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71화 (71/112)

#71

“그럴 줄 알고 준비해뒀어요.”

초원이 가짜 신분증과 사원증을 한올에게 건네며 말했다.

탁.

사원증을 받아 든 한올은 사원증 사진을 살펴보았다.

사진 속 인물은 큰 안경을 끼고, 머리는 덥수룩해서 얼굴을 잘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있어서 덩치를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기자들도 초대했대요.”

그러니까 숨어드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는 말에 한올이 토끼 눈을 떴다.

“언제 준비해뒀어?”

“여명훤 집에서 날밤 새우고 계실 때요.”

혼자 화나서 부루퉁해 있을 때 다 준비해놓고 있었다는 생각에 괜히 멋쩍어진 한올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내가 갈 거라고 생각했어?”

“안 가면 저라도 가려고 했죠.”

“내일 가봐야 한다고 생각하는구나.”

“네, 뭐.”

초원의 의견은 한올의 말 다음으로 절대적이었다. 지금은 내실을 다질 때라며 활동을 드물게 하는 것도 초원의 의견이었다.

“그래.”

“그럼 전 이제 조금 더 자볼게요.”

“잘 자. 아까는 미안했다. 내가 제일 늦게 알아서 초조했었나 봐.”

“괜찮아요.”

초원이 사라지자 거실이 적막으로 가득 찼다. 기지라고 하기보다는 일반 집에 가까웠다. 원년 팀원들이 같이 사는 곳.

‘괜히 들쑤시기만 하고.’

여명훤의 한마디에 휘둘리는 스스로에게 혀를 찼다. 팀원을 믿지 말라는 말을 하는 여명훤이 가장 의심스러웠다.

**

세기의 약혼이라는 수식어까지 따라붙은 탓에 홀 안은 북적였다. 홀 밖에는 초대장을 받지 못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사람들 틈으로 한올은 유유히 홀 안에 들어갔다.

“초대장 좀 확인하겠습니다.”

최대 난관은 입장할 때뿐이었다. 특수 홀로그램 처리 되어 있었는지 기계로 초대장을 스캔했다.

‘초대장에 돈지랄을 해놨네.’

“여기요.”

한올이 태연한 표정으로 초대장을 건넸으나, 이때만큼은 조금 긴장했다. 한올의 덥수룩한 모습에 가드가 잠시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습관처럼 눈을 비비려던 한올은 손가락을 가로막은 안경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안경에 짙은 지문 자국이 새겨졌는데 가만히 있는 게 더 수상해 보일까 봐 안경을 벗어 빠르게 옷으로 대충 닦아냈다.

시선이 느껴져 안경을 서둘러 쓴 후 퍼뜩 고개를 들자 손이 허공에 멈춘 가드와 시선이 부딪혔다.

“왜요?”

한올이 무구한 얼굴로 보자 가드가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걸리진 않겠지.’

가드가 초대장을 건네받아 스캐너 안에 넣었다. 몇 초가 길게 느껴졌다.

-띵-! 인증 완료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방금 안에 들어갔던 사람과 같은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입장 가능하십니다. 나갔다 들어오실 때마다 스캔을 해야 하니 나가실 때 초대장 꼭 지참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가드가 상냥한 설명과 함께 초대장을 돌려주었다.

안에 들어가서부터는 쉬웠다. 사람이 많아 여한올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한올도 익숙하게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주의해야 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여명훤은 눈치가 기이할 정도로 기민했다. 뒤바꿔 말하자면 여명훤만 속일 수 있으면 이 홀 안에 있는 모두를 속여넘길 수 있다는 소리다.

모습을 드러낸 여명훤의 표정은 읽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것 자체로 설명되는 것들이 있었다.

“인터뷰 요청 좀 드리겠습니다.”

“같이 사진 찍게 포즈 좀 취해주세요.”

다행히 기자들이 여명훤에게 쉴 틈 없이 질문을 하는 덕분에 아무리 기감이 뛰어난 여명훤이라도 자신이 들킬 일은 없어 보였다. 여한올은 기자들이 여명훤과 이호윤에게 열렬히 질문을 던지고, 이호윤이 대답하고, 그 옆에 별말 없이 서 있는 여명훤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나랑 말장난했네. 여명훤.”

L 기업 길드로 이적한다고 한들, 그건 겉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여기서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지웅은 자신의 권력을 한 톨도 흘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4년 교제가 개소리라는 것도 알겠고.”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여명훤을 아는 사람이라면 알만한 기분 더럽다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만약 여명훤에게 우주언 외에 다른 사람이 생겼더라면 한올이 몰랐을 리 없다.

‘다 예상 범주 안이야.’

여지웅에게 다른 속내가 있는 것도, 여명훤의 감정도.

파티는 지루했다.

‘그냥 집에 갈까.’

파악할 건 끝냈다. 핑거 푸드를 먹으며 벽에 기대는 것도 질렸다. 다만 너무 일찍 돌아가면 기껏 안으로 수월하게 들어올 수 있게 도와준 초원에게 면목이 없었다.

“화장실 가는 거 보면 같은 인간이긴 한데 말이야.”

여명훤이 자연스럽게 화장실 쪽을 향하는 걸 보고 중얼거렸다, 매번 완벽한 모습만 보다가 인간 모두가 갖는 생리 현상을 따르려는 그의 모습을 보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푸핫. 아니. 잠깐만.”

하지만 웃음을 터트리던 것도 잠시였다. 여한올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주변에서 웃다가 갑자기 정색한 한올을 쳐다보았으나, 지금 남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와 남몰래 접촉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게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자연스러운 걸음걸이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여명훤을 지켜보고 있던 여한올이 있었다.

여명훤의 걸음과 같은 곳을 향하는 사람이 있었다. 색이 조금 옅은, 가느다란 머리카락. 특출난 얼굴은 아니지만 유독 흰 얼굴이라든지, 특유의 정적인 분위기라든지. 본 적은 거의 없지만 각인되다시피 한 얼굴이었다.

“저건, 분명….”

예상치 못한 대어를 엉겁결에 낚은 기분이었다.

‘앙큼하네.’

한올이 코를 찡그리며 웃었다.

이렇게 멀쩡히, 여명훤의 곁에서 살아있었다고? 이제껏 모두의 눈을 속이고 있었던 건가?

우주언의 존재는 여명훤의 가장 큰 변수였다. 결코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여지웅은 알고 있을 확률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우주언이 이곳에 어떻게 왔겠는가.

우주언의 존재에 많은 의문이 설명이 됐다. 여명훤이 이곳에 있는 것도, 맹세 아이템에 그런 식으로 맹세를 한 것도 다 이해가 갔다.

여명훤이 처음 공격 1팀에 간 것도 우주언을 위해서였다.

‘평범하고 무난한 걸 바라던 우주언. 여명훤의 족쇄.’

우주언이 존재함으로서 여명훤은 특수능력기관에 귀속 당했다. 결혼하는 게 정치적인 이유뿐이라면 여명훤은 우주언을 안락하게 만들기 위해 기관에 남을 새끼였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속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여지웅이 알고 있다고 해도 단둘이 저렇게 나가는 거 싫어할 텐데.’

굳이 화장실로 데리고 나간 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는 뜻이 아닌가. 흐트러진 주언의 모습 또한 한올의 추측을 뒷받침했다.

여지웅이 있으니 곧 돌아올 거라는 한올의 예측과 달리 여명훤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저는 그저 아들의 행복을 바랄 뿐이지요.”

한올은 도수 높은 안경을 추켜 올리며 가증스러운 여지웅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서 구역질이 났다.

‘쓰레기 새끼.’

쿠구구궁.

지면이 불시에 흔들렸다. 일반인 대부분이 갑작스러운 지진에 주저앉았다.

쿠쿠쿠쿠쿵.

“아악!”

“꺅!”

쨍그랑!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샹들리에가 서로 부딪히며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샴페인 잔이나 핑거푸드를 담은 접시도 바닥에 떨어지며 깨졌다.

하지만 그 순간은 짧았다. 시간이 지나 잠잠하자 공포에 질렸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빼꼼 들며 주변을 살폈다.

“갑자기 웬 지진이….”

도심 한가운데서 지진이 일어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 말했다.

“그럼 여진도 곧 올 텐데, 그 전에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여기 내진 설계가 되어 있나?”

보통 지진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 지역은 내진 설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건물에 깔려 죽는다는 생각이 다수의 뇌를 스치고 지나갔을 때였다.

“허허. 다들 너무 불신하시는 것 아닙니까.”

벽 쪽에 인자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시선이 소리가 난 쪽에 닿자, 벽을 둘러싸고 있던 가드들이 물러섰다. 그 사이로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L 그룹 이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텔의 안전성을 운운하던 사람들을 기억하겠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나야, 괜찮지.”

“상황을 곧장 파악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로비에 있던 직원들이 빠르게 홀 안까지 들어와 이 회장에게 사과했다.

“나 하나의 안전을 우선시하지 않는다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군요.”

직원이 아닌 가드가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나온 말이란 걸 알았지만, 아무도 이 회장의 말에 태클 거는 사람은 없었다.

“역시 이 회장님입니다.”

마찬가지로 보호받고 있던 여지웅이 이 회장의 말을 거들었을 뿐.

이 회장의 말대로 직원들의 대처는 훌륭했다. 철저히 훈련받은 직원들이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자 사람들도 곧 안정되기 시작했다. 뒤에 이 호텔의 건물주인 L 기업의 회장이 있다는 것까지 떠올린 덕도 아주 컸다.

“밖에는 지진이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럼 건물 문제인 것 아닙니까?”

“붕괴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니 건물 문제로 보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럼 뭡니까?”

“건물 문제는 아니지만 정확히 사태 파악을 한 게 아니므로, 일단 대피에 도움부터 드리겠습니다.”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웅크린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분해진 사람들이 이 회장의 눈도장을 찍기 위해 한마디씩 거들며 움직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