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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74화 (74/112)

#74

음습한 목소리와 희번덕거리는 안광이 그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술에 취한 걸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위험한 냄새가 났다.

“던전에 휘말렸는데. 윤재 너는, 몸 괜찮아?”

주언도 그제야 윤재가 파티에 왔을 확률을 떠올려냈다. 일반인이 갑자기 던전에 휘말렸다. 과할 정도의 흥분은 충분히 설명되는 범위였다.

“내가 안 괜찮길 바라는 거 아니고?”

“윤재야. 일단 조금만 진정하고….”

파악할 수 없는 던전이 얼마나 무서운지 가장 잘 알았다. 그냥 낯선 상황에 빠져 패닉에 빠진 일반인과 다르게 주언은 이 안에서의 위험성을 싫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몸의 근육이 긴장으로 수축했다.

아까 들렸던 웃음소리는 분명 사람의 것과 비슷했다. 적어도 A급일 확률이 높았다.

“여명훤 보러 여기까지 쫓아왔어? 나 차버리고?”

“윤재야. 지금 여기가 그 얘기하기 좋은 장소는 아닌 것 같다.”

“항상 넌 그런 식으로 대화를 피하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주언이 걸어 들어온 쪽이 아닌 더 깊숙한 쪽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다른 복도 끝이 어둡다는 걸 자각한 주언이 그를 뒤쫓았다. 잠시 던전을 빠져나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여기 던전 안이야! 함부로 혼자 다니면 안 돼!”

주언이 손을 뻗었음에도 윤재의 팔이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다른 때라면 그냥 놔뒀겠지만 이곳은 던전 안이었다. 일반인인 윤재가 혼자 가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주언의 외침에 윤재는 속도를 늦추긴커녕 오히려 발을 재촉해 주언에게서 도망쳤다.

‘왜 저렇게 빠르지.’

주언은 반쯤 뛰다시피 달려가 윤재의 팔을 낚아챘다. 손끝이 차가웠다. 감정적으로 굴지만 그도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언성을 높이려던 주언은 한층 누그러진 어투로 달래듯 말했다.

“강윤재. 지금 여기서 감정적으로 굴 때가 아니라니까?”

“…….”

“일단 나가자. 내가 들어온 쪽이 그나마 나을 거야.”

주언이 윤재의 팔을 억지로 끌려고 했을 때였다. 퍽, 거친 힘이 주언을 밀어냈다. 주언은 갑작스러운 밀림에 균형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강윤재!”

이곳에 명훤을 보러온 건 맞지만, 위험에 빠진 윤재를 그대로 두고 갈 생각도 없었다.

“아직도 내가 너 다 받아주던 머저리로 보여? 하… 너 편하게 지내려고 나 다 받아줬던 거, 여명훤은 알아?”

하지만 윤재는 주언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감정이 격해졌는지 윤재의 눈에 핏발이 섰다. 윤재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주언을 보고 멈칫했으나 도와주는 대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허리에 손을 짚었다.

“뭐? 지금 그 얘기를 왜 여기서 해.”

“여기서 안 하면?”

“…윤재야.”

주언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런 특수한 상황 속에서 화만 내는 윤재가 이상했다. 주언이 가까이 다가가자 바닥을 보던 윤재가 고개를 퍼뜩 들곤, 순식간에 주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 그 키스 받아주지 말았어야지.”

“윽… 내가….”

윤재가 주언의 양어깨를 붙잡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아니면 그때 내가 네 옷에 손댔을 때 싫다고 말했어야지!”

음습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예전의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윤재야.’

‘내가 싫으면 밀어내.’

‘싫어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그럼… 밀어내지 마.’

그때의 감정도 속속들이 기억났다. 오래됐으니까, 자신의 곁에는 윤재밖에 없으니까. 오래 기다려온 윤재를 더 기다리게 하기 싫어서. 여러 이유가 떠올랐고, 주언은 다가오는 윤재를 밀어내지 않았다.

턱 끝을 잡는 낯선 손이 고개를 마주 보게 만들었다. 곧 등 뒤에 차가운 침대 시트의 감촉이 느껴졌다. 곧 뜨거운 숨이 입술 위에 닿았다. 자신의 몸 위에 느껴지던 둔중한 무게.

이토록 생생한 기억인데 어떻게 잊고 있었지?

주언이 이마를 꾹꾹 누르며 비틀거렸다.

“왜, 이제 나랑 붙어먹은 거 후회해?”

윤재가 주언에게로 다가갔다. 이성이 마비됐는지 윤재는 주언의 허리를 붙잡고 노골적으로 몸을 빈틈없이 맞물리게 했다.

“이거 놔.”

“어차피 전에도 했었는데, 왜. 싫어? 이제는 여명훤이 있어서? 나는 이제 네 안에서 버려졌는데 버린 새끼가 나대니까 혐오스러워?”

“윤재야. 너는 몰랐을 수도 있지만 지금 여기 던전 안이야. 정신 똑바로 차려. 우리 죽을 수도 있어.”

주언의 설득은 윤재에게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숙여 주언의 흰 목을 세게 깨물었다.

“읏.”

“아. 어차피 상관없으려나?”

“…뭐가.”

“여명훤은 훨씬 더 더럽게 굴러먹었으니까.”

멈칫.

윤재의 말에 주언이 멈칫했다. 몸을 맞붙이고 있어 주언의 작은 변화도 예민하게 감지해낸 윤재가 비죽 웃었다.

“어차피 너희 다시 만나도 잘 안 될 거 너도 알고 있잖아.”

“…….”

“두 사람 사이에 미래는 여전히 없어.”

주언은 말없이 윤재를 올려다보았다. 침대 시트보다 던전 바닥은 훨씬 더 차갑고 단단했다. 윤재와 지내며 뉴스를 잘 보지 않았지만, 불현듯 지나가던 사람들이 했던 말이나 자신과 관련 없는 뉴스라 대수롭지 않게 흘려넘겼던 말들이 수면 아래에서 떠올랐다.

‘여명훤은 국가 기관 소속이면 이런 스캔들은 조심해야지.’

‘매번 다른 사람들이던데, 연예인이나 유명인뿐이야? 일반인도 건드린다던데.’

‘소문으로는 같은 팀에 애인 있다던데. 그 애인 집이랑 인사까지 했다던데?’

뜨거운 눈물이 차게 식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윤재야.”

“왜? 이제야 내가 아쉬워?”

주언이 손을 뻗어 윤재의 뺨을 쥐었다. 윤재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곧 주언이 받아들인다는 신호라고 이해했는지 윤재가 웃었다. 근래 본 웃음 중에 가장 밝은 웃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심장이 지끈거릴 정도였다.

“우리 이러는 모습 명훤이한테도 보여줄까?”

윤재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럴까.”

주언이 손을 윤재의 목에 둘렀다. 윤재가 안심하고 주언의 피부 위에 흔적을 새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주언아. 너 뭐 해?”

뒤에서 명훤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언은 명훤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항상 여명훤이 싫었어, 나는.”

윤재의 목소리에 만족감이 서렸다.

“그래?”

주언의 양팔에 힘이 들어갔다. 주언이 자비 없이 윤재의 머리를 비틀었다. 윤재가 반항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끼기긱!

기이한 소리가 나며 윤재의 머리가 꺾였다. 뼈가 으스러지는 감각이 소름 끼쳤다. 주언은 고개가 꺾인 윤재를 발로 차 냈다.

“…나한테… 왜….”

“…미안하다.”

주언이 담담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너… 미쳤어? 지금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

윤재가 부자연스럽게 꺾인 고개를 돌려 주언을 바라보았다.

“너 진짜 너무하다. 나한테 이제 받을 거 없어서 사람들 없을 때 날 죽이려는 거야? 원래 이렇게 무서운 애였어?”

목이 뒤틀린 채 끊임없이 원망 섞인 말을 쏟아내는 윤재의 모습에 손끝이 저릿했다. 주언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여기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다 환상이잖아.”

그렇지 않으면 또 이 환상이 진짜처럼 느껴질 테니까. 주언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를 한 건 환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윤재의 모습에 망설임 없이 행동한 것에 묘한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환상이라니. 환상이 아니라면 어쩔 건데? 너는 날 불구로 만든 거야. 나는 널 살렸는데!”

빽빽거리는 비명 소리가 던전을 메아리쳤다. 주언은 무릎을 털고 일어나며 윤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너 윤재 아니잖아.”

“…….”

“…….”

두 사람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윤재의 눈이 돌연 도로록 굴려졌다.

“들켰네?”

그 말을 끝으로 윤재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가, 연기처럼 녹아내렸다. 예상은 했지만 익숙한 얼굴이 기괴하게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으나, 당황함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어, 어떻게 알았지?”

몽마에게 괜찮은 척한 것을 들키지 않았는지 킥킥 비웃기만 했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이 서렸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니야.”

지금 기억은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억지로 쑤셔박힌 것이다. 마치 맞지 않은 퍼즐 조각을 힘으로 넣으려는 인위적인 감각이었다.

아마 기억을 되찾기 전이었다면 주언도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언은 불과 얼마 전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았다.

기억을 되찾는 감각을 이미 알고 있는 주언이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윤재의 모습은 자신의 생각에서 꺼낸 것처럼 선명했으나, 윤재가 말을 할 때마다 없는 기억이 억지로 상기시켜지는 것에 주언은 윤재도 환상의 일부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는지 벽을 뚫고 몽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한 번에 소화하기 힘든 사람이 둘, 둘이나 있어서 그런 거지, 네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거든?”

“둘이나 있다고?”

“두, 둘 다 하지 말, 고 한, 한 명 만 제대로 할걸.”

사람의 외형과 흡사했다. 그저 귀가 조금 더 뾰족하고,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었으며, 눈에는 흰자가 없었다. 그리고 사람보다 몇십 배는 더 작았다. 작은 강아지 정도의 크기였으나 존재감은 상당했다.

‘게다가 대화까지 통한다니.’

최악이다. 정말 좋지 않은 신호였다. 당혹감이 주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표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내내 신경 썼으나 이번만큼은 신경 쓰는 걸 잠시 잊을 정도로 당황했다. 주언이 창백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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