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66화 (66/112)

#66

“우주언.”

“의심하게 만든 건 너야.”

평소와 다르게 주언은 흔들림 없이 말했다. 없는 감정이 아무리 노력하고 헌신한다고 해도 생겨나진 않는 법이다.

“우리 대화하면서… 풀자.”

“난 너한테 해명할 기회 많이 줬어.”

“…….”

“그러니까 지금 내 말 끝까지 들어줘.”

“…….”

관계의 끝이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유독 입맛이 썼다.

“그때 기억이 완전히 나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깨달은 사실이 있어. 그때 내 감정이 사랑까지는 아니었다는 거.”

명훤 하나만을 담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마음은 여전하니까. 윤재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으나, 주언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

“그래서 만약 내가 너에게 어떤 희망을 줬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면 정말 미안해.”

윤재가 순간 비틀거렸다. 잡으려고 했던 손이 무색하게. 윤재가 테이블 위에 손을 짚었다.

“주언아. 우리 이 얘기 나중에….”

“나 아직 말 안 끝났어. 미안해. 미안한데 여기서 더 끄는 게 너한테 더 잔인한 거 같아.”

미루고 미뤘던 말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말을 후회할 수도 있겠지. 배은망덕하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었다. 한번 감정을 터놓으니 더 이상 이 상태로 지지부진하게 있을 수 없었다.

윤재는 한참 침묵 끝에 말했다.

“……나한테 시간을 조금만 줘.”

주언에게 있어서 이 관계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풀리지 않을 것같이 얽히고설켰던 매듭. 그 매듭을 푸는 방법은 풀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그 매듭을 칼로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래.”

그리고 주언은 드디어 그 매듭을 잘라냈다. 열심히 풀려고 노력했지만, 매듭은 더 복잡하게 꼬이기만 했다. 풀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 매듭에 미련할 정도로 매달렸지만. 이제는 그렇게 해서는 풀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나, 너한테 줄 거 있었는데….”

“괜찮아.”

“그건 가져가. 너 가이딩 하기 힘들 때 상대한테 쓰는 거니까. 내가 가지고 있어 봤자 쓸모도 없는 거야.”

“…고마워.”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주언은 윤재가 억지로 안겨준 약통까지는 거절하지 못했다.

“주언아.”

윤재가 어렵게 주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붙잡기 위해 나온 말이지만, 주언은 그런 윤재의 바람에 응하는 대신 작별인사를 고했다. 여기서 붙잡힌다면 괜한 희망 고문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매몰차 보이겠지만, 지금 바로 떠나는 게 가장 나았다.

“나 그럼 갈게.”

윤재에게는 미안하지만, 명훤이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다.

누가 들으면 바보라고 욕할지도 몰랐다.

기억을 잃었을 때도, 대차게 차였던 기억이 되돌아온 후에도 세월이 무색하게 여명훤에게만 반응하는 꼴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으니까.

눈을 뜬 순간부터 명훤이 주언을 가득 채웠다. 유치한 생각이지만, 지금 모든 순간은 명훤에게 다시 닿기 위한 과정처럼 느껴졌다.

“김칫국인 건 아니겠지.”

헤어진 사이지만. 어쩌면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명훤도 어쩌면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조금 더 어른이 됐으니까 전보다 성숙한 연애를 하지 않을까.

명훤의 얘기는 제대로 듣지 못했으나, 이제껏 명훤이 자신에게 보여준 태도에 담긴 뜻을 모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함께했으니까 오히려 필요했던 시간이었을 거야.”

떨어져 있던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어쩌면 떨어져 있던 시간이 양분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주언은 애써 좋게 생각하며 초조함을 덜어내려 애썼다.

헤어지자고 말하던 명훤에게 상처를 안 받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이제껏 억눌렀던 감정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되자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10시 30분 기차.”

주언은 이제 겨우 10시를 넘은 시계를 보았다. 1지구에 가는 기차가 방금 떠나 30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윤재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서 되돌아가고 싶었다. 기차역 플랫폼 앞에 선 주언은 초조하게 한쪽 발로 바닥을 규칙적으로 차며 기차를 재촉하듯 기다렸다. 마음이 급하다고 한들 정해져 오는 기차가 더 빨리 오는 것도 아닌데.

“전화는 왜 안 받아…….”

주언이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다시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다.

구영에게는 아침 일찍 막차가 끊겨 피치 못하게 돌아가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금방 온다 해놓고 안 와서 이미 명훤을 만난 줄 알았다고 말한 구영이 곧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형 진짜… 감독관님도 금방 돌아온다고 하고 안 돌아오셔서 만난 줄 알았는데….

‘미안.’

-만약 형 돌아오기 전에 감독관님 돌아오시면 어떡하지… 제대로 보살피고 있으라고 당부하고 가셨는데…….

‘내가 전화해서 미리 설명해둘게.’

명훤이 어떤 얼굴로 그런 말을 했을지 이제는 너무나 상상 가서 웃음이 나왔다. 기차에 타기 전 다시 한번 명훤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냥 전화로는 구영이 혼내지 말라고만 말하고… 다른 건 만나면 얘기하는 게 낫겠지.’

짧은 찰나에 무슨 대화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주변에 소음이 모두 사라지고, 통화음만이 크게 들렸다. 하지만 통화음만이 몇 번이고 이어질 뿐이었다.

-고객님의 전화가 꺼져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오며,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뚜. 뚜. 뚜. 뚜.

기계적인 음성 멘트가 끝나고, 통화가 완전히 끊길 때까지 주언은 핸드폰을 귀에서 떼지 못했다.

왜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는 거지?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었다. 주언에게는 공격 1팀 스케줄을 열람할 권한이 없어서 짐작만 할 뿐이었다.

‘……예전에는 어디에 있는지 짐작하기 쉬웠는데.’

헤어지기 전까지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주언은 명훤을 몰랐다. 하물며 지금의 그는 그때의 명훤보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였다. 기차에 탄 주언은 가방을 꽉 껴안았다.

-기차가 곧 출발합니다.

몇 번의 안내 끝에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언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헤어진 사이인데, 왜 자신에게 이토록 잘해주는 건지 명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몇 년 동안 자신을 그리워했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안겨서 사과하라고 욕도 해주고 싶었다.

기차 밖을 쳐다보자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풍경이 빠르게 바뀌는데도 더 빨리 가지 못해 초조함이 느껴졌다.

**

1지구에 도착한 주언은 달리듯 플랫폼을 빠져나갔다. 내리기 직전에 전화했으나 명훤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주언은 그제야 늘 명훤이 먼저 찾아와서 그를 찾을 필요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형. 오늘 던전 가는 거 못 오지?

‘아니. 갈게. 지금 올라가는 중이야.’

-무리할 필요 없다는데?

‘아냐. 갈게. 톡으로 주소 남겨줘.’

때마침 다행히도 확인 차 연락 온 구영 덕분에 주언은 기차에 내리기 전 어디로 갈지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주언답지 않게 너무 서둘러서 실수로 앞에 가던 사람의 어깨를 칠 정도였다.

“앞 좀 보고 다니세요.”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주언은 걸음을 멈추는 대신, 속도를 늦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드디어 본다. 주언의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근래 들어서는 거의 매일같이 가는 던전에 가는 길이 유독 긴장됐다. 마지막에 기억이 돌아와 혼란해진 감정을 틈타 내뱉었던 말들을 번복하고 싶었다.

“오랜만이에요!”

“…감독관님.”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약속 장소에서 주언을 반긴 건 처음 감독관을 맡았던 정선우였다. 정선우의 밝은 인사에 주언이 어정쩡하게 굳은 얼굴로 먼저 도착한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오셨어요?”

수희의 말에 주언이 뒤늦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얘기는 들었어요.”

“네.”

주언의 끄덕임에 정선우가 화색을 띠었다.

“그럼 일단 바로 갈까요? 저도 요즘 실력 엄청 늘었거든요.”

의욕이 넘치다 못해 하늘을 뚫고 갈 것 같은 기세에 주언은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관님은 그냥 뒤에서 지켜보시는 거 아니에요?”

수희의 타당한 의문에 정선우가 명예회복을 이번 한 번으로 하겠다며 멋쩍게 웃었다. 비상사태에 훈련생을 지켜야 하는 감독관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게 내내 신경 쓴 모양이었다.

“물론 한 분이라도 싫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지만요.”

세 사람 모두 정선우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그때의 순간을 극복해야만 앞으로 나아가니까.

“오늘은 그럼 편하게 하겠네요.”

구영의 넉살 좋은 말에 수희와 주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선우가 화색을 띠며 얼른 가자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 상황에 명훤에 대해 물을 수는 없어 주언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굳이 다 들리게 명훤이를 찾을 필요는 없으니까.’

정선우를 필두로 던전 안에 들어가는 길, 주언은 괜히 걸음을 늦춘 후 구영 등을 쿡쿡 찔렀다.

“왜? 몸 안 좋아?”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주언이 구영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그… 감독관님 오는 거 아니었어?”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형이랑 아직도 안 만났어?”

“응.”

“병실에 계신 거 아니야? 나 기숙사에서 바로 왔거든.”

“그럼 연락됐을 텐데.”

주언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몬스터의 울음소리에 두 사람은 대화를 관두고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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