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73화 (73/112)

#73

“등급은?”

“A급이긴 한데….”

서윤진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아 강노훈이 윤진의 어깨를 두들겼다.

“생각보다 등급은 높은데 명훤 씨가 있어서 다행이네. 피해자는 없을 테니 걱정을 미리 사서 하지 말자고.”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요.”

“뭐? 뭐라고 말했길래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저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명훤 씨가 거기에 있어서 다행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 반대랄까.”

웃던 기색은 어디 가고 순식간에 진지해진 모습에 심상찮음을 느낀 강노훈이 물었다.

“아니, 왜?”

“몽마 계열의 몬스터래요.”

서윤진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서윤진의 말에 강노훈의 얼굴에 남아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서윤진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그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골치 아프다는 듯 한숨을 토해내며 미간을 좁혔다.

“뭐… 갑자기 그런 희귀한 몬스터가 왜 도시 한복판에서 나와?”

강노훈의 물음에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요.”

안개가 짙게 드리운 던전 형태를 봤을 때 조금 별난 몬스터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몽마라니.

좋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약한 부분이 있으면 휘말리기 쉽잖아.”

강노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서윤진이 고개를 끄덕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되는 건 곧 출동해야 하는 팀원들이 아니었다. 이미 던전 안에 휘말려버린 여명훤이 걱정이었다. S급 능력자도 사람이고 약한 부분은 있기 마련이다. 다른 더 높은 등급의 몬스터도 상대한 여명훤이었지만 궁합이 최악이었다.

강노훈과 서윤진은 주언을 잃은 이후 명훤이 망가진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봤던 사람들이었다. 팀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두 사람은 아주 잘 알았다.

여명훤은 주언이 사라진 이후 어딘가 망가졌다. 처음과 다르게 지금은 일상생활도 가능하지만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차라리 초반에 무너진 모습이 나아 보일 정도로, 때때로 명훤은 불안해 보였다.

짙은 피로에 메마르고 어두워진 눈빛은 늘 굶주려 보였다. 언제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 줄이 끊어질지 몰라 위태로워 보였다. 만약 그의 약한 부분을 몽마가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면? 몽마를 처리하는 것보다 여명훤부터 제지하는 걸 우선으로 두는 게 가장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방법일 것이다.

“명훤 씨 폭주하는 것부터 걱정해야겠네요. 늑대 같은 남편과 토끼 같은 새끼가 집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도심 한복판에서 명훤 씨 폭주하는 걸 막으려는 생각하니까 오금이 저린다.”

“말릴 수나 있으면 다행이게요.”

자조적인 말투에 강노훈은 마른침을 삼켰다. 윤진의 말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었기에. 만약 막아야 한다면 이쪽이 우선시되어야 했다.

**

명훤은 주언을 놔두고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주언은 곧장 따라나서는 대신 화장실 안에 남아 세면대 앞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술을 병째로 마시고 울어서 그런지 얼굴은 터질 것처럼 붉어진 채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랫입술을 짓씹은 것도 모자라 거칠게 부딪혀 입술도 퉁퉁 부어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줬다니.”

주언이 자괴감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제 이런 몰골이 된 거지? 이런 모습을 보고도 달려들다니.

충격적인 자신의 모습에 주언이 찬물을 세게 튼 후 연거푸 세수했다.

“하…….”

앞머리가 젖어 이마에 달라붙었다. 주언은 앞머리를 정돈하며 아까와 확실히 대조된, 찬물에 원래의 색을 되찾은 얼굴을 바라봤다.

아까 전까지 취하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냉수마찰로 정신을 차리자, 아까의 자신은 여전히 조금 취해 있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에서 나가려는데 발끝에 뭐가 걸렸다.

“약통?”

약통을 주워든 주언은 투명한 약통 속을 확인해 보았다. 주언도 아는 약이었다. 그리고 주언은 이 약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았다.

명훤의 것이 분명한 약이었다.

던전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던전에 들어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안다. 특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능력이 없는 가이드인 주언에게는 더더욱.

주언이 괜히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려 보았다. 평소에 약을 들고 다니지는 않지만, 윤재가 따로 챙겨줬던 약이 있었다. 하지만 그 기자와 옷을 맞바꿔 입은 탓에 주언에게도 약이 없었다. 소지품도 같이 챙겼어야 된다는 생각이 뒤늦게야 들었다. 던전에 이호윤도 휘말렸을 확률이 높았다. 몇 년 사이에 이호윤의 가이딩이 명훤에게 더 잘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호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오히려 주언의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역시 나도 가야겠어.”

명훤은 파악하지 못한 던전에서는 힘을 필요 이상으로 쓰는 경향이 있었다. 주언이 비장한 모습으로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쿨럭, 쿨럭!”

불이라도 난 것처럼 희뿌연 연기가 주언을 향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왔다. 반사적으로 기침하던 주언은 문득 연기에서 매캐한 냄새가 아닌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향긋한 냄새가 난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게 무슨 냄새지?”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천천히 걸었다. 이 공기를 마시면 안 될 것 같은데 시야가 차단되어 있었다. 숨을 참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이 연기에서 벗어나기 전 냄새를 들이켜고 말았다. 폐 안쪽까지 깊숙하게 스미는 향기에 순간 머리가 빙글 돌았다. 짙은 공기의 농도가 익숙했다.

“아까 직원은 어떻게 화장실까지 찾아올 수 있었던 거지?”

그 생각까지 미치자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쫙 끼쳤다.

“…맙소사.”

애초에 그 직원부터가 환영의 일부였다. 언제부터 환상에 빠져있던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여기서 더 이상 환영에 속지 않으려면 사방에 깔린 연기를 들이켜지 않으면 된다.

숨을 멈춰보려고 했으나 이 넓은 장소에서, 앞이 보이지도 않는 상황에서 숨을 오래 참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아, 하아. 미친.”

주언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여명훤조차 눈치채지 못한 정도면 화장실 안에 있을 때부터 던전 안에 휘말렸다는 소리다. 폐에 안개가 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규모나, 명훤이 속아 넘어갈 정도의 능력을 보면 이 던전은 결코 낮은 등급이 아닐 것이다.

‘그냥 명훤이 뒤를 따라갈 걸 그랬어.’

뒤돌아 갈 곳도 없었다. 주언은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주 이상하게도 마치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고, 자신이 안개가 인도하는 대로 걸어가는 것 같았다. 주언은 안개를 거스르지 않고 걸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안개의 농도가 짙어졌다. 눈을 쉼 없이 깜박거려도 눈은 이 안개에 적응하지 못했다.

킥킥.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 부근에 닿았다.

휙!

주언은 재빨리 반응해 뒤돌아보았으나 이미 뒤에 느껴졌던 존재감은 사라진 후였다. 일반 던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런 류의 던전은 겪어본 적 없었다.

그나마 기억난 건 이탈리아에서 발생했던 케이스와 비슷한 던전 정도라는 것이다.

‘정신 계열 몬스터는 정말 까다로운데.’

정신 계열 몬스터가 있는 던전은 케이스가 별로 없고, 다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파악할 수 있는 상황이 극히 드물었다. 다만 아는 건 일반 던전과 다르게 꼭 육체적으로 싸우는 것만이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클리어 조건이 뭘까.’

주언은 곧 느릿한 걸음을 멈췄다. 시야가 보일 정도로 안개가 옅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청색 문이 정체를 드러냈다.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크고 둔중해 보이는 문이다.

끼이이익-

주언이 문을 인지하자, 문이 주언이 들어오길 바란다는 듯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잠시 주춤했으나 곧 주언은 마음을 다잡았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주언은 천천히 문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킥킥.

웃음소리가 귀 안에서 울렸다. 자신이 반응하길 바라는 노골적인 뉘앙스가 느껴지는 것 같아 주언은 웃음소리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주언의 짐작이 정답이었는지 곧 귓가에 닿던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주언은 주변을 살폈다. 등급이 낮은 대다수의 던전처럼 동굴 형태로 되어 있었다. 동굴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지금은 또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데.”

아까의 연기는 주언도 처음 보는 종류였는데, 생긴 던전은 가장 평범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던전을 빠져나온 건가?’

비장하게 안에 들어갔던 게 우습게 조금 더 걷자 아까 익숙한 곳이 보였다. 홀 밖에 있는 복도였다. 아주 운 좋게 던전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구멍을 발견한 것일지도 몰랐다. 주언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던전을 빠져나온 건가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주언은 곧 다른 사람의 인기척을 느꼈다. 복도 끝에 한 남자가 벽에 기댄 채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몸을 웅크리고 있는 상대는 어떻게 봐도 일반인이었다. 주언이 서둘러 그 사람에게 향했다.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남자는 주언의 말에 대답하지도, 시선을 주지도 않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건가 싶었으나 가까이 가자 몸이 잘게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혼자 남으셔서 많이 놀라셨을 텐데 진정하시고… 저랑 같이… 앗!”

덥석.

몸을 숙여 상대를 안정시키려는데 웅크리고 있던 남자가 돌연 주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생각보다 강한 악력에 주언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내려 했으나 무리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든 사람과 시선을 마주하곤 주언은 얼빠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아는 걸 넘어서서, 지난 몇 년간 매일같이 봐왔던 얼굴이다.

“윤재?”

“네가 왜 여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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