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주언이 스스로 자신을 선택하게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네가 나를 직접 선택하는 것에 의미가 있으니까.
여기서 얼마나 더 해야, 주언이 자신을 선택하는 걸까.
마치 여명훤과 우주언에게는 서로뿐이라는 것처럼 몇 년의 시간을 건너뛰고도 자연스럽게 나란히 있는 두 사람을 생각하니 속에서 열이 치솟았다.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도, 일행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알았던 거야.”
지독한 배신감이 들었다. 몰래 뒤에서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노에 찬 목소리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여명훤.”
언제부터 알았던 거지? 여명훤은 자연스럽게 주언의 옆에 있었다. 처음 만나는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윤재는 그가 자신을 찾아왔던 순간을 되짚어 보았다. 의뭉스러운 태도로 자신에게 굳이 인사하러 왔다던 여명훤.
“아냐… 그땐 몰랐어.”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과거를 되짚던 윤재가 고개를 저었다.
이곳으로 발령받고, 처음 그를 만났을 때까지는 여명훤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연루되어 있다는 의심뿐이었을 것이다.
그럼 대체 언제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생겼던 걸까. 사람을 붙이는 정도까진 해야 했나,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Rrrrr.
시끄러운 핸드폰 소리에 몰입되어 매몰되던 분노가 주춤했다.
우주언.
이름 세 글자를 확인한 윤재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주언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 머리가 차게 식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만약 알았더라면 이렇게 전화조차 하지 않을 테니까.
주언은 기억을 찾고 싶어 했다. 여명훤이 어째서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인지 어렴풋하게 짐작이 갔다. 우주언은 기억을 되찾지 못했고, 그래서 아직 자신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제야 주언이 자신을 만나서 하고 싶다는 얘기가 무엇일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냉정함 다음에는 불쑥 초조함이 끼어들었다.
“나랑 만나기 전에, 또다시 선택지가 하나밖에 안 남으면….”
여지웅이 자신에게 부탁한 폭주제는, 그 반대의 효능이 있는 약이 개발되어 있어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결코 상용화될 수 없는 약이겠지만, 그 약을 필요로 하는 건 비단 여지웅뿐만이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윤재는 신호음이 끊기기 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주언아.”
전화라 다행이었다. 윤재의 표정은 목소리와 정반대로 무서우리만큼 차갑게 식어있었다.
-전화했었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도.”
-맞다. 다음에 언제 시간 돼?
“너 가이드 훈련 기간 동안 되도록 연락 안 하고 싶다고 했잖아.”
주언이 밀어내기 위해 했던 말을 도리어 이쪽에서 이용해 먹을 줄은 몰랐다. 주언도 윤재가 한 말에 당황했는지 어색한 답이 되돌아왔다.
-그렇긴 한데… 그 전에 시간 내서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나도 네가 못 본다 그래서 스케줄을 앞으로 다 당겨놨거든. 그래서 한동안 바쁠 거 같은데… 어쩌지.”
-그래?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찰나의 공백조차도 신경 쓰였다. 주언은 곧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기숙사로 돌아갔는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일은 무슨. 너는 괜찮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전화 너머로 괜찮은 척 거짓말할 수 있듯이, 주언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어. 나도 괜찮아.”
-아까 전화한 건 왜 전화했던 거야?
자신을 만나서 해명을 듣기 전까지 주언은 성실하게 명훤을 밀어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언제까지 그 노력이 유지될까.’
하지만 늘 가장 경계해야 하는 건 변수다. 우연이 겹겹이 쌓여서 더 이상 두 사람의 만남에 의미가 쌓인다면. 여명훤은 주언이 막을 새도 없이 말할지도 모른다.
“애인인데 꼭 이유가 있어야 전화할 수 있어?”
주언을 자신의 연인이라고 속인 시점부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아… 응.
주언이 어색하게 응수했다.
“한동안은 못 볼 것 같은데… 나한테 정말 할 얘기 없어?”
강윤재는 자신의 권한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를 모두 열람했다. 주언의 감독관이 교체되어 있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낮은 등급의 훈련생이긴 하지만 본사에서 훈련받는 만큼 공정성을 유달리 신경 썼다.
감독관이 교체되기 전에 주언이 갔던 곳은 이중 던전이었다. 감독관은 이중 던전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에 책임을 느끼고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후에 새로운 감독관이 투입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새로운 감독관. 불안한 느낌이 들어 윤재는 주언의 팀 감독관 상세 정보란까지 클릭해 보았다.
달칵.
감독관 (1): 정선우 / 공격 2팀 소속 / 등급 A-
감독관 (2): 안무현 / 공격 1팀 소속 / 등급 A-
정보는 모두 정상적으로 떴다. 크게 문제 삼을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공격 1팀이라는 연결고리 하나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잠깐…….”
윤재는 혹시 하는 마음으로 안무현이라는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괜한 생각일 것이다. 윤재는 잠시 멈칫했으나 곧 엔터를 눌렀다.
달칵.
[NOT FOUND: 존재하지 않는 이름입니다. 재입력해주십시오.]
“…뭐야.”
이름을 재차 확인한 후 눌러 보았음에도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
[NOT FOUND: 존재하지 않는 이름입니다. 재입력해주십시오.]
윤재는 1급 기밀까지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이중 던전도 열람할 수 있는데, A급도 안 될 감독관의 이력을 윤재의 권한으로 확인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이 감독관은 자신의 권한으로도 정보를 알아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짐작 가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여명훤.’
이중 던전 때문에 여명훤이 주언을 찾은 걸까. 만약 그렇다면 정말 너무할 정도로 잔혹하지 않나.
여명훤은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나름대로 처리를 해둔 모양이지만, 누군가 감독관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찾아보면 금방 정체가 드러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훈련생 신분의 주언을 자세히 찾아볼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겠지만, 여명훤이 문제였다. 그는 존재 자체가 눈에 띄었다. 여명훤이 여기서 더 주언과 붙어 다닌다면 주언에 대해 관심을 가질 사람이 분명 생길 것이다.
자신같이 명훤과 주언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더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딱히 없어. 잠깐이라도 시간 내는 건 힘들어?
여명훤이 급했다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고로 여명훤이 언제 주언을 찾아낸 건지는 몰라도 감독관을 바꾼 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지웅도 곧 국제연합총회에서 특수능력 국제법에 관한 안건 때문에 바빠서 여명훤에 관한 감시가 느슨해져 있을 것이다. 만약 우주언이 살아있다는 걸 여지웅이 알았으면, 자신부터 찾아서 추궁을 했을 테니까.
“글쎄. 잘 모르겠어. 지금도 금방 가봐야 돼.”
목소리가 담담하게 나왔는지 주언은 이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았나 보다. 시간 될 때 말해줘.
“그래.”
여지웅이 알아차리기 전에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놓아야 한다. 자신이 직접 얼굴을 부딪치지 않는 선에서. 주언과 윤재는 아슬아슬한 선 위에 서 있었다. 기억을 잃지 않은 주언도 떠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놔줄 수는 없어…….”
모든 건 주언을 위해서 하는 일일뿐이다. 윤재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마음 뒷면에 웅크린 음험함이 속삭였다.
……날 미치게 하지 말아줘.
**
모든 건 주언이 원하던 거였다.
친한 척 부르지 말아 달라는 것도, 명훤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동일인물이라는 걸 확인하는 것도,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도.
“느려.”
“여기서 더 어떻게 빨리해요!”
소리치는 목소리에는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수희는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는지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야! 상의하고 가!”
꾸에에!
꾸엑!
오크 무리는 고블린과 비슷하게 보통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몬스터지만, 대개 오크의 지능이 고블린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오크는 대형을 맞춰 공격이 가해질 때마다 방패로 공격을 막았다.
채챙! 챙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 몇 마리가 방패 사이로 파고든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콰드득.
뼈까지 베이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스릉.
기다란 검을 방패 사이에서 빼내자 피가 진득하게 묻어 나오며 퀴퀴한 냄새가 났다.
“진짜 까다롭네.”
시끄러운 소리가 난무할 때마다 먼지가 일었다. 덩치가 족히 다섯 배는 큰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 선전하고 있었다.
원래 훈련생의 신분으로서는 가기 힘든 B-급 던전이었다. 이 정도 등급이면 수거 팀이 별도로 따라붙을 규모의 던전이었다. 그만큼 수희와 구영은 평소보다 비장한 자세로 전투에 임했다.
타다다닥. 누구랄 것 없이 두 사람은 몬스터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늦지 마.”
수희가 구영을 앞서 나가며 말했다. 구영은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수희가 뛰어오르는 것에 맞추어 능력을 발휘했다.
부웅. 순식간에 하늘 높이 도약하는 수희가 검 손잡이에 힘을 주었다. A급 던전을 맛본 이후 두 사람은 전보다 훨씬 더 혹독한 훈련도 군말 없이 받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