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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72화 (72/112)

#72

‘자연스럽게 나뉘네.’

가장 선두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은 한눈에 봐도 기득권층이었고, 기자들이나 서빙을 돕던 사람들은 뒤쪽에 섰다.

한올은 환멸 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에 있는 여명훤 쪽이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가서 들킬 생각은 없었다.

홀을 나오자 빠르게 나가려는 사람들 사이로 홀 앞에서 초조하게 발을 동동거리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아까 자신을 치고 지나갔던 기자였다. 조금 전과 다르게 조금 껴 보이는 캐주얼한 복장을 한 기자가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인터뷰 따야 되는데! 왜 이런 일이! 왜 안 나오는 거야!”

앞에서 초대장을 확인하던 가드들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곧 기자는 비장한 얼굴로 사람들이 빠져나온 홀에 들어서려고 했다.

“안에 들어가 봐야겠어.”

비장한 목소리에 한올의 귀에 꽂혔다.

“일단 피하세요.”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가드를 제외한 유일하게 대화를 섞은 사람이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예? 저는 찾는 사람이 있어서….”

극구 거절하는 사람을 데리고 나가야 한다.

“나중에 여기서 나가서 찾는 편이 나을 겁니다.”

“생각해보니 연락처가 없어서요.”

미친 새끼인가. 기자실에 이런 별종도 있구나 싶었다.

“제가 괜한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스스스스.

언성을 높이려던 한올은 바닥에 깔리기 시작한 안개를 발견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눈을 깜박하는 사이에 발목에 머물렀던 연기가 순식간에 정강이로, 허벅지로, 곧 가슴팍까지 차올랐다.

불쾌한 감각에 발을 휘저으며 연기를 몰아내려 했으나 건물 안을 가득 채운 연기를 몰아내는 건 무리였다.

쾅! 쾅!

문 쪽에서 방금 대피한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왜 여기 문이 안 열려!”

“이 연기는 뭐지?”

“이럴 수가 이 건물 테러당하는 건가 봐.”

“말도 안 돼.”

현재 사태가 순식간에 테러 조직의 소행이 되어버린 상황에 한올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테러는커녕, 테러조직 보스도 여기 갇혀 있습니다만. 억울했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스스스스-

안개가 순식간에 자욱하게 건물 안을 가득 채웠다.

**

공격 1팀은 인원 증원을 해서 항상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이번 달은 밤에 근무하게 된 강노훈은 자신이 출근하자마자 걸려온 전화에 콧잔등을 찡그렸다. 느낌이 좋지 않아 전화 받는 윤진의 앞에 섰다.

연락을 받은 서윤진은 고개를 까딱하며 노훈에게 인사한 후 통화를 이어갔다.

“우리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곧 통화를 끝마친 서윤진이 갓 출근해서 윗옷도 벗지 않은 노훈을 보며 속삭였다.

“나 아직 내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운이 나빴네요.”

“그렇게 영혼 없는 위로 처음 들어 봐. 그래서 어디에 가야 되는데?”

강노훈은 커피라도 마셔야겠다며 커피 머신이 있는 쪽으로 뛰어가 커피를 내렸다. 커피라도 안 마시면 견딜 수 없다는 듯 표정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래?”

“L 호텔에 던전이 생겼답니다.”

“L 호텔? 여기서 10분 거리에 있는 그 호텔?”

“네.”

강노훈이 요즘 들어 자주 듣는 호텔 이름 같은데, 다른 때 언제 들었더라,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 객실 규모 엄청 크지 않아? 우리만 간다고 해결될 건 아닌 거 같은데?”

“객실 쪽은 아니고, 홀 쪽에 던전이 생겨 홀에 있는 사람들만 휘말렸다나 봐요.”

“엠바고는?”

“너무 도심 한복판에 생겨서 엠바고 걸면 더 이상할 거 같아서 그냥 둔답니다.”

“가면 또 사람들 우글우글하겠네.”

서윤진의 말에 강노훈이 사무실 안에 존재감 없던 TV를 켰다. TV를 켜자마자 화면 속에서는 헬리콥터에 탄 기자가 도심 속 가장 높이 우뚝 선 호텔을 조명하며 뉴스를 보도하고 있었다.

[지금 현재 상황입니다. 상공에서 L 호텔 크리스털 홀이 연기에 둘러싸인 모습이 보이는데요.]

강노훈은 건물을 둘러싼 뿌연 연기를 바라보았다. 마치 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연기가 꿈틀거렸다.

“벌써 뉴스 보도까지 떴네.”

강노훈이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화면 속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테러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문의한 결과, 테러가 아닌 던전이 발생했다는 쪽으로 의견이 쏠리고 있습니다.]

띡.

화면 너머로 확인할 수 있는 건 다 확인했다고 판단한 강노훈이 TV를 끄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심 한복판에 갑자기 던전이 나오다니 아주 우리 돈 쉽게 벌지 말라고 고사 지내는 것 같아. 안 그래도 오늘 인력 비는데.”

“…저도 가는 거겠죠.”

강노훈과 마찬가지로 갓 출근하자마자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 처지인 이지우가 아련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바로 나갈 준비하세요.”

“지금 거기 L 기업 회장부터 국회의원들 다 있을 텐데… 만약 다 못 구하면 욕 엄청 먹겠죠?”

비단 당장 출동해야 하는 것보다, 구하지 못했을 때의 파급력이 더 걱정됐는지 이지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같은 팀인 여명훤이 미디어에 나오며 보였던 파급력을 떠올리며, 벌써 상상까지 끝마쳤는지 이지우의 손끝이 떨렸다.

“아직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헬기까지 띄워서 뉴스를 왜 내보내나 했더니… 오늘 저기 뭔 이벤트 있었나 보네.”

이지우의 말에 강노훈이 이마를 딱 짚었다. 그 모습을 본 서윤진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개그 치시는 거예요?”

이 상황에서?

서윤진의 황당한 표정에 강노훈은 여전히 무엇이 문제인지 눈치채지 못해 되물었다.

“뭐가?”

“저 홀 오늘 명훤 씨랑 호윤 씨 약혼식 하는 곳이잖아요.”

“뭐?!”

강노훈이 튀어나올 정도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왜 놀라세요.”

“윤진 씨는 왜 안 놀라?”

“놀라긴 했는데… 청첩장 받았을 때나 크게 놀랐죠.”

“청첩장? 명훤 씨한테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명훤 씨는 아무 말 안 했으니까요.”

“…….”

“그저께인가 이호윤 씨가 못 오실 거 아는데 그래도 주고 싶다면서 청첩장 돌렸잖아요.”

명훤에게서는 듣지 못했지만, 확실히 이호윤이 어디서 뭘 한다고 얘기하긴 했었다. 청첩장까지 받았었던 터라 강노훈은 듣지 못했다는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아직 봉투 안 열어봐서 몰랐어.”

“…아직도요? 언제 열어보실 생각이었는데요?”

“시간… 나면?”

“…….”

싸늘한 두 사람의 시선에 강노훈이 헛기침을 하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준비하자.”

하지만 강노훈이 진지하든 말든 이지우가 대화를 이어갔다.

“그런데 뉴스에서 명훤 씨랑 호윤 씨 4년간 사귀셨다는데, 진짜예요?”

출동 준비를 하던 이지우가 문득 떠오른 의문을 말하자,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4년 동안 사귄 거면 명훤 씨 새로 보일 거 같긴 하겠네요.”

윤진이 싸늘한 목소리로 일축하자, 이지우는 그제야 말실수를 한 걸 깨닫고 윤진의 눈치를 살폈다.

“일단 급하게 가야 되니까, 잡담은 더 하지 말자. 인원 부족한데 누구 데리고 가냐.”

강노훈이 투덜거리며 현재 출근한 인력 중 곧장 투입할 만한 인물을 추리기 시작했다.

“저기 그런데 거기에 명훤 씨도 있지 않아요?”

이지우의 물음에 강노훈이 서윤진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아. 그러네. 부족한 인력이 딱 마침 거기에 있었네. 크리스털 홀에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으니까 이미 던전 안에 있겠네.”

여명훤을 전력으로 치지 않고 있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아차 하는 표정에 서윤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곧 인원을 다 추릴 때쯤, 강노훈이 진지한 얼굴로 운을 뗐다.

“아니. 우리 명훤 씨 마가 낀 게 아닐까?”

“굿이라도 한 판 하자고 하지 그래요?”

“진짜 할까? 용한 사람 알아?”

빈정거리는 말이었는데 강노훈은 그런 기막힌 생각을 어떻게 했냐며, 감탄을 반복했다.

“빨리 갈 준비나 해요.”

“오늘 몰래 이직할 준비하려고 했는데. 이미 가슴속에 사직서 품고 있거든.”

“준비할 게 뭐가 있어요?”

“이력서 써야 되잖아. 윤진 씨는 다 썼어?”

“저는 안 썼는데요.”

“어? 지우 씨는?”

강노훈이 그럴 리가 없다며 지우에게까지 물었다. 강노훈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한 지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진실을 토로했다.

“…저도 안 썼는데요?”

지우의 말에 강노훈이 그럴 리 없다며 스스로의 양 뺨을 쥐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명훤 씨가 내게 그런 잔혹한 짓을? 그럴 리 없어.”

“팀장님 스카우트 당하신 거 아니에요?”

“맞는데?”

“이상하다. 이력서도 필요 없다던데.”

서윤진이 고개를 갸웃하자, 강노훈은 서윤진이 놀리는 게 아니라 진짜로 한 말이라는 걸 깨닫고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올렸다.

“원래 주요 인물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어야 되니까 그런 거 아닐까?”

“주요 인물이 팀장님뿐이다, 이 소린가요?”

“주요 인물 중에 내가 제일 주요하다. 이거지.”

강노훈의 정신 승리에 서윤진이 한마디를 더 보태려고 할 때 비상전화가 또다시 울렸다.

삐이이이이.

삐이이이이.

“아. 추가 연락 좀 받겠습니다.”

“그래.”

강노훈이 이 대화를 더 하고 싶지 않다며 손을 휘휘 저으며 어서 가서 전화 받으라는 몸짓을 취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서윤진이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네. 공격 1팀 서윤진입니다.”

먼저 나선 선발대가 던전에 대해 파악한 내용을 브리핑해주었다. 서윤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강노훈은 이미 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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