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70화 (70/112)

#70

명훤이 주언을 손목을 붙잡고 몸을 끌어당겼다. 잇새에 살이 깨물려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체취에 숨이 막혔다. 가까워진 거리 사이로 괴로워하는 명훤의 얼굴에 시선이 박혔다.

“내가 지금 멈춘 거? 후회할 짓 하는 건 너고, 난 그저 네가 후회하지 않도록 멈춘 거야.”

난 취하지 않았으니까.

주언은 아직 윤재를 애인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마지막에는 기억이 조금 돌아온 듯했으나, 겨우 기억의 파편 몇 조각으로 희망을 가지기엔 너무 오랜 시간을 절망에 빠져 살았다.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지만, 주언이 죄책감 느낄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죄책감은 고스란히 윤재에게 빚이 될 테니까. 홀보다 확연히 어두운 조명 아래 비친 주언의 얼굴을 착잡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너 언제부터 이런 술버릇 생겼는지 모르겠는데…….”

“나도 몰랐어. 네 술버릇.”

“뭐?”

“너는 술에 취하면 아무나랑 그래? 나도 아무나였어?”

주언의 눈가가 새빨갰다. 그제야 주언이 말하는 순간이 언젠지 떠올랐다. 어둠이 모든 걸 가렸을 때, 본능적으로 움켜잡았던, 살고 싶어서 잡았던 손.

“그건…!”

오해였다. 다른 상대였으면 절대로 끝까지 가지 못했을 것이다.

“뭐? 그게 무슨… 오해야.”

“술버릇 고쳐야 하는 건 너지. 내가 술에 취했다 쳐도, 적어도 나는 누구랑 하고 있는지는 알고 하는 거니까.”

명훤이 미간을 좁혔다. 상황이 이해 가지 않았다. 싸우고 있지만 거리감이 전보다 훨씬 가까웠다.

주언이 쏘아붙이는 탓에 생각의 흐름이 조금 늦게 흘렀다. 주언이 언성을 높이면 높일수록 기시감이 들었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명훤은 주언의 매정한 말에도 아무 대답도 못 한 채 굳을 수밖에 없었다. 희망을 가졌다가 또 아니면, 그 잠깐의 들뜸이 얼마나 상처를 후벼 파는 줄 아니까.

“지금 나……. 굉장히 이상한 생각이 드는데.”

명훤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주언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네가 공적인 관계로 남자고 했으면서 왜 나 헷갈리게 해.”

울먹이는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쓰러지기 전에 주언은 물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게 과거가 맞느냐고. 하지만 지금은 마치.

“…기억이 돌아온 것처럼 말하네.”

명훤의 말에 숙였던 주언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명훤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너 설마….”

달칵. 달칵.

“왜 잠겨있지?”

쾅! 쾅쾅!

두 사람만 오롯이 있던 공기가 깨졌다. 두 사람이 동시에 큰 소리가 난 문 쪽을 바라보았다.

“안에 누구 계세요? 나오세요! 지금 호텔 안에 던전이 생겨서…!”

밖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주언이 먼저 움직였다.

“우리 얘기 안 끝났어.”

“나중에 얘기해.”

“…….”

“…어디 안 갈게.”

타이밍이 빌어먹게도 안 좋았다. 어쩔 수 없었다. 밖에 있는 직원에게 대답하지 않으면 직원은 문을 따고 들어올 기세였으니까.

달칵.

“빨리 대피하세, 여…명훤…?”

직원은 문을 두어 번 더 세게 내리치려다가 불시에 문이 열리자 멈칫했다. 직원은 열린 문 사이로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는 키가 큰 여명훤을 보고 주춤했다.

토끼 눈을 뜬 직원을 향해 일반인을 상대하는 것치곤 굉장히 살벌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딥니까.”

**

처음 여한올이 기사를 접한 건, 팀원들이 컴퓨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을 때였다.

이맘때쯤이면 야식을 먹어야 한다며 시끌벅적할 시간대인데 오늘따라 조용했다. 게다가 저렇게 모여서 작당 모의하듯 수군거리니 정말 수상해 보였다.

“뭘 그렇게 봐?”

“형! 언제 왔어요?”

한올이 불쑥 고개를 내밀며 묻자 모두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나 방금. 왜 그렇게 뭐 잘못한 개처럼 안절부절못하는데.”

우물쭈물하는 사람들 사이로 한 명이 매도 먼저 맞는 게 낮다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먼저 이실직고했다.

“내일 나올 뉴스 유출본을 입수했는데……. 여명훤 얘기예요.”

“뭐? 비켜 봐.”

확!

한올이 앞에 있던 팀원의 어깨를 거칠게 밀치고 컴퓨터 화면을 확인했다. 스크롤을 내릴 때까지 아무 말 없던 한올이 멍청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명훤 결혼해?”

“약혼 다음이 결혼이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죠?”

“난 들은 얘기가 없는데?”

마지막으로 명훤을 만났을 때는 계약 아이템까지 썼다. 절대 배신하지 않기로.

“아니. 잠깐.”

맹세하는 말을 직접 정해주려고 했지만 여명훤이 먼저 아이템을 낚아챘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넘어갔다.

‘마력을 불어넣고 말하면 발동돼. 그러니까 이거 들고….’

‘정부의 개로 살 일은 없을 거야.’

‘이게 얼마짜린데… 상의는 하고 말하지.’

‘이게 네가 제일 바라는 거잖아.’

그때는 여명훤의 말에 틀린 게 없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저렇게 급하게 맹세 아이템에 대고 맹세하는 것도 이상했다.

원래의 여명훤이라면 쉽게 해주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서 한참 설득할 생각까지 했었다.

“그때부터 이미 다 정해져 있던 일인가?”

L 기업으로 길드를 이전할 거여서, 각인까지 마치면 정부의 개가 아닌 L 기업의 개 같지만 결국 가족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게 되니까?

맹세 아이템은 맹세한 시전자가 생각으로 맹세를 기준 삼는다. 여명훤이 형편 좋게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는 문장이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되게 열 받는데?”

돈은 돈대로 쓰고, 배신은 배신대로 당한 거면 완전히 여명훤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거 아닌가.

“누가 여지웅 새끼 친자식 아니랄까 봐.”

능구렁이처럼 감이 날 물먹여?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잠깐만요…! 이미 가버리셨네.”

붙잡을 새도 없이 여한올은 폭풍같이 맹렬한 기세로 기지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명훤은 호텔에 갇혀 있었기에, 어젯밤 여명훤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여명훤의 집에서 밤새 기다렸던 한올은 당연한 수순으로 공칠 수밖에 없었다.

“못 만났어.”

동이 완전히 트기 전, 돌아온 한올이 후드를 소파에 집어 던지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말은 끝까지 듣고 가셨어야죠.”

“연락하지. 시간만 낭비했어.”

한올이 들어오는 소리에 잠에서 깬 초원이 어이없다는 듯 한올을 바라보았다.

“했어요.”

“…그래?”

전화를 확인해 보니 10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화가 나서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기만 하고 핸드폰 한번 확인해 볼 생각을 못 했다.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이 빨리하는 이유는 법이 개정된다는 뜻이겠지?”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여명훤은 알았는데 말을 안 한 걸까, 아니면 여명훤도 뒤늦게 안 걸까.”

팔짱을 끼고 소파에 등을 기댄 한올은 두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글쎄요.”

“물어봐야겠어.”

“……만약 여명훤이 우리를 버린 거면요?”

“어차피 명훤이는 정부 엿 먹이려고 우리한테 정보 준 거고, 우리도 기밀만 빼먹으려고 한 거였으니까 상관없어….”

“…….”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내 성격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말이야.”

상상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지 한올의 얼굴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여명훤은 한올에게 있어서 증오의 상대였다. 잘못한 건 없지만 여씨의 피가 흐른다는 것만으로도 증오스러웠고, 그와 동시에 자신을 유일하게 가족으로 인정했었던 여명훤이었다. 한때지만 유일했던 가족.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우주언이라는 족쇄가 사라진 지금, 정부에 소속될 필요가 없기도 했으니까.

“근데 그건 나중 얘기지. 자금도 대주고 있으니까 그 내역 보관해둬.”

“우리가 운영하는 보육원에 후원하는 방식이라 여명훤이 말하면 저희 쪽도 타격이 있는데요?”

“그래도 바보처럼 당할 수는 없으니까.”

한올의 다소 비장한 말투에 초원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이번 여명훤의 약혼은 AGT에게도 중요한 소식이었다. 단순히 가족이 결혼해서, 라는 이유가 아니라 그들은 반정부조직이었다.

능력자를 독점하는 정부 소속 특수능력기관은 고인 물이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그러기 위해 AGT는 다소 과격한 방법으로 정부에 반항을 해왔다. AGT에 신규 유입되는 능력자 대부분은 그런 문화에 피해를 입어 도망치듯 온 사람들이었다. 여한올과 마찬가지로.

AGT가 한동안 활동을 하지 않은 건, 신규 유입이 부쩍 늘며 인원이 증가하자, 팀원의 결속을 다지는 시간을 갖자는 의견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부 독점 체제가 끝난다면?

“여지웅이 근래 인터뷰했던 거 보면 뜻대로 안 될 거 같아서 태세 전환할 거 같단 말이지.”

“내일 약혼 발표 공식적으로 한다는데, 내일 보면 조금 더 확실해지겠죠.”

능력자가 국가에 귀속된 기관에만 갈 수 있는 법이 사라지면 신규 유입된 팀원들도 와해될 확률이 높았다. 불현듯 명훤이 주변 너무 믿지 말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명훤이 그런 이야기를 한 건 처음이었다.

단순히 맹세 아이템에 자기 멋대로 말하기 위해 시선 분산용으로 던진 말일 수도 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초원은 초기부터 함께 해온 팀원이었다.

“비리 파일 업데이트 잘 해두고. 잘 둬.”

“새삼스럽게.”

“그리고 내일 약혼 발표 내가 직접 간다.”

여지웅은 법안이 통과되어도 자기 배만 불릴 방법을 모색해뒀을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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