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두 사람이 신난 목소리로 떠드는 걸 지켜볼 때였다. 뜨거운 숨이 목덜미를 스쳤다. 목을 움츠리며 뒤를 휙 돌아보자 어느덧 명훤이 뒤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자신의 곁에 서는 명훤을 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대체 왜 이러지?’
속이 울렁이는 것 같기도 하고, 바다에 표류해서 온몸이 물 위에 뜬 것 같기도 했다. 정확히는 형용할 수 없지만, 이 기분은 주언을 참기 힘들게 만들었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 같았다. 이 풍선이 터지기 전까지,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해서 괜히 더 초조해지는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봐요?”
주언이 괜히 뾰족한 어투로 물었다. 그럼에도 명훤은 물러서는 대신 주언의 옆에 서서 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두 사람 사이의 틈이 완전히 맞닿기 직전 멈춘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게 가까이 붙어 있어 무슨 비밀 얘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명훤이 뱉은 말은 아주 사소한 물음이었다.
“기분 안 좋아요?”
“…네? 뭐가요?”
“방금 나 들었는데.”
웃음기가 섞여 있는 목소리에 주언이 코끝을 찡그렸다.
“…뭐를요.”
“친해졌다고 씁쓸하게 말한 거요.”
“네?!”
주언이 펄쩍 뛰며 난색을 표했다. 한 박자 뒤늦게야 이렇게 과하게 행동하면 더 수상하게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놀라요?”
“그건….”
“이건 그냥 내 바람인데.”
“…….”
“친해졌다고 질투해요?”
주언이 화끈거리는 뺨을 쥐었다.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서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만 그의 손바닥 안에 놀아나는 것 같아서.
“주변에서 성격 능글맞다는 소리 자주 들어요?”
명훤은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멈칫했다. 두 사람이 갓 사귀기 시작했을 무렵, 같이 있는 걸 어색해하는 주언을 위해 전보다 말을 많이 했던 때가 떠올랐다.
침착해 보이는 척했지만, 내뱉는 말 대부분이 개소리였던 때.
갓 타오르기 시작한 감정이 혹여라도 꺼질까 봐 노심초사했던 때.
우습게도 그 순간과 지금이 겹쳐 보였다. 그때는 마냥 애가 달았었다. 주언이 생각했던 모습과 실제의 모습이 다를까 봐.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때가 훨씬 더 나았다. 지금의 주언에게 과거의 자신은 없으니까. 미숙했으나 찬란했던 감정들을 감당하는 건 남겨진 명훤의 몫이었다.
평생 감당해도 좋으니까, 도려내진 주언의 시간만큼 다시 자신을 채워 넣고 싶었다.
“아뇨.”
명훤이 씁쓸한 목소리에 주언이 미간을 좁혔다. 가슴께가 불편하게 뻐근해졌다.
“근데 왜….”
“예전에 딱 한 번 들어봤어요.”
자신한테만 그렇게 구냐고 물으면 너무 자의식 과잉인 건가 싶어 말끝을 흐리려다, 무의식적으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전에 이 말 했던 사람… 첫사랑이에요?”
“…….”
“…….”
그의 시선이 묘했다. 그저 며칠 전 봤던 인터뷰에 대한 내용이 떠올라 말했을 뿐이다. 이 대화를 통해 그를 상처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명훤은 마치 그의 말이 그를 깊게 할퀴기라도 한 듯이 우두커니 있었다. 마치 할 말을 잃어 방황하는 사람처럼.
그의 목울대가 느리게 움직였다. 주언은 이런 순간이 올 때마다 이상한 감각에 휩싸였다. 마치 자신의 한마디에 여명훤을 나락까지 끌어 내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묘한 감각.
“뭐 기억나서 하는 말이에요?”
그의 목덜미에 닿아 있던 시선이 서둘러 올라갔다.
“며칠 전에 우연히 기사를 봐서요.”
“아아… 기사….”
“첫사랑 있으시다면서요.”
첫사랑과 몸은 별개라 이건가? 기사에 솔직히 모든 걸 털어놓는 게 우습다는 것 정도는 안다. 다만 자신도 같이 놀아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더러운 것뿐이다. 그렇게 야하게 굴어놓고, 실상은 첫사랑 같은 풋내 나는 감정에 목매는 남자라니. 자신이 한없이 가벼운, 그저 밤 상대가 됐다는 게 확실시된 것 같아서.
주먹 쥔 손이 희게 질렸다.
“네.”
“…저랑 아는 사이예요, 그 사람?”
“네, 뭐.”
“저도 아는 사람이라고요?”
“…네.”
처음에는 명훤이 찾는 상대가 자신인 줄 알았는데, 정보를 얻으면 얻을수록 생각이 달라진다.
아는 사람.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는 건 명백히 다른 제삼자가 있어서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닌가?
계속 같은 생각에 얽매여 착각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이름이 특이해도 동명이인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이름에 연연하지 말고 생각해 보자.’
주언은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여명훤과의 대화에서 알아낸 것.
1. 명훤과 자신은 4년 넘게 연락한 적이 없다.
2. 기억을 되찾으면 자신이 여명훤을 싫어할 수 있다.
3. 자신이 가이드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4. 그의 애인과 자신이 아는 사이다.
숫자를 매겨가며 추론해보았음에도 여전히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혼란만 더 가중될 뿐이었다. 아무리 비밀 임상 시험이라도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면 연락을 취했을 거라는 가능성이 크다. 그와 관련된 물건은 하나도 없어서, 명훤과 아는 사이라는 걸 그와 마주한 후에야 알았다.
‘말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었더라도, 내 쪽에서 기억하고 싶었다면 물건이라도 남겨 뒀을 거야.’
하지만 주언은 명훤에 대한 그 어떤 흔적도 남겨놓지 않았다. 아주 간단한 문제를 빙빙 겉도는 것만 같았다.
주언이 턱을 짚으며 말을 멈추자 명훤이 주언의 손끝을 소심하게 붙잡았다. 손의 온기에 상념에서 퍼뜩 깨어나자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명훤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냥… 이것저것이요.”
엉킨 생각을 말로 할 수 없어 얼버무렸다.
“…혹시 질투해요?”
명훤이 조금 풀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커다란 덩치로 풀 죽어 봤자 하나도 안 불쌍해 보였다.
…아주 조금은 불쌍해 보이나?
아니, 생각보다 명훤은 불쌍해 보였다. 여기서 질투 안 한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없었다. 아예 안 했다고 말할 수 없기도 했다. 그의 말에 조금 뜨끔할 정도로 질투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제가 질투하길 바라는 것처럼 말하시네요.”
처음 말 걸었을 때와 달리 주언의 말투가 누그러진 것을 느꼈는지, 그가 손등으로 조심스럽게 주언의 뺨을 쓰다듬었다. 굴곡진 손가락으로 천천히 뺨을 쓰다듬던 그가 손을 떼는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가 고요한 시선으로 주언을 내려다보았다.
“질투하길 바란다고 하면 대답이 바뀌나요?”
“…글쎄요.”
가까이 서 있자 그의 몸에서 화약 냄새가 났다. 불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탄 듯한 냄새가 마치 내리쬐는 뙤약볕 같았다. 어두운 던전 안에서 빛나는 유일무이한 존재처럼 느껴져서 온 신경이 그에게로 향하는 거면 좋겠다.
“…애인….”
그렇지 않으면 더 곤란해질 테니까. 주언이 입술을 축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있으시잖아요.”
주언은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목소리 끝이 갈라져 나왔다.
“지금은 애인 아니에요.”
“…앞으로도 좋아하실 거라면서요.”
지끈.
주언에게 닿으려 했던 명훤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가 곧 거둬졌다. 가시 박힌 말이 살갗을 따끔하게 찔러왔다. 그 가시는 명훤을 깊숙이 찔렀다.
“…걔는 지금 다른 애인이 있거든요.”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으나, 한마디, 한마디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럼….”
주언이 명훤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마치 자신이 대체제라도 된다는 소리 같다고, 내가 생각하는 게 맞냐고 물어야 되는데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왜 말을 하려다가 말아요?”
알 수 없는 시선이다. 기대와 체념이 섞인 오묘한 시선.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걸까.
“궁금한 게 있었는데 이제 안 궁금해서요.”
“…….”
“…….”
“그럼 이제 내가 하나 질문해도 돼요?”
“…….”
주언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명훤은 주언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질문을 곧장 내뱉었다.
“주언 씨는 애인… 어디서 만났는지 같은 얘기.”
어느덧 명훤은 주언이 멀어진 만큼 가까이 다가섰다.
‘아까보다도 가까운 것 같은데….’
아까는 나란히 서 있었으면, 지금은 마주 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조금만 숙이면 얼굴이 닿을 거리였다.
“…왜 궁금한데요?”
대답 대신 비겁한 의문에 명훤이 입술을 달싹였을 때였다.
“저기 오빠!”
움찔.
“어, 어.”
“같이 보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수희가 조심스럽게 주언을 불렀다. 두 사람은 아이템을 획득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주언에게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말하며 방방 뛰었다.
“형, 빨리 와! 우와. 신기하다.”
“…갈게!”
주언은 그제야 겨우 명훤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난 주언 씨가 기억을 되찾고 저를 싫어한다고 해도, 주언 씨가 알고 싶다면 말할 준비됐어요.”
그러니까 도망치지 말라고 명훤은 말하고 있었다. 주언은 걸음을 재촉해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
이번에 간 던전은 경기도 외곽에 있는 던전이었기에, 차량을 지원받아 나왔다.
사람이 느는 게 귀찮다고 운전을 자처한 여명훤의 옆에는 주언이 앉아 있었다. 구영과 수희가 눈치를 줘서 어쩔 수 없었다. 괜히 어색해서 조수석에 앉고 싶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불편한 것도 알아서 그냥 자신이 앉았다.
덜컹.
비포장도로라 차가 덜컹거렸다. 뒷좌석에 앉은 수희와 구영은 각자 두 자리씩 차지하며 널브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