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처음으로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을 직면하게 되어 진창에 처박힌 기분이 들었다. 왜 하필 구렁텅이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을 때 주언이 구원처럼 나타나는 걸까.
내 구원자는 너뿐인데, 네가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라서, 그게 내가 아니라서.
“우리 잘까.”
윤재가 주언의 손목을 휘감으며 물었다. 낮아진 목소리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주언의 몸에 솜털이 곤두섰다. 윤재의 말이 단순히 잠을 자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할 정도로 어리지 않았으니까. 손목을 휘감은 손가락이 노골적인 뜻을 담고 주언의 손목을 느른하게 쓸었다.
윤재답지 않은 민망하고 노골적인 제안에 주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렇게 싫어?”
주언의 반응을 코앞에서 본 윤재가 쓴 물을 삼켰다. 연인 사이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다. 4년의 시간 동안, 같이 살기까지 한 1년 동안 주언은 단 한 번도 윤재를 성적인 상대로 본 적 없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
“우리 사귄 지도 오래됐는데.”
주언이 말없이 윤재의 손을 떼어냈다.
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게 된 것들이 생겼다. 윤재는 지금 자신을 떠보고 있었다. 윤재의 제안에 육체적으로 거부 반응이 일어난 것도 있지만, 기억을 찾았는지 가늠하는 윤재의 시선이 더 불쾌했다.
“닿는 것조차도 싫어하면 나 상처받는데.”
주언의 표정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윤재가 뇌까렸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
윤재의 어깨가 들썩였다. 웃음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모호한 소리가 났다.
“하. 주언아. 넌 네가 얼마나 잔인한지 모르지.”
주언은 윤재의 책망에 잠시 말을 잃었다. 머리로는 윤재의 감정이 이해가 갔다. 원망할 수도 있다. 자신이 늘 무결하게 행동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지금 그 얘기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기억을 찾기 전, 이런 말을 들었으면 배은망덕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어 밤잠을 뜬눈으로 지새웠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에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탓하며 몰아붙였겠지. 그런 주언의 성격을 윤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철저히 계산된 행동은 아니겠지만, 오랜 시간 축적되어 주언이 안쓰러움을 느끼는 포인트를 노리고 나온 말임을 알았다.
그래서 안쓰러움이 느껴지는 윤재의 말에 안타까움이나 죄책감 대신 화가 났다.
당장에라도 우리가 언제 사귀었냐고, 교제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은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주언은 살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지금 나까지 감정적으로 나서봤자 좋을 것 없어.’
감정이 태도가 돼서는 안 된다. 취한 사람이 있으니 한 명이라도 이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주언은 금방 진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4년의 시간은 길었다. 우리는 이 4년을 제대로 매듭지을 필요가 있었다. 감정을 다 털어놓는 게 능사는 아니다. 그러기엔 우리 둘 사이에 쌓아온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왜 술을 이렇게 마셨어. 너답지 않게.”
그래서 주언은 잔인하다는 윤재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물어보니까 너 휴가 냈대서, 여기에 있을 거 같더라. 혹시 나 일부러 피한 거야?”
“전화 한 통도 안 했던 게 누군데. 왜 갑자기 날 찾아오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몽롱한 정신을 이길 수 없는지 윤재의 몸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너한테 할 말 있다고 했잖아.”
주언의 말에 윤재가 비죽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아. 할 말.”
“…….”
윤재가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무슨 말을 할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구나. 주언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윤재는 주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지금 별로 대화하고 싶은 기분 아닌데……. 나중에 얘기하자.”
“…그래. 지금 너 많이 취했다.”
주언의 수긍에 윤재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아니 안 취했어.”
“…….”
“나만 기다리는 게 싫을 뿐이지.”
허상이 현실이 되길 기다렸던 윤재의 마음은 버석거리며 금이 간 지 오래였다. 어느 순간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는 걸 알았지만,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자신만을 보는 주언의 오롯한 시선은 그 어떤 것보다 중독적이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기다림은 조금 전을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윤재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지칠 정도로 몰아붙인 걸까.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윤재의 기다림은 보답 받을 수 없는데. 그 사실을 윤재도 모르지 않았을 텐데….
“기다리지 말지 그랬어…….”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여과 없이 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하….”
주언의 말에 윤재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성적으로 윤재도 알았던 사실을, 주언이 꼬집자 상상 이상으로 타격이 컸다.
“너 진짜 잔인한 소리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주언은 술을 너무 마셔서 따끈따끈해진 윤재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윤재는 많은 걸 속였고, 대부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희미하게 떨리는 손끝에 담긴 감정 같은 것들.
“……윤재야.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하지만 동정을 다른 감정인 척 포장할 수 있는 시간은 지났다. 지금 주언이 윤재에게 줄 수 있는 건 정말 마지막으로 윤재에게 기회를 주는 것뿐이었다.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지만, 윤재가 여기서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그래도 훗날에는 용서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너는……?”
“뭐?”
“너는 나한테 할 말 없어?”
윤재는 도리어 주언에게 질문을 해왔다. 사랑하게 될 줄 알았지만, 종내에는 사랑하지 못한 주언에게 더 큰 잘못이 있다는 듯이.
“나한테서 듣고 싶은 말이 뭔데?”
두 사람의 시선이 오갔다. 먼저 입을 뗀 건 윤재였다. 술에 취해 충혈된 눈이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여명훤 언제부터 나 몰래 만났어?”
필사적으로 숨기려던 자신을 두 사람이 비웃는다는 상상만 해도 속이 뒤틀렸다. 주언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주언은 한 번도 윤재에게 명훤과 엮인 걸 말한 적 없었다. 실수로라도 말하지 않도록 더 조심했던 일이었다.
“너, 나 뒷조사했니?”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어차피 의심받을 거였으면, 차라리 그럴 걸 그랬어.”
“……아니구나.”
주언이 자신의 생각이 과했다는 걸 인정하며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어떻게 알게 되었냐는 의문은 바로 뒤에 따져오는 윤재의 말에서 알 수 있었다.
“내가 너한테 전화 걸었을 때, 나 건너편에 있었어.”
“……아.”
불과 며칠 전 일이라 어렵지 않게 그 순간을 기억해냈다. 그 이후로 통화했을 때 스스로의 감정을 추스르느라 벅차서 윤재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건.”
윤재가 머리를 손으로 싸맸다. 주언이 윤재의 옆, 소파 끄트머리에 앉았다.
“뒤에서 만나다니. 그런 거 아니야. 사정이 있어서…….”
“여명훤이 뭐래?”
윤재는 주언의 말허리를 끊고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술 취한 사람에게 해명을 하려고 하다니.
“나중에 얘기하자.”
주언의 말에 도화선에 불을 붙였는지, 윤재가 한껏 비아냥거렸다.
“왜 이제 나한테 해명할 생각도 없어?”
“지금 너 취해서 대화가 안 되잖아.”
윤재가 말 대신 주언의 팔을 강한 힘으로 끌어당겼다. 주언이 균형이 무너진 틈을 타, 술에 취한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윤재가 주언의 위에 올라탔다.
“그럼 대화 말고 다른 거 하면 되겠네.”
노골적인 욕망에 주언이 발버둥 쳤다.
“비켜. 우리 이러지 말자.”
애원하듯 나온 말은 진심이었다. 윤재의 밑바닥을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어차피 끝은 보였다. 여기서 밑바닥을 보이는 건 그나마 잘 끝맺을 수 있는 순간에 흙탕물을 끼얹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나한테 은혜 갚는다며. 몸으로는 안 돼?”
윤재가 반항하는 주언의 팔을 제압하듯 낚아챘다. 낚아챈 팔에 윤재의 떨리는 입술이 닿았다. 형편없이 떨리는 입술이 조금 전 떨리던 손끝을 상기시켰다.
“너 내일 술 깨면 후회할 거야.”
윤재의 손이 멈칫했다.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알았다. 근래 윤재의 매일은 후회뿐이었다. 하지만 돌아가도 똑같이 할 후회뿐이기도 했다.
“어. 후회하겠지.”
“그럼…!”
“그런데 너는 내가 후회할 짓을 안 해도 곁에 있진 않을 테니까.”
두 사람의 몸이 맞물렸다. 그제야 겁이 들었다. 어쩌면 오늘로 끝일지도 몰랐다. 미련하다는 걸 알았다. 윤재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도.
“…아직 늦지 않았어.”
“…….”
“원래대로 돌아가자.”
주언이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원래대로 돌아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지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을 기다려서라도 윤재와 다시 친구로 지내고 싶었다.
“윤재야. 난……. 너한테 가장 먼저 들으려고 내내 기다렸어.”
“…….”
“그 정도로는 너를 아끼고 생각하고 있어.”
거짓말을 해서 이 순간을 모면할 수는 있겠지만, 주언은 가장 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윤재에게는 턱없이 부족할지는 모르겠지만.
“여명훤이랑… 아무 얘기 안 했다고?”
“…그냥 공적인 일로 같이 있던 거야.”
여명훤과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했는지, 윤재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럼 왜 온 건데?”
우연히 보러 갔는데, 없어서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닐 거 아니야.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주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