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62화 (62/112)

#62

“…주언 씨?”

명훤은 의문이 담긴 목소리로 주언의 이름을 불렀다. 주언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부담 주려는 건 아니었어요.”

명훤이 또다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부담스러워서 말을 잃은 게 아니었다. 아주 사소한 몸짓이 도화선이 되었다. 작게 붙은 불은 순식간에 화염이 되어 주언의 머리에 드리워져 있던 안개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아. 우리 여행갈까. 우리 여행 안 간 지도 오래됐고.’

‘주언아.’

자신이 누구의 이름을 부르는지 모호했으나, 이번에는 돌아오는 목소리가 선명했다. 자신의 이름을 한숨과 함께 부르는 목소리는 여명훤의 것이다.

“읏.”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갑작스럽게 주언이 이마를 짚으며 신음하자 명훤이 언제 자신이 괴로워했냐는 듯, 주언의 상태를 살폈다.

“갑자기 왜 그래요? 아픈 거예요?”

아픈 건 주언인데, 더 괴로워 보이는 건 명훤이었다.

명훤이 커다란 손으로 주언의 양 뺨을 쥐고 얼굴 전체를 살폈다.

“아뇨……. 괜찮아요.”

“멀미면 약 사올게요. 여기에 약국도 있다고 했으니까.”

“아니에요. 멀미.”

“병원에 갈까요?”

“아뇨.”

주언이 명훤의 손을 밀어낸 후,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식은땀이 맺혔으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토록 선명한 과거의 파편은 처음이었다.

“제가……. 그쪽한테 여행 가자고 한 적 있어요? 아주 예전에요.”

명훤도 그제야 두통이 어디서 기인한 건지 짐작 가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억… 나요?”

“그냥 단편적인 부분만요. 그래서 그런 적 있어요? 제가… 그런 말 한 적.”

“있어요.”

대답은 짧았다.

우리는 그 여행을 갔을까.

기억하는 그 목소리는 참 우습게도, 지금과 전혀 반대였다. 애달파 하는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었고 곤란하다는 목소리는 명훤의 것이었다.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때 못 갔던 여행 갈래요?”

가지 못했구나. 왜일까. 다른 의문이 따라붙었으나 묻지 못했다.

“언제요?”

“지금.”

“하하…….”

자신은 이해 못 할 농담인 줄 알아 웃었는데, 농담이 아닌 모양이었다. 주언이 웃음을 거두었다.

“설마 진심이세요?”

“가요, 여행.”

“이렇게 갑자기요? 애들도 있는데요?”

“주언 씨만 가겠다고 하면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어디에 갈 건데요.”

“어디든.”

여행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왜 과거의 자신은 여행에 절박해 했고, 지금의 당신은 여행에 연연해 할까.

“제가 앞뒤 상황 다 기억은 안 나는데요.”

뜬금없는 주언의 서두에 명훤은 침묵했다.

그사이에 또다시 불시에 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불쑥 떠올랐지만 낯설지 않았다. 지금 떠오른 생각이 아니라,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이다.

‘공적인 관계로 남자.’

“아마 예전에는 제가 가고 싶어 했었던 것 같았는데…….”

“…….”

“지금은 안 가고 싶어요.”

“시간이 안 되는 거라면 맞출 수 있어요.”

“사적인 사이… 아니었잖아요.”

아까와 다르게 지금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냉정하게 생각해 봤을 때 지금 모든 걸 다 내팽개치고 여행을 가자는 허무맹랑한 제안에 응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주언은 이성을 단단히 붙들었다.

“있잖아요. 난 처음에 그쪽이 내 애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얼굴로, 자신을 부르니까. 같이 있을수록 자신에게만 다른 사람과 확연히 다른 태도로 대했으니까.

주언이 고개를 저으며 차 문을 열었다.

달칵. 문을 열자, 차 안의 후덥지근한 공기에 달아오른 얼굴을 차가운 바람이 식혀 주었다. 한 발을 내디딘 주언이 멈춰 선 후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럴 리 없잖아요.”

“왜 그럴 리 없는데요?”

“만약 우리가 그런 사이였다고 쳐요. 그럼 제가 아플 때 그쪽은 뭐 하셨어요?”

우리는 언제 연락이 끊겨도 상관없었던, 그 정도의 관계였을 뿐이었을 테니까. 만약 연인이었다고 해도 최악이 아닌가.

“……주언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더 혼란스럽기만 할 뿐이니까.

주언이 할 말을 끝냈다는 듯 차에서 빠져나왔다.

달칵.

이대로 대화를 끝낼 수는 없었다. 명훤도 차에서 빠져나와 주언의 뒤에 바짝 섰다.

자신이 뒤에 있는 걸 알 텐데도 주언은 돌아보지 않았다. 명훤은 다급한 마음에 주언의 손목을 붙잡았다. 뜨거운 손이 얽히고 명훤이 애원하듯 속삭였다.

“무슨 기억이 났는데?”

희미한 목소리는 새벽 같았다. 새벽 사이로 햇빛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모든 위화감이 느껴지는, 알 수 없이 그리운 순간에 당신이 떠오른다. 그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

“무슨 기억이 났든, 내가 잘못했겠지. 그런데 주언아.”

“…….”

“내가 다 설명할게. 내 말만 믿어달라는 거 아니니까…….”

차라리 협박이라도 했으면 이렇게 기분이 싱숭생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처를 입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와 동시에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명훤이 차라리 말끝을 흐린 후에, 자신을 원망하는 말이 나오길 바랐다.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가 내리 앉은 기분이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주언은 도망칠 수 없었고, 명훤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의 과거를 네가 부정하지는 말아줘.”

“지금 안 듣고 싶어요.”

가끔 생각하지만 이 남자는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알려져 있는지 자각을 못 하는 것 같았다. 더 눈에 띄기 전에 잡힌 손목을 조용히 빼내려고 할 때였다.

“후우…….”

명훤의 손등 위에 얹은 손바닥에 찌릿한 기운이 느껴졌다. 기운이 심상찮았다. 거대하고 막연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이 감각이 이상하게도 아주 익숙했다. 손을 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째선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주언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도리어 명훤의 손목을 붙잡았다.

“주언아?”

이 뒤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았다. 묵직한 이 기운을 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큰 부담이었으나 이미 주언의 몸은 행동하고 있었다. 뜨겁고 일렁이고 뾰족한 기운이 표피 아래로 파고들었다. 농도 짙은 아지랑이가 혈관을 타고 심장까지 파고들 때까지.

“흐읏….”

갑자기 훅 밀려 들어오는 감각에 저절로 신음을 내뱉었다.

오랫동안 가이딩을 받지 않았고, 기억을 잃은 주언이 갑자기 다짜고짜 가이딩을 할 거라고 생각도 못 해서 명훤의 대응이 한발 늦었다.

탁! 명훤이 빠르게 주언의 손을 쳐냈으나 이미 명훤의 혼탁하고 무거운 기운은 주언에게 흘러들어 간 후였다.

때마침 걸어오고 있던 구영은 고구마 스틱과 핫바를 야무지게 양팔에 들고 있었다. 주언이 나온 걸 본 구영이 방금 했던 통화 내용을 줄줄이 읊어 주었다.

“형, 수거 팀에서 전화 왔는데 우리가 발견한 아이템. 저장 아이템이래. 그걸 쪼개서 저장 아이템 여러 개 만드는 건가 보더라.”

곰 인형이 생각났다. 명훤을 처음 보고, 그와 하룻밤을 보내고 주방에 있었을 때 식탁 위에 있던 곰 인형.

‘뜬금없이 왜 그게 생각나는 거지?’

둔중한 무언가가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앗.”

주언의 낮은 탄성과 동시에 명훤이 주언을 받쳐 안아 들었다. 그제야 주언은 자신의 몸이 쓰러지기 직전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몸 안에서 명훤의 기운이 피의 농도를 진득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형…! 갑자기…!”

명훤보다 뒤늦게 구영이 주언에게 달려갔다.

분명 완치됐는데, 완치 판정을 받은 이후에 쓰러지는 일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냥 조금 쉬면… 돼.”

말과 다르게 숨 쉬는 게 벅차 말할 때 색색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났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발끝으로 모든 힘이 쭉 빨려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곰 인형 혹시 저장 아이템이냐고 물어봐야 되는데….’

묻기 전, 주언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모든 게 바뀌어 있을 거라 강한 확신과 함께.

**

아무것도 없던 망망대해에 드리웠던 안개가 걷히자, 존재하는지 몰랐던 기억의 조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기억.’

주언은 그게 자신의 기억임을 알았다. 있는 힘껏 손을 뻗었다. 조금이라도 돌아오길 바랐다. 그리고 처음으로, 주언은 꿈에서 자신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막연하게 기억이 하나둘씩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으나 주언의 경우에는 아니었다. 억눌렸던 기억들은 기다렸다는 듯 앞다투어 터져 나왔다.

한 번에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생각이 빙글빙글 뇌리를 떠돌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생각은 곧 제자리를 찾아 자리 잡기 시작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전과는 다르게 기억의 조각이 제자리로 돌아갈 때마다 뚜렷한 과거의 그림을 그려냈다.

눈을 떴을 때,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랜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무거운 눈꺼풀을 깜박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곰 인형은 뭐였지….”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은,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었던 인형에 대해서였다. 단순히 곰 인형이 아니라 분명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곰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공백에 머물러 있었다.

뺨을 쓸자 건조한 피부 위로 뜨거운 눈물이 느껴졌다. 아직 혼란스럽기는 했으나 그 어느 때보다 심장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눈물을 닦은 손과 달리, 부자유한 다른 팔을 보자 링거가 꽂혀 있었다. 주언은 그제야 자신이 환자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창문을 바라봤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걸 보곤 밤이 됐음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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