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69화 (69/112)

#69

곽성관이 빈 의자를 끌어당겨 동그란 간이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있는 주언의 옆에 앉았다. 손에 땀이 짙게 배어 나왔다. 그는 잠시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깊은 사이는 아니었고 굳이 말하자면 스쳐 지나가는 사이에 가까웠으니까.

‘문제는 그 한 번 스쳐 지나간 게 좋은 기억은 아닐 거라는 거겠지….’

괜히 알은척했나. 곽성관은 곤란한 얼굴로 어떻게 운을 떼지 싶다가 일단 제 소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이름까지 불러놓고 여기서 사람 잘못 봤다고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리고 지금 넘어가면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기자로서의 감이었다. 뭐 이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신경에 걸려 밤새 잠을 못 이룰 것이 자명하기도 했고.

“저 곽성관 기자입니다. 그 몇 년 전에 AGT 테러 관련 인터뷰 요청드리려고 댁 앞까지 쫓아갔었던…….”

“아아.”

주언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곽성관을 훑더니 곧 기억났다는 듯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니… 어떻게… 분명 그 사고에 휘말리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요.”

테러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생긴 메모리얼 관까지 찾아가서 이름을 확인했는데. 메모리얼 관에 있는 이름을 일일이 확인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실수로 이름이 기재됐을 확률이 가장 높지만.

‘느낌이 온다.’

기자로서의 감이 뜬금없이 반짝하고 불이 켜졌다.

“그런데 왜요.”

하지만 취한 주언은 곽성관이 바라는 대답을 쉽게 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왜 여기에 계십니까. 다른 공격 1팀 멤버들은 다 안에 계시던데.”

“아아.”

“…….”

“못 들어가거든요.”

“네?”

다른 팀으로 차출됐다고 해도 능력은 그대로일 텐데 왜 들어가지 못한다는 소린가 싶다가, 퍼뜩 깨달았다.

“아… 헤어지셔서… 그런 겁니까.”

이런 위로는 젬병인데. 하지만 위로가 어렵다고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 맛있는 냄새가 난다.

억지로 안타깝다는 스탠스를 취하며 주언을 바라보았다. 주언은 그런 곽성관의 표정에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냥 권한 없어서 못 들어간 건데요.”

“…아. 저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그때도 다짜고짜 인터뷰를 부탁한다고 했더니 도망갔다. 그러니 이번에는 전과 다르게 수순을 밟아 볼 심산이었다.

하지만 주언은 그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지 않은지 오래였다.

“그나저나 안에 공격 1팀 다 있는 건 어떻게 알아요?”

“조금 전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왜 그렇게 보세요?”

**

‘갔나.’

늦은 시간이라 초반보다 사람이 훨씬 줄어서 명훤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명훤은 넓은 홀 안을 훑어보았다. 조금 전에 강윤재를 봤는데, 잠시 시선을 뗀 사이에 사라졌다.

강윤재가 멍청하게 여지웅이 있는 곳에 주언을 데리고 오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알지만, 두 사람이 함께하는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안 좋아졌다.

주변에서 본 여명훤은 금욕적으로 보일 만큼 완벽한 차림에 무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실상은 그저 목 끝까지 잠근 완벽한 슈트 차림이 불편할 뿐이었다. 이 빌어먹을 밤이 지나면 이호윤도 굳이 더 말을 얹지는 않을 것이다. 전보다 공을 들여 조심히 움직여야겠지만.

주언이 보고 싶었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라면 건강이 걱정됐고, 진작 정신을 차린 거라면 이 뉴스를 보고 이상한 생각이라도 할까 걱정됐다.

‘…기억도 온전치 못한 애한테 뭐라고 설명하기도 애매하고.’

문자로 설명하기엔 설명하기가 너무 복잡하기도 했다. 명훤이 샴페인으로 바싹 타는 입을 축이려다가 멈칫했다.

잠깐 잘못 봤나 했지만, 명훤이 주언을 다른 사람과 착각했을 리 없었다. 초대장을 확인받고 홀 안에 들어온 건 누구의 옷이라도 빌려 입은 듯 품이 조금 큰 정장을 걸친 주언이었다. 다행히 분위기가 무르익어 새롭게 등장한 사람에게 시선을 많이 주지 않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명훤이 이를 바득 갈며 느긋하게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주언도 곧 명훤을 찾았는지 홀 안의 무수한 사람 사이로 시선을 마주했다. 명훤이 눈짓으로 화장실 쪽을 가리키자 주언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훤은 아까와 변함없는 태도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여지웅과 이호윤 쪽을 살폈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느라 이쪽은 관심 밖이다.

명훤은 그 사실을 확인 후 느릿하게 걸음을 돌렸다. 초조함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명훤은 화장실로 향했다.

덜컹.

화장실 안에 들어가자마자 명훤은 주언에 의해 몸이 강하게 문 쪽으로 밀렸다, 문이 거세게 닫히고, 등에는 닫힌 문의 냉기가 느껴졌다. 명훤은 갑작스러운 주언의 행동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였다. 명훤은 홀에서 내보였던 태연한 거죽을 벗어던지고 주언에게 몰아붙이듯 따져 물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따져 물으려고 했다.

“여기를 어떻게 네가… 읍.”

명훤의 거친 말은 채 끝나기 전에 주언이 그의 입술을 삼켰다. 주언이 발꿈치를 들고, 명훤의 목을 잡아 이끌었다.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상대가 주언이라서 명훤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싸구려 알코올 향이 나는 숨결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어떤 숨결보다 달콤했다. 그래서 명훤은 제 말이 끊긴 것도 잊은 채 폭신한 감촉이 느껴지는 주언의 입술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술을 마셔서인지 입술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주언이 목에 둘린 손을 앞으로 강하게 당기자, 몸의 중심을 잃었다.

“읏. 조심… 해야지.”

명훤이 주언의 허리를 낚아채 넘어지는 걸 막았다. 조심하라는 말이 무색하게 주언은 강한 힘으로 명훤의 목을 잡아당겼다.

화장실 문에 명훤의 등이 부딪혔다. 명훤이 팔로 문을 더듬거렸다.

철컥.

두 사람의 숨소리 사이로 화장실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명훤이 주언의 등을 있는 힘껏 껴안았다. 술 냄새에 섞인 체취에 취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하아… 하….”

명훤이 주언의 양어깨를 붙잡고 밀어냈다.

“…왜 멈춰?”

주언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정말 영문을 모르겠는 게 누군데. 명훤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더 자극해봤자 곤란해지는 건 주언이었다. 주언이 제정신으로 자신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라면 주언은 두 발로 멀쩡히 여기서 나가지 못했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혀로 아랫입술을 축였다. 열이 올라 바싹 마른 꺼슬해진 입술이 느껴졌다.

“여기서 더 하면 공공장소라는 것도 잊을 것 같으니까.”

그 사실을 주언이 모를 리 없을 텐데… 주언은 마치 무언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주언은 왜 이렇게 구는 걸까.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주언의 입술을 손으로 훑어 주었다. 본능이 명훤의 인내심을 담금질했다. 주언의 물음에 명훤의 턱이 도드라졌다.

너는 모르지. 내가 얼마나 살인적인 인내로 이 순간을 견뎌내는지.

“……너 술버릇 고치는 게 좋을 거 같다.”

무슨 생각을 했든 간에, 주언이 이렇게까지 저돌적인 데에는 술기운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었다.

주언은 용기를 취기의 만용처럼 말하는 명훤에게 발끈했다.

“나 그 정도로 안 취했어.”

“너 지금 많이 취했어.”

“…아니라니까 왜 자꾸 우겨.”

“이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믿어. 그리고 퇴원하자마자 술 마시는 것도… 하지 말고.”

주언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명훤의 거절이 헤어지기 전 삐걱거렸던 때를 상기시켰다. 명훤이 갑자기 멀어지는 주언에게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휙.

하지만 주언이 명훤의 손을 노골적으로 피해 잡힌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변명하지 마.”

“뭐?”

“약혼해서 이제 못하겠다는 뜻이잖아. 내가 매달려서 후회할 거 같아서 그래?”

“…….”

“그냥 가지고 논다고 생각해도 돼.”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명훤의 얼굴이 굳어졌다. 주언이 순간 흠칫했으나 이미 쏟아진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만나면 어른스럽게 따지고 싶었다. 또다시 일방적으로 매달려 버려지고 싶진 않았으니까. 네가 보여준 모든 행동은 날 헷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고. 그러니까 이건 네 잘못이라고. 그러니까 나 혼자 구질구질하게 떠난 감정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네가 자초한 상황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침착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실패였다. 생각과 감정이 이리저리 날뛰어대는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감정적인 말뿐이었다.

“우주언.”

“…왜.”

“가지고 논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약혼자가 있는데 전 애인한테 그런 식으로 구는 게 가지고 노는 게 아니면 뭔데.”

“이 말 하려고 여기까지 왔어?”

철저한 약자 쪽에 서서 농락당하는 쪽이 누구인데. 명훤의 헛웃음에 주춤했지만 곧 주언이 뾰족하게 말했다. 상처받은 듯한 목소리에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나 왜 헷갈리게 해.”

우리는 헤어졌는데, 왜.

약혼 발표하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너를 보며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너는 평생 모르겠지.

주언은 겨우 가라앉으려던 감정이 다시 거세게 일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그게 가지고 논 게 아니면 뭔데.”

“네가-!”

명훤이 드물게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문장을 끝맺기 전 명훤이 화를 삭였다.

“너한테 애인이 있어서 내가 참는 거겠지.”

“…….”

“우주언.”

“…….”

“너는 아직도 부정하고 싶을 수 있겠지만, 너 내가 찾는 사람 맞아. 너 내 애인이야.”

“우리 헤어졌잖아.”

“네가 나를, 우리 관계를 부정할 때마다 내가 어떤 지옥을 걷는지 너는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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