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63화 (63/112)

#63

‘당연히 병원이겠구나.’

조금 뒤늦게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기억이 되돌아와서인지 쓰러졌던 때가 한참 전의 일처럼 느껴짐과 동시에, 그 반대로 임상 시험에 참여한 건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우리 사이에 4년이란 긴 공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옆에 놓인 자신의 핸드폰으로 서둘러 날짜를 확인하니 쓰러지고 나서 아직 하루가 완전히 지난 건 아니었다.

‘생각보다 오래 쓰러져 있던 건 아니구나.’

옆 의자에 명훤의 재킷을 발견한 주언이 손을 뻗었다. 병원까지 같이 와줬었구나. 남아 있지 않은 온기를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명훤이 옷….”

급하게 나갔는지 옷이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주언은 옷을 탈탈 털어 가지런히 개어, 의자 위에 올려두었다.

명훤이 참을 수 없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해야 할 일도 생각났다.

드르륵.

“형?”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 기숙사에서 주언의 옷가지를 챙겨온 구영이 문을 열었다.

“구영아.”

“언제 일어났어?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사람 앞에서 쓰러질 정도로 아팠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많이 걱정했었는지 구영이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아파서 쓰러진 거 아니야. 갑자기 어지러워서….”

“의사 부를게.”

주언의 변명에 구영이 아프지 않은데 어떻게 쓰러지냐며 불신의 눈빛을 보냈다.

“아니. 지금 부르지 말아줘. 그거 내 옷이지?”

주언이 벽에 붙어 있는 너스 콜을 누르려는 구영을 재빨리 저지하며 물었다.

“어. 그런데 지금 그 상태로 어디 가게?”

“응. 잠깐.”

구영이 엄한 눈으로 주언을 살폈다. 주언은 걱정 어린 얼굴로 봉투를 건네주는 구영에게 괜히 어깨에 힘을 주며 괜찮은 척을 해 보였다.

“일어난 건 언제 일어났는데.”

“방금 일어났어.”

“방금 일어났는데 어디 가려고? 몸 상태도 안 좋잖아.”

“이제 괜찮아졌어.”

주언의 일관적인 태도에 구영이 이마를 짚으며 옆 간이 의자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구영은 일어나자마자 나가려는 주언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 있다면 구영이 모를 리 없었다. 굳이 나가는 걸 포기할 수 없다면 구영은 주언의 뒤를 따라갈 심산이었다. 어디 가서 또 쓰러질지 모르니까. 만약 혼자 나갔다가 쓰러진다면……. 걱정되는 건 둘째 치고 자신의 안위에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다.

“…환자복 차림으로 어디를 그렇게 가려고 하는 건데? 같이 가줘?”

주언은 병원 슬리퍼를 신고 그냥 나가려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아니. 진짜 잠깐 어디 들렀다가 돌아올 거야.”

옷을 받아 든 주언이 환자복 단추를 급하게 풀어 내렸다. 옷을 어깨에 걸치고 쇼핑백을 뒤적이려는데 뒤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어?”

“그렇다고 갑자기… 옷 벗으면 어떡해.”

뼈대가 얇고 흰 피부는 손바닥으로 쓸면 조금 건조해 보일 것 같지만, 피부의 질감은 부드러워 보였다. 도드라진 쇄골 아래까지 시선을 내리던 구영이 얼굴을 붉히며 손바닥으로 스스로의 눈을 가렸다.

“같은 방 쓰는데 어때.”

주언이 대수롭지 않게 윗옷을 갈아입고, 바지를 반쯤 내렸을 때 구영은 화장실에 가야겠다며 허둥지둥 화장실 문을 열었다.

주언은 구영을 단순한 동생으로 생각했고, 구영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아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다만 때때로 땀을 흘려 뺨이 상기되고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었을 때나, 애인과 균열이 생기면 자신을 의지할 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어쩔 수 없이 주언의 윤곽이, 떨리는 속눈썹이 구영을 자극했다.

드르륵.

“옷 다 갈아입었어?”

화장실 문을 반쯤 연 구영이 물었다.

“응.”

주언의 대답에 구영이 그제야 화장실에서 나왔다. 주언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구영이 변명하듯 말했다.

“……형은 형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찬물로 세수해서 구영의 뺨이 희게 질려 있었다.

주언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퍼뜩 생각난 예전의 기억에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 윤재와 같은 방을 쓸 때 비슷한 일이 있었다

“며칠은 더 입원해서 치료받는 게 좋다던데. 지금 간호사 부를게.”

“아니. 안 그래도 돼.”

“형. 쓰러졌었어.”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다녀와서 검진받을게. 그… 감독관님은?”

묘하게 어색한 말투였지만 구영은 그 미세한 차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여명훤의 이야기가 나오자 구영은 잔열까지 싹 빠져나간 얼굴로 답했다.

“감독관님 내내 여기 있다가 아까 급한 일 있으시다고 잠깐 가셨어. 금방 오실 텐데.”

“그래?”

주언은 후드를 챙겨 입고 신발을 갈아신었다.

“아, 그리고 방금 형 보호자한테 전화했는데 연락을 안 받아.”

“안 해도 돼.”

신발 끈을 꽉 묶은 주언이 숙였던 몸을 곧추세우며 대답했다.

자신과 윤재는 누가 봐도 이상한 관계였으나 주언은 기억이 없는 탓인지, 그 관계를 지지부진하게 이어왔다. 중간에 시간을 갖자는 뉘앙스로 얘기하긴 했지만, 서로 암묵적으로 없던 일 취급했다.

그 뒤로 제대로 만난 적이 없어서 더더욱 어떻게든 갚아나가겠다고 했던 주언도, 그런 걸 바라지 않는다고 했던 윤재도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

“지금 보러 갈 거야.”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얼마나 바쁘든 윤재는 당장 주언에게 해명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 주언은 오늘에야말로 기필코 윤재의 해명을 들을 생각이었다. 더 이상 도망치는 건 사양이었으므로.

**

쌀쌀한 밤바람이 주언의 뺨을 스쳤다. 본사에서 나오는 주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언제든 찾아가면 바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주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윤재는 본사 연구실에 없었다.

‘3일 동안 휴가 내셨는데요? 성함이랑 번호 남겨주시면 나중에 따로 연락드릴게요.’

너무 바빠서 연구실에서 나올 시간도 없다던 말은 다 거짓말이었다.

속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아도 이 열은 도저히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이 거짓말이었다. 혼자 애끓고, 죄책감에 시달렸던 모든 시간을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아마 명훤이 자신을 찾고 있을 것이다. 윤재의 말에 거짓이 없는 부분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과거가 기억나서 보고 싶은 것과 별개로 현실은 너무도 차가웠다.

‘공적인 관계로 남자.’

주언은 떠오른 마지막 기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만 해도 눈가가 뜨겁다. 이제는 과거의 일이지만 막 기억을 되찾은 주언은 그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졌다.

1지구에 자신을 기다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것. 그것만이 진실이었다.

헤어지자던 서늘한 명훤의 목소리에 숨이 턱 막혔다.

Rrrr.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기도 전에 전화를 하는 사람이 누구일지 쉽게 짐작 갔다.

여명훤.

짐작대로 화면 안에 보이는 이름에 주언이 쓰게 웃었다. 명훤은 주언이 그를 미워할 거라고 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데 이제야 왜 여명훤이 계속 신경 쓰였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아서 덮어놓았던 감정이 드러났을 뿐이다. 먼지가 쌓여 있던 케케묵은 감정은 순식간에 제 색을 되찾았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어.”

혼잣말이 바람을 타고 허공에 흩어졌다.

길게 이어지던 전화 소리가 끊겼다. 주언은 전화를 받는 대신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 쑤셔 넣었다.

명훤이 이제야 잘해주는 이유가 죄책감에 기인한 거라는 생각에 아득해질 뿐이었다. 동정이라도 좋아했던 자신이 너무 비참해서 눈물이 조금 났다.

**

띠띠띠띠-

윤재가 어디에 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2지구에 가는 마지막 기차를 타고 주언은 두 사람이 살던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주언을 가장 먼저 반긴 건 지독한 술 냄새였다.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캄캄한 복도를 걸었다. 커튼이 쳐져 있지 않아, 달이 비춰 불이 켜져 있지 않아도 거실은 훤히 보였다.

소파 앞 테이블에 윤재가 엎드려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윤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 주언이다.”

한참 고민했다. 만나자마자 윤재를 원망하고 싶었다. 아무리 명훤이 자신과 헤어졌다고 해도, 주언은 명훤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따져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속이 답답했다.

하지만 주언은 윤재를 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자지 못했는지 충혈된 눈이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거무스름한 턱을 보았다.

주언이 아는 윤재는 항상 깔끔했다. 생활도, 습관도 군더더기 없이 정석적인 엘리트다웠다. 술을 마셔도 취할 때까지 마신 적 없고, 아무리 바빠도 청소나 씻는 걸 미룬 적 없었다.

“왜 이렇게 술을 마셨어.”

주언은 윤재의 손에 잡혀 있는 와인 병을 빼면서 물었다.

“그냥……. 마시고 싶어서.”

보상받을 수 없는 지난 시간이 아쉬워서 미칠 것 같은 건 나인데.

주언이 와인 병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만 마셔.”

“조금만 더 마실게.”

“…….”

“너도 마실래?”

“아니.”

막을 새도 없이 윤재가 새로운 와인 병을 깠다. 왜 이렇게 망가진 사람처럼 널브러져 있는 걸까. 화조차 제대로 낼 수 없게. 주언은 주방에서 봉투를 챙겨와 빈 병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얼마나 마신 거야. 술 잘 마시지도 못하잖아. 휴가 내내 이러고 있었어?”

윤재는 한참 말이 없었다. 주언도 윤재를 채근하지 않았다.

“왜 돌아왔어?”

“…….”

“나 여기에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주언아. 왜 이럴 때 나를 찾아와. 이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윤재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윤재는 주언을 원망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 어떻게 할지 정하지 못했고, 모든 큰 흐름은 명훤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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