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77화 (77/112)

#77

“가이딩 받는 게 낫지 않겠어요?”

서윤진이 갈무리되는 명훤의 기운을 느끼면서도 재차 권유했다.

“괜찮습니다.”

“…명훤 씨가 괜찮다면 상관은 없지만요. 가이딩 너무 오래 안 받으면 안 좋으니까.”

“괜찮습니다.”

명훤이 재차 단호하게 거절해서 더 물을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서윤진은 더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곤 입을 다물었다.

가이딩은 강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명훤은 심리적으로 가이드 거부증에 가까웠기 때문에 더더욱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생각보다 일 일찍 끝났다고 수거 팀한테 연락 돌릴 테니까, 먼저 가고 있어.”

강노훈이 어색해진 공기 사이로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훤 씨는 안 가?”

팀원들이 먼저 앞서 나갔을 때 강노훈과 함께 남은 명훤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또 자는 사이에 D 백화점까지 갔다 왔나 보더군요.”

정신을 차린 명훤이 초췌해진 얼굴로 강노훈에게 사과했다. 그때 명훤이 넋을 놓았던 것처럼 보였던 건 자고 있었기 때문이구나 싶었다.

“괜찮아. 한동안 호텔에 묵기를 잘했다.”

제법 심각한 일로 생각했을 텐데도, 강노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저 때문에 호텔에 같이 묵으시지 않아도…….”

명훤은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는 게 영 어색한지 말했으나, 강노훈은 빠르게 명훤의 말허리를 끊어냈다.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강노훈이 연락 끝났으니 어서 나가자며 명훤을 이끌었다. 던전에서 빠져나왔을 때였다.

Rrrrr.

명훤은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은 듯 보였으나 전화 소리에 대화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였다. 전화가 끊어지기 직전. 명훤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여명훤 씨 되시나요?

“예. 무슨 일이시죠?”

AGT의 대규모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이번에 새로 꾸려진 TF 팀의 팀장이라는 짤막한 소개와 함께 바로 본론이 이어졌다.

-신원 조회 좀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예?”

-우주언 씨 보호자로 등록되어 있던데 맞으시죠?

“예.”

전화 너머에 있는 상대의 목소리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명훤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명훤의 어두워진 목소리에 상대가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이번에 D 백화점 잔해를 정리하다가 시신이 몇 구 더 발견되었다고 추가 연락이 되었는데 아무래도 시신이 너무 크게 훼손돼서요.

“…….”

-함께 발견된 소지품으로 신원 조회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전화를 쥔 명훤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여명훤 씨?

“…….”

-여명훤 씨? 전화가 잘 안 들리십니까? 여명…….

콰직!

핸드폰이 순식간에 두 동강 났다.

“…갑자기 왜 핸드폰은 부수고 그래. 누구한테 연락 왔는데 그래?”

옆에 있던 강노훈이 두 동강 난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명훤 씨 손에서 피가…!”

주먹을 너무 세게 쥐어 손톱이 손바닥 안까지 파고들어 손바닥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괜찮아요.”

손이 괜찮다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것인지 모호한 말이었다.

“명훤아. 이거 다 환상이야. 괴로워할 필요 없어. 명훤아…! 꿈에서 깨어나면 되는 일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괴로워하는 표정 짓지 말아줘.

주언이 옆에서 명훤에게 매달렸으나, 명훤은 주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스스스스슷.

안개가 또다시 두 사람 사이에 파고들었다.

“여명훤!”

주언이 명훤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비탄에 젖은 어두운 표정을 보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에 미칠 것만 같았다. 짙은 무력감이 주언을 휘감았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소모되는 감정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번에는 어두운 방 안이었다. 익숙한 곳이었다. 두 사람이 같이 살던 집. 집 안은 불 하나 켜지 않아 어두웠다.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은 명훤은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었다. 적막만이 가득 찬 거실에 숨이 막혔다.

“명훤아. 제발 이러지 마.”

주언이 애원하듯 말했으나, 여전히 명훤은 주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째서 명훤은 이 괴로운 순간들이 거짓이라고 인지하지 못하는 걸까. 자신이 알던 명훤이라면, 이런 악몽쯤은 금방 털어버렸을 텐데.

주언은 명훤의 옆에 앉아 어깨에 뺨을 기대었다. 아무리 소리쳐도, 때려도 명훤은 주언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고독 속에 매몰되어 가는 명훤을 보는 게 괴로웠다. 언제쯤 명훤은 이곳이 현실이 아님을 알아차릴까.

창문 밖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명훤이 중얼거렸다.

“돌아온다고 말하지 말지….”

명훤이 눌러왔던 진심이 어둠을 틈타 툭 터져 나왔다.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에서 그리움이 묻어나왔다. 그 말에 주언이 고개를 들었다. 명훤의 읊조림에 누군가 강하게 주언의 뒤통수를 갈긴 것처럼 얼얼해졌다.

‘명훤아. 나 꼭 돌아올게.’

주언의 머릿속에 또다시 과거의 말이 스쳤다.

쿵.

가장 최악인 지금 이 순간에 주언의 마지막 기억 조각이 되돌아왔다. 몽마가 만들어낸 가짜가 아니었다. 지금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 악몽은, 명훤이 과거에 겪었던 진짜 일이었다.

명훤에게 가짜 세상을 만들어서 보여줄 필요 없었다. 명훤에게 있어 가장 큰 지옥을, 명훤은 몇 년 동안이나 걷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저 과거만 되풀이해 주면 된다. 그러면 여명훤은 알아서 자멸할 테니까.

명훤은 돌아오겠다는 주언의 한마디에 몇 년이나 버텼으나, 그 말은 이미 해질 때로 해졌다. 제 몫을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썩은 뼈대가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유지하고 있는 거였다. 바람 한 점에도 무너질 수 있는 상태였다.

지금 주언이 봤던 모든 건 가짜로 만들어진 상황이 아니었다. 명훤에게는 한때 현실이었던 순간들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식탁에 덩그러니 올려져 있던 인형도, 명훤이 말을 번복하며 사랑한다고 했다던 말도. 그리고 온전치 못한 기억에 상처받아, 명훤에게 똑같이 상처 주고 싶어 어차피 헤어진 사이라고 매정하게 말하던 얼마 전의 자신까지 떠올랐다.

분명히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그 말 하나만을 믿고 기다려 달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했다.

자신이었다. 자신이 여명훤을 망쳤다.

이제야 주언은 자신의 기다려달라는 말이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말은 너무도 이기적이었다. 자신 때문에 명훤은 악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건 자신의 탓이었다. 주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위에 앉아 있는 명훤을 보았다. 죄책감이 폐부를 짓눌렀다.

“…내가… 떠나는 편이 나을까.”

돌아온 것 자체도 이기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몰랐다. 기억을 그렇게 되찾고 싶어 했는데. 막상 되찾은 순간 속이 너무 쓰렸다.

‘정신 차리자.’

여기서 감정에 휩쓸릴 때가 아니었다. 그건 몽마가 바라는 일일 테니까.

주언이 이성을 되찾기 위해 명훤에게서 조금 멀어지려고 할 때였다.

덥석.

뜨거운 손이 주언의 손목을 낚아챘다.

“간다고?”

내내 허공을 맴돌았던 시선에 초점이 잡혔다. 명훤은 어느덧 주언을 오롯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파지지직-!

잡힌 손 너머로 그의 맹렬한 기운이 주언의 혈관을 파고들었다. 뾰족한 기운이 주언의 내부를 휘저을 때마다 따끔거렸다.

“지금 여기 던전이야.”

정신을 차린 듯한 명훤에게 주언이 빨리 설명을 마쳤다.

파지지직-!

“다른 게 다 꿈이라도 당장 내 눈앞에 있는 너는 진짜잖아.”

“언제 깨어났어?”

“네가 나를 떠난다고 한 그 순간에.”

“그런 말을 한 이유가 있어. 다 설명할게.”

주언이 명훤을 진정시키기 위해 차분해진 어조로 말했으나, 주언의 손을 잡은 힘은 더욱 강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떠난다고?”

“아파. 놔줘.”

“또 그렇게 사라지게 둘 줄 알고.”

“안 도망갈게.”

“거짓말.”

주언이 명훤의 팔을 떼어내려고 했으나 그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난 명훤이 주언을 품 안에 가뒀다.

“주언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달아서 죽고 싶은 이름을 불렀다.

“죽어도 내 곁에서 죽어.”

스산한 목소리는 몽마의 안개와 비교할 수조차 없는 빠른 속도로 주언의 목을 타고 들어가 주언의 심장을 휘감았다.

“내가 같이 죽어줄 테니까.”

옥죄어 오는 강한 힘 끝에 읽히는 불안감에 주언이 벗어나려는 걸 멈췄다.

파지지지직.

쨍그랑!

쨍그랑!

사방에서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앉아 있던 소파부터 시작해서 집, 하늘까지 가루가 되어 부서지기 시작했다.

부서져 내린 후 남은 건 어둠이었다.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높낮이를 알 수 없는 공백의 공간.

가, 갑자기 이게 뭐지?

몽마도 이 순간이 예상 밖이었는지 허공에서 나타나 빙글빙글 돌며 패닉에 빠졌다.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같이 죽어줄 테니까. 다시는 떠난다는 소리 하지 마.”

스스스스슷.

끼기기기긱.

소름 끼치는, 하늘이 비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공간이 일그러졌다.

“아, 안 돼! 이, 이런 식으로 하, 하는 건 말, 말도 안 돼.”

몽마의 던전은 정신력으로 클리어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명훤은 정신력으로 몽마의 던전을 이겨낸 게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강한 힘으로 몽마의 영역을 부숴 버렸다.

끼아아아아아악!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공기를 가득 메웠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