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정선우는 그가 한 말 그대로 확실히 성장해서 돌아왔다. 감독관을 관둔 이후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지, 그는 확실히 예전보다 나아진 실력으로 던전을 휩쓸었다.
“그래도 우리가 할 몫은 좀 나눠줘야 되는 거 아니야?”
“엄청 신경 쓰였나 보지.”
구영과 수희는 앞서 나가는 정선우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뒤에는… 완전 넋 놓고 계신데…?”
“감독관님 때문인가.”
수희가 구영에게 떠보듯 묻자, 구영은 별 의심 없이 술술 이유를 말했다.
“아… 아무 사이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길래 난 착각한 줄 알았는데.”
수희가 이유를 알겠다는 듯 탄식을 터트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구영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수희의 말에 되묻자, 수희가 도리어 당황스럽다는 듯 구영의 옆구리를 세게 쳤다.
“몰라?”
“뭘.”
“오늘 들어오기 전에 너 뉴스 안 봤어?”
“늦잠자서 바로 뛰어왔는데.”
수희가 이마를 짚으며, 뒤에 침울해 있는 주언을 흘끗 보았다. 그것 때문에 심란해 하는 건가? 구영은 전혀 모르는 눈치다.
“…후우….”
수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구영만 들릴 정도로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혼자 뒤로 빠져서 주언을 따로 위로하기도 애매했다. 주언이 알고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지 않나.
‘차라리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하지만 앞에서 정선우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던전에 들어와서 한 건 별로 없지만 짙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
주언이 그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는 건, 던전을 클리어 하고 돌아오는 길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다 이 얘기밖에 안 하네.”
차량 창문 너머 풍경을 보던 수희가 중얼거렸다. 건물 위 큰 전광판에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뭐?”
구영이 소란스럽게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주언의 시선도 창문 밖을 향했다. 무심코 전광판을 올려다본 주언은 전광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 다 주언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하.”
전광판 아래쪽에 큰 글자로 요약된 뉴스 내용이 보였다.
[단독] S급 동성 커플 탄생? 여명훤 약혼 발표. 상대는 L 기업 이씨 가문 출신의 S급 가이드!
주언이 힘없이 핸드폰을 떨궜다.
-고객님의 전화가 꺼져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오며….
뚜. 뚜. 뚜. 뚜.
이번에도 명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
구영이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내용은 이해가 가는데, 같이 뜬 인물과 내용을 매치시키는 데까지 시간이 걸렸다.
착.
“저게 뭐야. 무슨 소리야, 저거 진짜 뉴스야?”
구영은 창문에 달라붙어 신호가 바뀌어 차가 출발하고도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전광판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된 후에서야 구영이 뒤에 있는 주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형. 방금 저거 뭐야?”
구영이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끼어서 고생했던 만큼 방금 본 뉴스가 비현실적이었다. 주언이 극구 부인해 아리송했으나, 명훤은 누가 봐도 주언 쪽에 사심을 품고 있었으니까.
“형은 몰랐던 내용이야?”
“…응.”
“야. 진수희. 네가 아까 말하던 뉴스 내용이 저거야?”
“어.”
진수희도 그간 두 사람의 곁에 내내 있어서 심상찮음을 감지했기에 순순히 대답했다. 주언은 자신 대신 구영이 흥분하고 소란스럽게 굴어서 다행히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구영은 주언 대신 쉴 새 없이 정선우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감독관님이 오늘 대신 온 것도 저거 때문이에요?”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새벽에 급하게 지시받은 내용이라.”
“앞으로 우리는 어떡해요?”
구영의 열렬한 시선에 정선우가 진땀을 빼며 대답했다.
“저도 아직 전해 들은 바가 없어서요.”
정선우도 결국 위에서 구르라면 구르는 직장인일 뿐이다. 같이 본사에서 일한다고 해도 여명훤과 정선우는 하늘과 땅처럼 먼 존재였다.
“감독관님은 아셨어요?”
“…아뇨. 저도 뉴스 보고 알았는데요.”
정선우의 멋쩍은 대답에 구영이 반쯤 떠 있던 엉덩이를 좌석에 다시 붙이고 앉았다. 더 정보가 나오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구영은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완전 도배됐네.”
포털 사이트뿐만이 아니라,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여명훤 얘기로 도배되어 있었다. 매일같이 봐서, 주언의 옆에서 잘 보이려고 애써서 잠깐 망각하고 있었는데 여명훤은 전 국민이 모두 다 아는 능력자였다.
“아침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짤막한 뉴스나, 전문 기사가 아닌 추측성 기사가 난무해 구영은 여러 기사를 클릭해 보다가 한 구절에서 멈칫했다.
“……4년이나 교제했다고?”
갑작스러운 약혼 발표에 의아함을 품던 구영이, 기사의 한 구절을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움찔.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지만, 주언의 귀에 닿을 정도로 목소리는 컸다. 주언이 그 말에 크게 동요했다.
“4년?”
자신이 임상 시험에 참여했던 시기랑 일치했다. 헤어지자마자 새로 사귄 거나 다름없었다. 그 간단한 계산법에 심장이 덜컹 가라앉았다. 주언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붕 뜨던 감정이 준비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네 잘못은 아니지.’
굳이 따지자면 명훤이 다른 사람과 사귄 건 헤어진 이후였을 테니까. 얼마나 오래 사귀었든 헤어지는 순간부터 무얼 하든 관여할 권리는 없으니까. 그리고 되짚어 보면 명훤은 주언에게 다가왔으나 명훤은 한 번도 자신이 혼자라고 말한 적도, 사귀자고 한 적도 없었다.
“형 괜찮아?”
“뭐가?”
“…아니… 그….”
구영이 머뭇거리자 주언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다른 사람들이 놀란 만큼 놀랐어.”
그냥 속아 넘어간 내가 멍청이일 뿐이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바보처럼 흔들리는 자신을 보고 얼마나 비웃었을까. 가지고 놀았을 때는 좋았을까. 술에 취한 걸 빌미로 안았을 때 너는 나를 우습게 봤을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기계처럼 괜히 다시 명훤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 번호조차 감독관이 됐으니 연락처는 교환해야 한다며 명훤이 억지로 등록해둔 번호였다.
신호가 길게 이어질 때마다 주언의 낯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어떤 결과가 나오기 전, 답을 먼저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이 그랬다. 명훤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다. 불길한 예감처럼 전화는 곧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멘트를 끝으로 끊겼다. 귀에 대고 있던 팔을 허탈하게 떨어트렸다.
명훤이 자신에게 아예 잘못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실만 따져보았을 때는 잘못이 없지만, 이건 도의적인 문제였다. 도의적으로 보면 네 잘못도 어느 정도 있다.
‘멋대로 내 삶에 다시 끼어들어서 그렇게 흔들어 놨으니까.’
주언은 손이 희게 질릴 정도로 세게 주먹 쥐었다. 조금만 느슨해지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모두가 보는 곳에서 그런 추태를 보일 수 없었다.
[단독] 여명훤, L 호텔에서 약혼 본격 발표……. 특수능력 국제법 안건이 통과할 거라는 신호? 사길드 개설 초읽기 (1)
주언은 긴 기사 속에서 명훤의 스케줄을 찾아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신을 가장 비참하게 만들고 싶었던 거라면.
‘그럼 성공이겠네.’
기분이 나락까지 처박혔으니까.
**
명훤은 신경 쓰지 않기 위해 무음으로 해둔 게 무색하게 틈이 날 때마다 핸드폰을 확인했다.
“쯧.”
명훤이 혀를 찼다.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주언의 번호였다. 깨어난 건지, 기억은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이대로 나선다면 이호윤은 명훤이 주언을 보러 다녀 생긴 수상한 점들을 곧장 여지웅에게 알릴 테니까.
이호윤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이용했다. 여유로운 태도로 명훤의 앞에 앉아 태연하게 와인 잔을 흔들고 있었다.
여지웅이 잡아준 스위트룸은 역겨울 정도로 호화로웠다.
“자존심도 없나.”
노골적인 명훤의 비아냥에도 이호윤은 샐쭉 웃었다.
“다시 의원님이 받아주시는데 자존심이 왜 필요해?”
“언제 다시 붙은 거지?”
“그게 중요해? 중요한 건 내일까지 네가 얌전히 여기에 있고 나랑 같이 약혼 기념 파티에 참여하면 되는 거야.”
“한 번 버리는 것도 쉬웠어. 두 번째는 더 쉬워.”
“각인하면 그런 고민은 끝이지.”
각인하는 순간 L 기업과 여 의원의 연결고리는 눈에 띄는 형태가 될 테니까.
곁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만큼, 이호윤은 지금 상태가 썩 만족스러운 듯 보였다. 우주언이 사라지고 이호윤은 공격 1팀에서 붕 뜬 존재가 되었다.
다들 무어라 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이호윤을 신경 써주었고, 겉에서 보면 합이 좋아 보이는 팀이었다. 하지만 이호윤은 매번 느꼈다. 여명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우주언을 뛰어넘을 수 없음을. 공격 1팀은 이호윤이 오기 전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던 팀이었다.
“…이호윤.”
“너 누구 만나지.”
“…….”
“누군지는 안 알아봤어.”
예전에 여명훤을 좋아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각인하면 다시 만나도 돼. 의원님한테는 말 안 할 테니까.”
혹시 싶었지만, 정말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구나 싶었다. 자신이 얼마나 얼빠진 새끼처럼 굴었으면. 여명훤은 스스로의 안일함에 화가 났다.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야.’
명훤은 뒷목을 주물렀다. 여지웅이 자신을 한낱 장기말로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런 중요한 일까지 이런 식으로 통보할 줄 몰랐다.
여지웅은 이 순간에서도 여명훤을 시험하고 있었다. 명훤이 어디까지 자신의 말을 들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