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이 던전이 A급이면 도리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 재해에 가까운 존재가 감정적이기까지 하다니 골치가 아팠다. 장단을 맞출 수 없으니 어떻게 튈지 예측하기도 어렵다.
불현듯 몽마가 기분 좋은 일이 생각났는지, 서슬 퍼런 눈알을 도로록 굴리며 히죽 웃었다. 히죽 웃자 볼까지 올라가는 모습이 기괴했다.
“히힉! 다른 쪽을 더 공들인 보람이 있네! 히히힉!”
장난기 가득했던 웃음소리가 서서히 귀기 어리게 바뀌었다. 온몸에 닭살이 돋을 정도로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몽마가 허공을 빙그르르 돌았다. 마치 너무 신나서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히힉!”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는 몽마의 모습에 이상하게 불안해졌다. 조금 전까지 불안해했는데. 웃으며 다른 곳을 보는 것처럼 허공을 응시하는 게 께름칙했다.
“뭐가 그렇게 웃겨?”
“궁금해? 궁금해? 궁금해?”
몽마가 주언의 곁을 빙글빙글 돌았다. 주언은 표정에 감정이 드러내지 않도록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 몽마는 흥미를 잃을 것이고, 그러면 지금처럼 시간을 벌 기회조차 잃을 것이다. 주언은 땀이 짙게 밴 손을 무심하게 바지에 닦아냈다.
“…어.”
주언의 말에 몽마가 어린아이처럼 꺄르르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워, 원래 내, 내가 컨트롤 하기 힘, 힘들었는데 알, 알아서 잘, 걸려들, 었거든. 히히, 히히힉!”
어지간히 신난 듯 보였다. 몽마가 거만한 목소리로 주언에게 자랑했다.
“히힉! 곧 폭주할 거 같은데 너, 너도 가, 같이 휘말리면 히힉! 재, 재밌겠다!”
몽마가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으며 박수를 치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곤 곧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주언은 연기가 제 의지를 가진 채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땀에 젖은 목을 손으로 닦아냈다.
스윽. 땀과 다른 감촉에 주언이 손을 확인해 보았다.
“아, 아까….”
땀을 흘린 줄 알았는데 피였다. 생각보다 상처가 심했다. 가짜 윤재가 목을 깨물었을 때 생긴 상처였다. 상처를 인지하고 나니 고통이 선명해졌다. 상처 부위를 조심스럽게 더듬거리며 살폈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다. 피가 꿀렁 하며 흘러내려 옷을 흠뻑 적셨다.
안개가 가시자 시야가 선명해졌다. 동굴 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것조차도 환상이었다니.”
주언이 질린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주언이 있는 곳은 방금 나온 줄 알았던 크리스털 홀 앞이었다. 조금 전까지 시끌벅적하게 들렸던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끊기지 않았던 장소가 적막에 가득 차 있었다.
죽은 도시 같았다. 크리스털 홀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주언은 눈앞에 보인 장면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홀 중심에 사람들이 마치 탑처럼 쌓여 있었다. 미동 없는 사람들의 모습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덜컥 겁이 들었으나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여기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은 주언뿐이었으니까. 덜컹 내려앉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주언은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주언이 조심스럽게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시체가 산을 이룬 것 같은 모습은 생각보다 큰 공포였다.
주언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의 코 밑에 손을 대어보았다.
새액. 새액.
안색이 창백하긴 했어도 숨은 제대로 쉬고 있었다. 죽은 게 아니라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후우… 다행이다.”
아까 몽마가 두 사람만 공들이고 있었다는 얘기를 생각해 봤을 때, 일반인들은 관심 없어서 별 해를 가하지 않고 던져뒀을 거라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럼 다른 한 사람은…….’
주언은 안 좋은 생각을 하는 걸 멈추고, 일단 크리스털 홀에 비치되어 있는 커다란 린넨 냅킨을 목에 빙빙 둘러 목을 압박해 상처를 지혈했다.
그러곤 주언은 겹쳐져 있는 사람들을 일렬로 눕히기 시작했다. 위에 겹쳐 있던 사람들을 치우자, 맨 밑에 제일 창백하던 남자의 얼굴에 혈색이 되돌아왔다. 땀이 줄줄 흘렀다. 사람을 옮기는 와중에도 아무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곧 구조하러 올 거예요.”
주언은 아무도 듣지 못할 말을 내뱉으며 허리를 쭉 폈다. 주언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홀 내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몽마가 고작 사람들을 정리하라고 이곳에 자신을 보내진 않았을 터였다.
‘그럼 남은 건….’
주언이 입장했던 반대편에 있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크리스털 홀 전용으로 딸려 있는 VIP 휴게실.
피도 많이 흘렸고, 사람들을 옮기느라 체력에 한계가 온 것 같았지만 주언은 걸음을 재촉해 걸었다.
불길한 예감.
자신이 아니라 다른 한 사람은 누구일까. 몽마는 어떤 기준으로 능력을 쓸 사람을 선별했을까. 몽마는 강했고, 대부분의 사람은 관심 없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답은 아주 간단했다. 던전 안에 들어가기 위해 선택받은 사람들. 그리고 이 크리스털 홀 안에 초대받았던 사람 중 몽마가 눈독 들일 만한 인물은 한 명밖에 없었다.
달칵.
휴게실로 향하는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마치 왕좌에 홀로 앉아 있는 고독한 왕처럼 명훤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주언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격이 주언을 스쳤다.
타다닥!
의자 손잡이에 매달려 명훤을 살폈다. 명훤은 의식이 없었다. 명훤의 기운이 곧 터질 것처럼 사납게 일렁거렸다.
“명훤아.”
명훤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질 때마다, 기운이 더욱 거세졌다.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 피부를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무서웠다. 오장육부까지 명훤의 기운이 진득하게 스몄던 감각이 아직도 선연했다. 가이딩을 하다가 부담에 못 이겨 기절까지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래도….’
꿀꺽. 주언이 마른침을 삼켰다. 의자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예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명훤을 가이딩하는 건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가이딩 하는 걸 가만히 보는 건 더더욱 싫었다.
주언이 천천히 명훤의 이마에 제 이마를 겹쳤다. 주언이 명훤의 뺨을 쥐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제대로 얼굴 보는 건 기억 되찾고 처음이네.”
밝은 빛 아래 명훤의 모습은 주언이 기억하는 모습과 조금 달라졌다. 전보다 성숙해진 탓에 분위기까지 더해졌다. 조금 야윈 모습이 그의 모습을 조금 더 위태롭게 보이게 만들었다. 주언은 결이 조금 거친 명훤의 뺨을 쥐었다. 따뜻한 이 뺨에 닿기 위해 너무 오랜 길을 걸어왔다.
이런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지만 주언은 아주 잠시 오롯이 단둘만 남겨진 감각을 느꼈다.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주언은 명훤의 입에 제 입을 겹쳤다. 아랫입술을 깨물자 입이 반사적으로 벌어졌다. 주언은 망설이지 않고 혀를 얽었다.
얽히는 혀를 타고 그의 날뛰는 기운이 주언에게 터져 나왔다. 그의 거센 기운이 주언의 혈관을 타고 흘러들어 그의 속을 헤집었다.
“흣.”
파지직.
기운이 부딪히며 거세게 반발했다. 오랜 시간 동안 약에 의존해 왔던 탓에 몸이 가이딩을 하는 것을 잊은 것처럼. 에스퍼에게 가이딩은 아주 중요했다. 가이딩을 받지 않으면 언제 힘이 폭주해 미쳐버릴지 모르니까. 가이딩은 생존에 필요한 일이었다.
‘만에 하나 접촉 가이딩이 싫었다면 최소 방사 가이딩이라도 받았을 텐데.’
모든 건 일어나서 물어보면 된다. 지금 상황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주언은 물러서는 대신 명훤을 있는 힘껏 껴안았다. 농축된 이 기운을 어떻게 혼자 감당하고 살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마력의 농도가 짙었다.
억누르는 기운이 조금만 새어 나왔어도 위험했을 정도였다.
‘몇 년 동안 제대로 가이딩을 안 받은 건가?’
피부가 따끔거리고, 속은 토할 것처럼 울렁거렸다. 구석구석까지 후벼 파이는 것 같았다.
“읏.”
주언은 그를 받아들이며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키킥.
또다시 뒤에서 인기척과 함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가, 가만히 있을 줄 알, 알았어?”
아직 가이딩을 다 하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했다. 지금 주언의 몸 상태로는 지금보다 빠르게 가이딩 하는 것은 무리였다.
몽마의 말을 끝으로 안개가 다시 자욱해지기 시작했다.
**
눈을 깜박거리자 서서히 시야가 되돌아왔다. 주언은 가장 먼저 자신의 앞을 살폈다.
“명훤아…?”
자신의 바로 앞에 있어야 할 명훤이 없어졌다. 주언이 서 있는 곳은 특수능력기관 본사 앞이었다. 주언은 현실감 넘치는 광경에 얼굴을 굳혔다. 스치는 바람마저 너무 생생했다.
던전은 마력을 측정해서 등급을 지정한다. 대부분 여러 개체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던전에는 몽마 한 마리밖에 없었다. 보통 보스 몬스터는 맨 마지막에 나오지만, 지금은 몽마 한 마리만이 이 던전 안을 배회하고 있었으니까.
고로 이 던전이 A급이라고 측정된다고 해도, 몽마의 등급은 일반 A급 보스 몬스터 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소리다.
‘적어도 S급 보스 몬스터와 동급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어.’
빠아아앙-!
끼이이익!
시끄러운 클랙슨 소리에 주언이 상념에서 퍼뜩 깨어났다. 안개가 가셔서 다 잘 보이는 줄 알았는데, 안개가 눈에 고인 듯한 기분에 시야가 좁게 보였다.
“정신 똑바로 안 차려!”
급정거를 한 차 창문이 열리고 걸걸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죄송합니다.”
주언은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얼떨결에 사과를 했으나 운전자의 화는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주언은 자신이 인도에 서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운전자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