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이제 돌려 말하고, 중요한 걸 묻지 않고 넘어가는 건 질렸다. 주언은 돌려 말하는 대신 곧장 본론을 입에 담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윤재를 마지막까지 놓지 못하는 자신의 미련 때문이었다. 한때라도 우리의 관계가 진실했다는 걸 증명받고 싶었다.
“나랑 여명훤. 사귀었어?”
“뭐? 방금….”
노골적인 의심이 윤재의 얼굴을 스쳤다. 주언은 윤재의 말이 채 끝나기 전,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들은 거 아니고 기억났어.”
주언의 말에 윤재의 눈이 크게 뜨였다. 긴장했던 게 허무해질 정도로 순식간에 주언의 팔을 억누른 손에 힘이 빠졌다.
윤재도 주언의 기억이 언젠간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혹시 몰라 1지구에 못 가게 한 것도, 명훤과 만나지 않길 바랐던 것도 기억을 회복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퍽!
주언은 때를 놓치지 않고 윤재의 가슴팍을 힘껏 밀쳐 그의 아래에서 벗어났다. 주언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윤재를 노려보았다. 복도 쪽까지 간 주언을 본 윤재가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까지 기억났는데?”
주언은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할 생각조차 못 하고 윤재를 노려보았다.
“내가 말하면, 그거에 맞춰서 말해주려고?”
주언은 화를 내지 않았다. 항상 주언은 참았다.
자신의 거짓말로 빚어진 주언의 죄책감은 윤재를 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부당한 죄책감을 모른 척했다.
불신에 가득 찬 목소리에 뇌를 차가운 물에 씻기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차게 식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이 상황까지 직면했으면서도 윤재는 나갈 길을 모색했다.
“사귀었던 거니까, 과거니까 말 안 했어. 그래. 사귀었었어. 그런데 헤어지고 네가 내 집에 짐 들고 찾아왔어.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너 아플 때 헤어진 거였으니까.”
“…….”
“그런 이유로 나 버리지 마. 주언아. 여명훤 너 아플 때, 너 버렸어.”
묵직하게 주언에게 꽂히는 무자비한 말에 주언이 고개를 떨궜다.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내가 아니고, 여명훤이야.”
“네 말을 어떻게 다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
주언의 말에 윤재는 주언의 기억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여명훤이 너랑 그렇게 죽고 못 살았으면, 어떻게 너한테 여명훤과 관련된 물건이 하나도 없었겠어.”
윤재가 두 사람은 이미 끝난 사이라고 못 박았다. 이 순간을 언젠간 또다시 후회할 걸 알았다. 사실을 알면 주언은 자신을 피할 것이 자명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또다시 돌아가서 선택한다고 해도, 난 같은 선택을 할 테니까.’
애초에 친구로 되돌아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
명훤은 다소 거친 걸음걸이로 복도를 걸었다. 복도는 사람을 모두 물려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고가의 미술품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벽에 걸려 있었다. 이 벽만으로도 이 복도의 주인이 얼마나 강박적으로 완벽함을 추구하는지 엿볼 수 있었다.
긴 복도 끝에 도착한 명훤이 잠시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은 걸 보면 주언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가 안 좋은 건 아니겠지.’
초조함에 미간을 좁혔다. 이대로 몸을 틀어 주언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주언을 병원에 혼자 두고 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지웅의 호출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는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요 몇 개월 동안 자신의 성급한 행동으로 의심의 여지가 될만한 행적을 깨끗이 지우지 못했다. 여지웅의 정신이 모두 다른 곳에 있어서 들키지 않은 것뿐이다.
‘어쩌면 이미 알고 부른 걸 수도 있겠지.’
이럴 때 아쉬워 보이는 모습을 들키는 순간 허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명훤이 이제껏 여지웅의 개처럼 살아온 건, 모든 걸 자포자기해서가 아니었다. 아주 실낱같은 가능성이지만 여지웅이 주언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을까 싶어서였고, 그리고 만약 돌아오기만 한다면 다시는 놓고 싶지 않아서였다.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똑똑.
“여명훤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무감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들어와.”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지는 목소리에 명훤은 문을 열었다. 푹신한 카펫을 밟자 여지웅이 보였다. 명훤은 고개를 작게 까닥하며 인사했다. 지웅의 맞은편에 앉은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명훤이 들어오자 상대가 몸을 틀어 명훤을 반겼다.
“시간에 딱 맞춰 왔네.”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인사하는 사람은 이호윤이었다.
몇 번이고 확인했다. 이호윤이 자신을 통제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여지웅이 연결고리를 끊은 것을.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왜. 난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새침하게 눈을 흘긴 이호윤을 보며 여지웅은 예전 일은 없는 일인 것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왜 안 되겠니. 곧 같은 식구가 될 사이인데.”
“…그게 무슨 소리이십니까.”
한때 이호윤을 동정했던 적도 있었다. 여한올과 마찬가지로 인위적으로 S급까지 강제로 끌어올려진 가이드. L 그룹의 차남이라는 타이틀 뒤에 숨겨진 이면을 알았다. 그저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수단. 여한올이 그래서 어떻게 망가졌고, 도망쳤는지 알고 있으니까.
자신과 엮기 위해서 만들어진 S급 가이드는, 자신이 없으면 쓸모를 다해 폐기되리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처음 이호윤을 공격 1팀에 넣었을 때부터 여지웅은 명훤이 아예 무시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을 터였다.
구렁이가 똬리 튼 속내를 가진 여지웅은 항상 명훤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의 개새끼였다.
“우리 슬슬 각인해야지.”
하지만 그것도 주언이 사라지기 전까지였다. 그 이후에 명훤은 이호윤을 버렸고, 그로 인해 이호윤이 여지웅에게 버려졌다는 걸 확인했다.
그런데 왜 다시 이호윤이 돌아온 건가. 또 뒤에서 무슨 개 짓거리를 한 건가 싶었다.
“뭐?”
“네가 가이딩을 거절해서 이제껏 미뤄왔으면 된 거 아니냐.”
여지웅이 차를 마시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런 얘기는 하지 않기로 처음에 말씀드렸을 텐데요.”
“이제 의미 없는 반항은 그만둘 때도 됐다.”
이제껏 여명훤의 처절한 시간이 의미 없는 반항으로 가볍게 포장됐다.
“이제 진짜 서로의 보호자가 될 거니까 앞으로 편하겠다. 그지?”
이호윤이 이제껏 무시당했던 일을 보상받아 기쁜지 샐쭉 웃었다. 그와 동시에 명훤의 속을 긁으려는 의도가 훤히 보였다.
“……이번 총회 때문입니까.”
명훤의 말에 여지웅이 혀를 차며 미간을 좁혔다.
“그래. 상황이 안 좋게 됐다. 특수능력 국제법을 제정할 확률이 아주 높다더구나.”
“그럼…….”
“막으려고 했지만 그것까진 무리인 듯해서 L 기업과 협의를 봤다.”
협의. 그제야 명훤은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이해했다. 이번 의제에 여지웅은 분명 특수능력 국제법을 통일하지 않아도 국제 안전 유지를 위한 조치를 충분히 취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세울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L 기업과 협의하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사기업 길드를 L 기업이 나서서 만들 생각인가 보군요.”
국제연합총회가 나선 만큼 법이 제정되는 걸 막는 건 어려우니. 겉으로는 사기업 길드를 만드는 데 찬성하겠다는 뜻이다.
괜히 반대해서 지지를 잃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겉만 사기업 길드라고 하고 전과 다름없이 팀을 꾸리면 된다.
“네게 길드장을 맡긴다고 하더군. 이미 인원은 다 정해졌어.”
“하지만…….”
“큼.”
여지웅은 더 반박은 안 받겠다는 듯 헛기침을 하며 여명훤의 말허리를 잘라냈다.
“그래. 요즘 바빴잖아. 팀 이전하면 지금보다는 덜 바쁠 거야.”
이건 협박이었다. 이호윤은 같은 팀이었으니까, 명훤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리를 비우는 일이 훨씬 잦아진 것에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호윤은 명훤이 그 사실을 여지웅이 모르길 바란다는 것까지 눈치채고 있었다.
지금 명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주언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명훤은 여기서 더 말을 해봤자 결론은 뒤집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서 나올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
밤이 늦었고, 달리 갈 곳도 없어 주언은 꼬박 날밤을 새웠다.
달칵. 문이 열리고 윤재가 침실에서 나오다가 겉옷까지 챙겨입은 주언과 마주쳤다.
“…주언아. 어제 일은… 지금 가게?”
“아니. 밖에 나갔다 온 거야.”
“어디?”
술에서 완전히 깬 윤재가 쭈뼛거리며 주언의 옆에 다가섰다. 주언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자 가까이 다가오던 윤재가 멈칫했다.
“……냉장고에 먹을 게 없어서 음식 포장하러.”
주언이 묵직한 비닐봉지를 식탁 위에 올려놓자, 윤재가 조금 떨어진 그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제 일은 미안해.”
“이거 먹어. 너 해장하라고 사 왔어.”
“너는?”
“나는 입맛이 없어서.”
윤재가 아주 조심스럽게 주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 고마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윤재가 부산스럽게 봉지를 바스락거리며 안에 든 음식을 꺼냈다.
“잘 먹을게.”
“…난 이만 가볼게.”
멈칫.
“나 방금 정신 차렸어. 우리 밥 먹고 얘기하자.”
“윤재야. 시간이 지나도 내가 할 말은 변함없을 거야. 우리…….”
주언이 어렵게 입을 뗐으나, 윤재가 더 빨랐다.
“과거 기억이 갑자기 돌아와서 감정이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 거잖아.”
윤재가 얼마나 주언에게 헌신했는지 알았다.
“기억이 거의 다 돌아왔다고 해도, 임상 시험 들어가기 전 기억까지는 확실하지 않은 거 알아. 만약 우리가 사귀었다면 그때였겠지.”
“…….”
“네가 말한 사실에 거짓이 하나도 없다면.”
윤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여기서 이 사실까지 말한다면 자신을 등지고 가는 주언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꼴사납고, 추잡하지만 주언이 제 곁에 있는다면 윤재는 얼마든지 더 추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