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두 사람의 능력 상성이 좋은 것도 한몫했지만, 에스퍼 정상에 있는 여명훤의 실력을 눈앞에서 목도해 목표치가 높아진 탓도 있었다. 한 번 여명훤의 전투 방식을 본 이상 두 사람은 전과 같이 현실에 안주할 수 없게 됐다.
‘서로가 라이벌로 의식하고 있는 것도 있고.’
두 사람은 지고 사는 성격이 못 됐다.
두 사람은 오크 무리 가장 끝에 있는 가장 거대한 개체를 발견했다.
“…생각보다 훨씬 큰데.”
“쫄았냐.”
“아니?”
“실수하지 마라.”
“너나.”
덩치도 덩치지만, 크기와 비례하지 않게 몸놀림이 민첩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방어구나 무기의 내구성이 한눈에 봐도 다른 몬스터의 것보다 좋아 보였다.
“저거 아이템 아니야?”
“무슨 몬스터가 아이템을 들고 있…네.”
끄아아악!
뒤에서 큰 소리가 나자 선두에 있는 오크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와. 오크 상위 종족은 처음 봐.”
“구경할 여유가 있냐. 너는?”
“넌 없어?”
“그런 놈들이 제일 먼저 죽더라.”
“악담을 퍼붓네.”
비장하지만 한숨 돌리는 여유까지 찾은 두 사람은 곧 몬스터 떼 속으로 몸을 던졌다.
“…나도 도울게.”
주언이 창을 든 손에 힘을 주고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한 발자국밖에 나서지 못하고 명훤에게 제지당했다.
“그때 다친 옆구리 아직 다 안 나았죠?”
움찔. 티 안 내려고 애썼는데 명훤의 눈은 속이지 못했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 나은데… 그리고 혼자 쉬다가 괜히 두 사람이 다치면.”
“다치진 않을걸요.”
멀리 있어서 식별하기 어려웠지만, 명훤은 이미 다 확인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몬스터 개체가 줄자 두 사람의 행동이 멀리서도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명훤의 말대로 몬스터들이 속수무책으로 구영과 수희에게 당하고, 보스 몬스터만이 남아 있었다.
“와. 얘 죽이면 아이템 나오나?”
숨찬 목소리에는 묘한 희열이 깔려 있었다.
“아마.”
수희가 호흡을 고르며 대답했다. 시선은 적에게 머물러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머뭇거림 없이 순식간에 보스 몬스터 앞까지 도달했다.
“돼지 새끼! 죽어라!”
구영이 전보다 조금 더 과격하게 움직였다. 구영은 뒤에서 후방 지원만 하는 걸 관두고 직접 전투에 나섰다. 직접 무기를 휘두르고, 그와 동시에 염력으로 무기를 겨냥해서 적을 교란시켰다. 하지만 큰 대미지를 입히지는 못하는 게 단점이었다. 그리고 그때 수희가 나섰다.
스릉. 검이 예리한 빛을 띠며 빛났다. 그녀가 구영의 뒤에 따라붙어 달렸다.
타다다닥.
보스 몬스터의 시선이 구영을 뒤쫓아, 수희를 시야에서 잠시 놓쳤다. 수희가 높이 뛰었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구영이 수희에게 능력을 썼다.
탁.
수희가 허공을 밟고 몬스터보다 높이 뛰어오르고 곧 하강했다. 날카로운 검은 오롯이 한곳만을 노리고 있었다.
푸욱. 검이 두꺼운 가죽을 뚫고 몬스터의 뇌에 깊숙이 박혔다.
끄아악!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보스 몬스터는 기다란 낫을 휘두르며 최후의 반항을 했다.
쿠쿵.
하지만 비명은 짧았다. 짙은 피 냄새와 함께 몬스터의 몸이 땅에 추락했다.
**
“하아… 하….”
두 사람이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짧은 순간 일어난 일이지만 모든 체력을 한 번에 쥐어짜 낸 만큼 힘들었다. 너무 힘을 쥐어짠 나머지 입 안이 버석거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와 동시에 몸의 혈관에 능력이 꿈틀거리며 제 존재를 알려왔다. 이대로 이 감각이 팽창되면, 곧 이 감각이 뇌까지 도달해 폭주를 일으킬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전에도 있었다. 그래서 전과 다르게 이 감각에 겁먹지 않을 수 있었다.
“후우….”
수희는 침착함을 유지한 채 무릎을 짚으며 땀을 닦곤, 주머니에 있는 약을 꺼내 물도 없이 짓씹었다.
“가이딩 받아도 되는데….”
아쉽다는 듯한 주언의 말에 수희가 씩 웃었다.
“오빠는 히든카드잖아요.”
금방 약효가 도는지 안색이 한결 나아졌다. 뒤에 구영도 이제는 익숙하게 약을 씹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가이딩 안 받고 약만 먹으니까 확실히 의존도가 낮아져서 불안감이 덜하네요.”
“…….”
“감독관님한테 말한 건데요.”
구영이 노골적으로 명훤을 보며 얘기했음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명훤의 시선은 여전히 주언에게 쏠려 있었으므로.
구영이 포기하지 않고 굳이 다시 짚어 말하자 명훤이 대충 대답했다.
“어.”
한마디도 대답이라고 구영이 꿋꿋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저번 같은 상황이 오면 좀 더 침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저희 호흡 괜찮지 않았어요?”
“뭐. 그냥.”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자신의 말을 듣고 대답이나 하나 싶어 던져본 말에 싸늘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아니.”
감독관은 끼어들지 않는 것도 맞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도 맞는데 묘하게 억울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두 사람 대화를 하지.’
명훤과 주언의 미묘한 분위기에 숨 막히는 사람은 애먼 구영뿐이었다.
구영은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어 괜히 주언의 옆에 바짝 서서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명훤에게 소심하게 반항했다.
“그런데… 왜 반말해요?”
그가 S급이긴 하지만, 감독관으로 부임해 서로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이 정도는 개겨도 되나 싶어 구영이 은근슬쩍 묻자, 명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대답과 다르게 주언의 어깨에 얹어진 손을 바라보는 시선은 살벌했다.
“너도 해.”
“…….”
너도 하라는 명훤의 말에 구영은 혀를 찼다. 확, 진짜 반말해버려? 하며 구영이 소심하게 중얼거리며, 주언의 어깨 위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러곤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어 주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지려고 말을 떼는데, 그 순간 명훤이 총을 꺼내 들었다.
“무, 무, 무, 무슨…!”
어깨에 손 한 번 올렸다고, 총을 겨누다니. 구영이 뒷걸음질 칠 새도 없이 총이 발포됐다.
타앙-!
털썩. 구영은 다리에 힘이 풀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둔탁한 아픔도 잠시, 바닥을 짚은 손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뒤를 보니 기습을 노리던 몬스터 잔당이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주검이 되어 있었다. 바로 뒤에 있었는데도 긴장을 풀고 있어서 눈치 못 챘다. 구영은 희게 질린 얼굴로 명훤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아요?”
“저는 괜찮은데….”
당연하게도 괜찮냐는 질문은 구영에게 향한 게 아니었다. 주언은 명훤의 말에 대답하며 말끝을 흐렸다. 누가 봐도 괜찮냐는 질문을 받아야 할 사람은 구영이었다.
“구영아. 괜찮아?”
주언이 대신 묻자 구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놀람이 가시지 않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호흡 괜찮냐고 묻기 전에 마무리부터 잘해.”
“이때는 괜찮냐고부터 물어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바로 앞에 있었는데 제가 맞았으면….”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비껴갔던 명훤의 능력을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져서 구영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난 그런 실수 안 해.”
“…네.”
너무 맞는 말이라 구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의 능력에 조금의 실수도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자신감. 그리고 그 자신감을 뒷받침해주는 완벽할 정도로 정교한 실력과 압도적인 힘.
재수 없지만 구영과 수희가 합심해서 몇 번이고 공격한 후에 겨우 잡을 수 있었던 몬스터를 순식간에 처치한 것에 새삼 명훤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다.
‘주언이 형한테 절절매는 모습 때문에 너무 개겼나.’
구영은 다신 개기지 말자고 다짐했다.
“저… 감….”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중간까지도 못한 채 끊겼다.
“감점.”
명훤의 담담한 말에 구영이 고개를 숙였다. 곧 수희가 이마를 짚으며 구영을 타박했다.
“무, 무, 무, 무슨 하면서 말 더듬을 시간에 피하지 그랬어.”
“…미안하다.”
어느덧 구영과 수희는 명훤의 무뚝뚝한 태도에 익숙해진 듯 보였다. 여명훤도 두 사람을 괜찮게 생각하는지 전보다는 확실히 거리감이 줄었다.
주언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서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뒤에서 후방 지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실력이 일취월장한 두 사람은 주언이 나설 기회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그러니까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아주 우스울 뿐이다. 주언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엄청 친해졌네.”
구영이 주언의 혼잣말을 들었으면 대체 어떤 부분에서 친해진 것 같냐고 따져 물었을 것이다. 주언은 저도 모르게 말로 나온 목소리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방금 내가 두 사람한테 질투한 건가?’
민망할 정도로 유치한 감정을 느낀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아무도 듣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할 무렵, 뒤에서 묘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주언은 붉어진 양 뺨을 쥐며. 조금 전 자신이 한 생각을 떨쳐내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명훤이 뒤를 턱짓하자 두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템 궁금하다며.”
“아, 맞다.”
짧은 순간 폭주하려는 기운을 억누르느라 까먹고 있었는지,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뒤를 돌아보자 보스 몬스터의 시체 위에 아이템이 빛을 발하며 떠 있었다.
명훤이 손을 휘저으며 쓰러진 몬스터 쪽을 향해 가리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몬스터 쪽으로 달려갔다.
“미친!”
“대박이다. 와. 진짜 나왔다.”
고작 D급 아이템이지만, 웬만한 등급의 보스 몬스터에게서는 아이템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만큼 인위적으로 가공된 아이템보다 훨씬 비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