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76화 (76/112)

#76

주언이 미간을 찡그려 사람을 보려고 했으나 눈 안에 굴러다니기 시작한 안개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 느껴지는 차가운 바람과 발밑에 보이는 아스팔트 바닥으로 자신이 있는 곳을 알아차린 주언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밖을 이토록 생생하게 구현해낼 수 있다니. 주언은 새삼 몽마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빠아아앙!

다시금 울린 클랙슨 소리에 느릿한 걸음으로 무단 횡단을 하던 사람이 멈춰 섰다.

운전자는 보란 듯이 빨간불에, 신호등도 없는 곳에 멈춰 선 거구의 남자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미친놈한테 잘못 걸렸네.” 하고 중얼거리며 아까보다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는 됐으니까 그냥 지나가세요.”

“…….”

하지만 여전히 남자는 대답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운전자는 흘끗 시계를 바라보았다. 항상 조금씩 일찍 출근하긴 하지만 이 상태로 가다가는 회사에 늦을 터였다.

“귀먹었어요? 이봐요!”

“…….”

침착했던 게 무색하게 운전자의 말투는 다시 거칠어졌지만,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멀쩡하게 생겨서는 안 되겠네. 경찰 부릅니다?”

남자의 월등한 피지컬에 차마 차에서 나갈 용기는 나지 않았는지 운전자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명훤 씨!”

하지만 운전자가 통화 버튼을 누르기 직전, 뒤에서 큰 소리가 났다.

“여명훤?”

주언은 크게 불린 이름에 한숨처럼 속삭였다.

왜 몽마는 이 장면을 보여주는 걸까, 이해할 수 없어 멍 때리며 보던 주언이었다. 주언은 귀를 의심했으나, 다시금 저 멀리서 누군가 “명훤 씨!” 하며 외쳤다. 멀리서 여기까지 허둥지둥 다가온 사람이 명훤의 팔을 잡아당겼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추운 날씨에 윗옷 하나 안 걸치고, 슬리퍼를 짝짝이로 신은 채였다.

“아이고. 여기에 있었네.”

강노훈은 화내는 대신 명훤을 발견했다는 안도감이 컸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명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봐요!”

운전자가 소리치자 강노훈이 명훤을 대신해 운전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서….”

“아침부터 재수가 없으려니까.”

“죄송합니다.”

“그쪽이 저 사람 보호자예요?”

“네, 네. 죄송합니다.”

운전자는 더 화내려다가 계속 사과하는 강노훈을 보곤 참았다.

‘멀쩡하게 생겼는데 제정신 아니네.’

보호자가 이 상황에 익숙하다는 듯 계속 사과하는 걸 보면.

“사람 간수 좀 잘하세요.”

“네에.”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명훤은 강노훈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강노훈은 익숙하게 명훤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인도로 들어왔다. 그제야 막혔던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체 이 시간은 어느 때일까. 왜 이 순간을 보여주는 걸까. 겨울의 냉기가 발끝을 타고 주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어도 누가 봐도 명훤이었다. 주언은 항상 명훤의 뒷모습만 봐도 바로 알아차렸다. 멀리 있어도, 뒷모습만 봐도 주언의 시선은 항상 바로 명훤을 찾아냈었다. 기억을 잃었을 때마저도. 그런데 왜 지금은 명훤을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

명훤이 저렇게 넋 놓은 사람처럼 행동할 리 없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었다. 주언은 자신이 사라져도 명훤이 제 일을 충실히 해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책임감이 크고 일에 관해서는 완벽주의에 가까운 성격이었으니까.

자신이 사라진 게 못내 괴롭겠지만, 그 사실이 명훤의 일상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주먹 쥔 주언의 손바닥 안에 선명한 손톱자국이 새겨졌다.

그러니까 저렇게 넋을 놓고 부랑자처럼 서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닮았어도 다른 사람일 거라고, 당연히 그렇게 믿었다.

“명훤아.”

주언이 뒤늦게 두 사람을 쫓기 시작했다.

“여명훤!”

도대체 왜 그러냐고, 자신 때문에 이렇게 된 거냐고 묻고 싶었다.

째앵!

하지만 손은 명훤에게 닿기 전 튕겨져 나갔다.

투명한 유리막이 두 사람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치 이 순간에 주언은 환영받는 손님이 아니라는 듯이. 주언이 얼빠진 사이 두 사람이 멀어졌다.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 방법도 있지만, 그럴 수 있을 리 없다.

짝.

주언이 제 양 뺨을 내리쳤다. 이 꿈에 홀려서는 안 된다. 주언이 그러했듯 이 꿈은 과거가 아니라 몽마가 만들어낸 가짜일 뿐이다.

‘이 꿈에서 벗어나려면 명훤이가 깨어나야 해.’

이 세상은 명훤이 그리는 악몽이었다. 모든 건 가짜다. 가짜라도 이렇게 망가진 명훤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생생한 장면들이 괴롭게 주언을 파고들었다.

“명훤 씨.”

강노훈이 명훤을 불렀다. 명훤은 여전히 멍했다. 명훤은 마치 명령 값을 입력받은 기계처럼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엣취!”

재채기를 내뱉은 강노훈은 추운지 양팔을 껴안았다. 노훈은 명훤을 억지로 이끌지 않았다. 그저 갑자기 도로에 뛰어들거나, 신호를 무시하는 것만 제지한 채 명훤이 가는 길을 방해하지 않았다.

명훤은 목적지가 확실해 보였고, 그 사실을 강노훈도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는….’

명훤이 걸음을 멈춘 곳은, 주언과 명훤이 마지막으로 같이 있었던 D 백화점 앞이었다.

모든 게 무너져, 여기가 이전에는 건물이었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제 사람들은 무너진 건물에 익숙해진 듯, 모두 무심하게 잔해 옆을 지나쳐 갔지만 명훤은 아니었다.

“아니. 명훤 씨 신발도 안 신었어?”

뒤늦게 명훤의 발을 확인한 강노훈이 말리려 했으나, 이미 명훤은 안에 들어선 후였다.

아직 정돈되지 않아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발이 찢어졌는지, 명훤이 맨발로 그 위를 걸을 때마다 부서진 잔해 위에 혈흔이 남았다.

터벅.

터벅.

하지만 명훤은 자신의 발이 다치는 것에 관심 없는지 막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강노훈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건물이 형태를 잃어 어림짐작할 수밖에 없지만 이곳은 주언과 명훤이 마지막으로 함께 있던 곳이었다. 명훤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랜 침묵 끝에 명훤이 처음 입을 열었다.

“주언아.”

명훤은 오랫동안 말하지 않아 거칠어진 목소리로 주언을 불렀다. 크게 뜨인 주언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순식간에 그렁그렁 차올랐다.

“주언아… 내가… 내가 대신… 다칠게… 내가 너 대신… 뭐든 할 테니까… 그러니까.”

괴로움에 얼룩진 얼굴이 잘 벼려진 칼처럼 주언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어쩌면 눈앞의 명훤도, 아까의 윤재처럼 환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주언은 도저히 명훤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널 걱정하지, 왜 날 걱정해.”

명훤이 잔해를 집어 들어 끌어안았다. 마치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껴안은 명훤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치 그 잔해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기라도 할 것 같아 오금이 저렸다.

“나도… 같이 갈까. 너 외로운 거 싫어하잖아.”

명훤이 애원하며 말했다. 곧 명훤이 잔해 조각을 든 손을 높게 들었다.

쨍그랑!

주언의 앞에 있던 막이 깨졌다. 주언이 명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여명훤! 너 정신 안 차려?”

하지만 달리면 달릴수록 명훤은 멀어질 뿐 가까워지지 않았다.

욱신.

“흐윽…!”

파편이 뇌를 찌르는 것같은 통증에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짚었다.

‘헤어지기 싫어.’

‘…그래.’

이건 아직 자신이 되찾지 못했던 기억의 조각이다. 주언은 다른 조각이 되돌아오길 바랐다.

스스스스스슷.

하지만 안개가 다시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환상에 갇혔을 때보다 괴로웠다.

“키킥. 지, 진작 이렇게 할걸. 괴, 괴로워? 키킥. 괴로워? 괴로워? 괴로워?”

아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괴로운 얼굴을 한 주언을 보며 몽마는 만족스러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어차피 이건 깨질 꿈이고,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 뿐이야.”

입술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아랫입술을 짓씹는 주언을 보며 몽마는 차가운 비웃음을 지었다.

“키킥. 키킥. 과연 그럴까? 키킥.”

몽마가 주언을 버티게 한 믿음에 작은 돌 하나를 던졌다.

차단됐던 시야가 되돌아왔을 때는 주언이 알고 있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여명훤이 있었다.

타앙, 탕.

짧은 총성과 함께 몬스터의 머리에 구멍이 뚫렸다. 깔끔한 솜씨였다. 압도적인 실력 차에 덩치가 집채만 한 몬스터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도 이해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바닥에 추락했다.

쿠우웅.

머리가 꿰뚫린 자국이 없었으면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싸운 흔적도, 피도 흐르지 않은 깔끔한 실력이었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보스 몬스터를 처리한 명훤이 무감한 시선으로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끄그그그!

서윤진도 남은 몬스터를 빠르게 처리한 후, 가이딩을 받기 위해 다들 모여 있는 장소로 향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주언이 기억하고 있는 익숙한 사람들로 구성된 팀원들 사이에서 명훤은 이질적으로 보였다.

실제로 관계는 나쁘지 않은데 지금은 이 팀에서 명훤만 붕 떠 보였다. 명훤은 다른 사람들을 지나칠 정도로 신경 안 썼고, 다른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명훤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 가이딩 받으실래요?”

“됐습니다.”

이지우가 용기 내서 한 말에 싸늘한 일축이 되돌아왔다. 명훤은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냈다. 약을 처방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거의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약통이 비어 있었다.

쯧.

명훤은 약을 어금니로 짓씹으며 혀를 찼다. 한 번에 많이 처방받을 수 없어서 귀찮은 모양이었다. 흉포하게 일렁이던 기운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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