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79화 (79/112)

#79

주언과 TV를 보다가 문득, 주언이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순간이, 때때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예전에는 서브 남주 마음 눈치 못 채는 주인공이 짜증 났거든?’

‘왜?’

‘항상 서브 남주가 곁에 있었는데, 나중에 나타난 남주한테 홀랑 가잖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주언의 손길에 집중하던 명훤이 말랑한 주언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그래?’

사실 명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저 말하는 주언의 목소리가 좋아서, 머리에 닿는 그의 옷 감촉이 좋아서 그저 맞장구를 쳤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한마디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아. 평생 친구라고 믿었으니까 눈치 못 채지.’

‘응.’

베고 있던 허벅지 위에 짧게 입맞춤하자 위에서 낮게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리쬐는 햇살도, 반쯤 연 창문에서 불어오는 적당한 온도의 바람도 모두 다 너무 좋았다.

쪽.

쪽.

‘오히려 주인공이 배신감 느끼는 게 더 이해가 돼.’

쪽.

주언의 말에 대답 대신 짧은 입맞춤이 되돌아왔다.

‘말을 안 하면 몰라. 아무리 가까워도.’

주언이 말을 끝맺을 기세를 보이자, 명훤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하자.’

‘이런 말 말고!’

주언이 이기지 못하고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명훤에게 주언은 너무도 당연한 존재였다. 숨기는 게 있어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주언은 늘 같은 곳에서 자신을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명훤아.”

주언이 뒤에서 다정하게 명훤을 껴안았다. 깍지를 껴 주언의 손을 잡은 명훤은 보드라운 손등 위에 입맞춤했다. 생생한 주언의 온기가 감격스러웠다. 심장을 토해내서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다렸어.”

정말 오래 기다렸다. 명훤은 매분 매초 죽고 싶다는 충동을 누르며 시간을 견뎌왔다. 숨 쉬는 것조차 괴로웠으나 참았다.

“말 안 해도 다 알아.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

달콤한 손가락이 거칠어진 뺨을 쓰다듬었다.

몰랐다. 제대로 된 관계가, 계속 이어가고 싶은 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해야 하는 노력을 지금껏 주언만 하고 있었다. 관계가 오래될수록 명훤은 안이해졌고, 주언이 두 사람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몫까지 노력해왔다.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

명훤이 목을 휘감은 주언의 팔을 붙잡았다. 주언의 숨이 명훤의 목 언저리에 닿았다. 한없이 달콤한 순간이었다. 이 순간이 영원히 깨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너 주언이 아니잖아.”

하지만 진짜 주언이 아니면 이 모든 달콤한 순간은 의미 없다. 명훤의 단호한 말투에 주언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명훤이 수천 번, 수만 번 겪어봐서 안다. 명훤이 보는 건 지나간 과거일 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이다.

주언이 없는 몇 년간, 행복한 꿈은 늘 명훤의 현실을 진창으로 끌어 내렸다. 일어난 후 신기루처럼 사라진 환상은 현실의 어둠을 더 짙게 만들었다. 홀로 침실에서 일어나 느끼는 지독한 공허함은 명훤의 상처를 더 깊게 만들 뿐이었다. 그 순간을 몇 번이고 반복했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은 현실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렇게 행복한 순간은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다.

“지금이 현실일 리 없잖아.”

지금의 행복은 현실의 명훤이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다.

“미안한 게 없는데 네가 왜 사과하겠어.”

사과해야 하는 건 나인데.

명훤의 떨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공간이 왜곡됐다. 이건 평소의 꿈과는 달랐다. 명훤은 빠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의심을 품고,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어디까지가 현실이었던 걸까 구분 짓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홀에 던전이 생겼었지.’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이 환몽에 휘말렸다. 제법 실감이 났고, 명훤의 약한 부분을 잘 파고들었지만, S급인 명훤의 아주 깊은 속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듯했다. 그래서 과거의 파편만으로 지금 환상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키킥.”

이 안온한 꿈에 머물고 싶어 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느껴졌다. 행복할 권리는 박탈당했으니까.

“…나가.”

가짜라는 걸 알지만 차마 주언의 얼굴에 대고 험한 말을 할 수 없었다. 명훤의 단호한 말투에 왜곡됐던 배경이 완전히 비틀렸다. 명훤이 눈을 깜박한 순간 배경은 순식간에 L 호텔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다친 주언이 있었다. 명훤은 서 있었고, 주언은 바닥에 손을 짚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쿵.

입가에 피가 맺혀 있는 주언의 얼굴에 명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심장이 일순간 낮게 가라앉았다. 주언에게 뻗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가짜가 틀림없는데.’

저 원망 섞인 눈빛에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나를 가짜라고 여기는 게 편하니까 그렇게 매도하는 거겠지.”

매서운 목소리가 명훤을 채찍질했다. 주언과 같은 얼굴로, 목소리로, 몸짓으로 자신을 거부하는 모습에 명훤이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죄악감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참고 참다가 기회조차 주지 않고 떠나지 말고, 원망해도 좋으니 내 곁에 있어 주길 바라는 간사한 마음이 피어올랐다.

생각에 잠겨 있는 것도 잠시, 주언이 명훤의 정강이에 매달려 원망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왜 내가 죽어가는데 너는 아무것도 안 한 거야?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니.”

차라리 이 감정이 사라지길 바랄 때도 있었다. 너무 크고 무거워서 숨쉬기 버거워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몰랐던 때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정말 그런 기회가 온다면 절대 버릴 수 없겠지만.

“그런데 나한테 왜 그랬어? 그게 네가 말하는 사랑이야? 너 만난 거 나 엄청 후회해.”

악에 받친 듯 나오는 목소리가 명훤의 속을 헤집어 놓았다.

이건 정말 환상인가? 어쩌면 네가 사라진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일은 모두 악몽이고 지금이 현실인 게 아닐까.

“주언아… 난….”

“너 같은 거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더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널 증오해.”

주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명훤은 그런 주언의 말에 잠시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지면이 흔들렸다. 또다시 세상이 왜곡된다. 주언이 어느덧 몸을 타고 올라와 명훤의 몸을 옥죄고 있었다. 명훤은 저항 없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주언의 습한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하지만 난 이미 죽었어.”

네가, 날. 죽였어.

명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회색빛 하늘이었다. 온 세상이 흑백으로 물들고, 세상의 모든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주언이 갓 사라졌을 때 느꼈던 아득한 감각과 똑같았다.

“…지금이 현실인가.”

명훤이 한숨처럼 말을 속삭였다. 그 아득한 감정에 무뎌졌을 리 없다. 주언이 사라진 직후 느꼈던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와 명훤의 위를 덮쳤다. 제대로 된 생각이 어려워지고 그저 기계같이 매일을 보내는 삶.

명훤은 눈앞에 펼쳐진 순간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몽마의 환영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명훤에게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지옥이었기 때문이었다.

주언을 잃어버렸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왔다. 세간에서 그 어떤 것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평가된 명훤이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가장 괴로운 건 자신이 얼마나 힘들든 둘이 있을 때 주언이 외로움을 느끼며 힘들어했던 것보다 덜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때의 주언이 어땠을지 생각하면 감히 힘들어할 수도 없었다.

“아….”

지금이 현실이라면, 이렇게 넋 놓는 순간조차도 아까웠다.

“찾으러 가야 돼.”

짧은 탄식을 토해냈다.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주언을 찾으러 가야 한다. 옆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슨 소리인지 분별이 제대로 가지 않았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어디에 있어. 돌아와. 내가 잘못했어. 내 앞에 와서 나를 원망해줘. 미안해. 사랑해. 너 없는 세상은 아무런 색이 없어서 숨이 막혀.

“돌아온다고 말하지 말지….”

그 말만 아니었다면 진작 총을 목 안에 처넣고 쏴버렸을 텐데.

파지지지직.

가이딩 받지 못해 한계까지 억눌린 능력이 견디지 못하고 몸 밖으로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차라리 죽을까. 네가 사라진 순간을 매일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

명훤의 정신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무너져 내릴 때 웅웅거리던 소리 중 한 문장이 벽을 뚫고 명훤에게 닿았다.

“…내가… 떠나는 편이 나을까.”

쩌적-

세상과 명훤을 단절시키던 벽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한 번 갈라지기 시작한 금은 빠르게 번져 나갔다.

쿵.

쩌저저적.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던 투명한 벽에 주먹이 닿았다.

쨍그랑.

벽이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진창에 처박혔던 정신이 강제로 끌어 올려졌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건 침울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주언이었다.

쿵.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이제껏 환상 따위를 어떻게 잠깐이나마 진짜 주언이라고 착각할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진짜 주언이었다. 그제야 명훤의 뇌리에 걸려 있던 안개가 흩어지고, 제한됐던 기억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이미 되돌아왔어.’

주언은 이미 되돌아왔다. 이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명훤은 주먹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몸이 한층 더 가벼웠다. 의식이 없는 사이 가이딩을 받았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이딩을 해준 상대가 우주언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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