을 공식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의혹이 난무했다. 결국 정확한 건 타사에서 발췌된 저 한 줄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 기사는 (3)까지 나온 모양이었다. 주언은 다음 글을 클릭하는 대신 댓글을 확인했다.
댓글을 보니 다른 사람들도 다 속았는지 댓글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Hiss***
이게 왜 뉴스 칸에 있나요? 소설란에 가야 하는 거 아닌지….
└ 22국가에 이바지하는 에스퍼 사생활 가지고 망상이나 쓰고… 이게 정식 기사라니;; 이 언론사 제정신 아닌 듯;;;
roro***
제목으로 낚시질 작작해랔ㅋㅋㅋ
└ 222222 기사는 정부가 무섭지도 않나;;
└ ㅇㄱㄹㅇ 뭐 공식적인 거 밝힌 줄 알았는데 뭔ㅋㅋㅋ
Cho***
그런데 진짜 누굴까 궁금하긴 하다
댓글을 내리던 주언이 멈칫했다. 주언의 심정도 똑같았다. 저 사람은 자신이 아닐 테니까. 그 생각까지 미치자 가슴이 욱신거렸다.
날짜를 확인하니 2년 전에 올라온 기사였다. 3년 동안 임상 시험에 참여했고, 1년은 재활 치료에 힘썼다. 20대의 반을 병에 매달렸고, 그동안 주언은 여명훤이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예전의 자신을 알았더라면 2년 전에 죽었다고 알고 있을 텐데, 발췌된 인터뷰에는 마치 계속 만나고 있는 듯한 뉘앙스가 풍겼다.
인터넷을 잘 하지 않아서 인터넷의 무서움을 잘 모르는 주언은 댓글들을 보며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잔뜩 심란해하고 있는데 밑에 심상치 않은 댓글이 눈에 밟혔다.
Heem***
에스퍼도 이미지 관리하네 탑급이라 그런가… 내가 들은 얘기가 있는데ㅎㅎㅎ
└ 뭔 얘기 들었는데???????
└ 222222궁금해 썰 풀어줘
└ 선생님 이렇게만 말씀하시고 사라지시면 저 죽어요
└ 작성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작성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헐???이거 팩트임???????
└ 댓삭튀했네 ㅡㅡ
삭제된 댓글 내용이 대체 뭘까. 궁금해서 죽을 것 같았다. 검색창에 새로 검색을 해봤으나 주언이 원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여명훤 사생활
여명훤 이미지 관리
여명훤 애인
결국 주언은 밤을 꼴딱 새우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난 구영이 눈이 충혈된 채로, 구영이 자기 직전 봤던 포즈 그대로 있는 주언을 발견하곤 흠칫 놀랐다.
“…형? 오늘 나갈 수 있겠어?”
“어? 벌써 아침이네.”
주언이 뻑뻑한 눈을 비비며 새삼스러운 얼굴로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
주언이 먼저 윤재에게 보자고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저번에 급한 일이 터져서 못 본 탓에, 이번에는 주언이 쉬는 때에 맞춰 일부러 시간까지 빼놨는데 이번에는 주언이 선약이 있다고 했다.
“타이밍 안 맞네.”
주언에게 사람을 붙일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붙이는 순간 비참해질 것이다.
윤재는 지난 4년의 시간을 믿고 싶었다. 주언이 스스로 제 품 안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윤재는 결국 휴가를 반납하고 내내 일했다. 머리 한편에는 주언이 자신에게 할 말이 무엇인지 신경 쓰고 있었다.
이곳에 돌아와서 다른 기억이라도 돌아온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전화 너머 목소리는 평온했다.
‘어쩌면 그냥 만나자는 말일지도 모르고.’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안 좋은 추측만 해서 혼자 기분 상해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선배님. 너무 답답한데 밖에 나가서 저녁 먹어요.”
뒤에서 같이 일하는 연구원 후배들이 윤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기분 안 좋은 게 표정에 여실히 드러났다. 며칠 전 실수를 해서 그런지 다들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연차가 제일 높은 사람이 총대 메서 윤재에게 말을 건듯했다.
“그럴까.”
너무 오래 연구실 안에 있었더니 답답하기도 했다. 윤재는 후배들을 이끌고 오랜만에 밖으로 나갔다. 생각해 보니 구내식당 아니면 대충 누가 포장해온 음식만 먹었다. 그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으니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
무리 지어 가는데 윤재의 시선에 익숙한 뒤통수가 포착됐다. 길 맞은편에 주언이 있었다.
‘누구랑 약속이 있나 했더니 같은 팀원들이랑 약속이었구나.’
안도의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인사라도 할까 싶었으나 거리가 조금 멀었다. 전화라도 하자 싶어 윤재가 주언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언은 전화를 받는 대신 잠시 고민하듯 화면을 응시했다. 그러곤 곧 주머니에 핸드폰을 다시 쑤셔 넣었다.
“…어?”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다 곧 상대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멘트가 나왔다.
윤재의 걸음이 멈췄다.
“선배님?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세요?”
후배가 윤재의 시선이 머문 곳을 보며 물었다.
“어, 아니야.”
머리로는 ‘그래 약속 도중에 다른 전화를 받기 싫을 수 있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서운할 필요 없었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려던 윤재는 몇 걸음 가지 않고 또다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곧 가게에서 또 다른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여명훤?”
여명훤은 주언이 나왔던 가게에서 나왔다. 밖으로 나온 여명훤은 익숙하게 주언이 있는 무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우연조차 없길 바랐던 두 사람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
쾅!
문이 부서질 듯이 거칠게 열렸다. 윤재는 사무실 사이를 가로질러 컴퓨터를 켰다. 초조해서 입술을 너무 짓씹은 나머지 비릿한 맛이 났다.
당장에라도 이성이 날아갈 것 같았다. 주언을 찾아가 대체 왜 같이 있느냐고 윽박이라도 질러서 모든 걸 알아내고 싶었다.
알아낸 후에는, 가두고 싶었다. 자신만 바라보게 하고,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파악해서 안심하고 싶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기억을 잃은 우주언의 곁에는 자신밖에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러지 않은 것은….
윤재가 의자에 주저앉아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