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우주언은 그저 과거를 잃었을 뿐,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쨍그랑.
다시금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와 동시에 주언과 다시 만난 후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명훤은 강하게 주언을 붙들었다. 조금 낮은 온도. 손에 달라붙는 피부. 자신이 아는 지금의 우주언. 과거를 헤매던 명훤의 눈에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제 곁을 떠날 생각을 하는 우주언이라니.
되돌아온 주언을 또다시 놓친다고?
그렇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죽어도 내 곁에서 죽어.”
다음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에는.
“내가 같이 죽어줄 테니까.”
공기가 사납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주언은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만으로는 부족했다. 더 필요했다. 주언이 다시는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증표.
“죽어!”
몽마가 비명을 질렀다. 여러 개의 검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주언은 몽마의 마지막 발악을 파훼할 생각인 듯 보였다. 자신을 껴안은 팔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명훤은 그런 주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주언이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색을 잃었던 세상이 서서히 색을 되찾았다.
돌아온 주언은 현재의 명훤을 몰랐다. 구차해 보이더라도 상관없었다. 붙잡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내가 너 다치는 꼴 보느니 죽고 말지.”
이건 진심의 절반이다. 남은 절반의 진심은 주언을 잃느니 자신이 먼저, 그가 지켜보는 앞에서 죽는 게 낫다는 알량하고 비겁한 생각이었다.
짙은 피 냄새와 함께 몸이 허물어졌다. 지독하게 아프지만 않았더라면 명훤은 웃었을 것이다.
“안 돼… 아니야….”
주언의 안중에는 자신뿐이었으니까. 죽을지도 모르는데 겨우 이런 걸로 기분이 좋다니, 주언이 알면 미쳤다고 할지도 모른다.
가지 마. 명훤이 입술을 달싹였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명훤이 바랐던 대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우주언이었다.
“내가 아는 우주언이야?”
우주원이 아닌 우주언.
알면서도 굳이 확인받고 싶었다. 작은 끄덕임 한 번이면 충분했다. 주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끄덕.
주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언이 남겼던 흔적 하나에도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밖에 몰랐던 명훤은, 주언의 끄덕임 한 번에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
주언이 기억을 되찾는 걸 무수히 상상했다. 대개 가장 근사한 장소에서, 네가 부담 갖지 않도록 점잖은 척 조심스레 나는 계속 너를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말하는 상상이었다.
유치한 상상이지만 그것조차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했던 무수한 나날들이 명훤을 스치고 지나갔다.
명훤이 무너져 내렸다. 주언의 허리를 세게 껴안은 손이 속절없이 떨렸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이 순간이 현실이라 걸 알려주고 있었다.
“주언아.”
솨아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와 다정한 주언의 호흡, 명훤의 어깨를 힘껏 마주 안아주는 주언의 팔. 이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수히 불렀던 이름.
“응.”
이제야 겨우 대답이 되돌아왔다. 주언이 기억을 되찾은 걸 확인하고, 명훤이 주언의 뺨을 붙잡고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아주 좁아졌을 때였다.
드르륵.
문 바로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팍-!
주언이 뒷걸음질 치며 재빨리 명훤과 거리를 뒀다.
“명훤 씨 정신 차렸어? 물어볼 게 있는데… 어?”
뛰어왔는지 숨이 거칠어진 강노훈은 들어오자마자 병실 안에 흐르는 기묘한 정적을 감지하곤 멈칫했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포즈로 침대 옆에 선 주언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 주언 씨. 오랜만.”
묻고 싶은 게 많아서 뛰어왔으나, 잘못된 타이밍에 들어온 걸 감지한 강노훈이 어색하게 뒷목을 긁적였다. 다행히 곧 뒤따라온 서윤진 덕분에 어색한 공기가 환기될 수 있었다.
드르륵.
반쯤 열렸던 문이 완전히 열리고 서윤진이 병실 안에 들어왔다.
“얼마나 빨리 간다고 뛰기까지 해요.”
“그러게. 괜히 뛰었네.”
“…음료수라도 사 와요. 팀장님 때문에 급하게 오느라 빈손으로 왔잖아요.”
서윤진이 주언에게 눈인사를 한 후, 눈치 좋게 강노훈을 이끌고 뒤로 사라졌다. 주언이 어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나 두 사람은 이미 떠난 후였다.
“괜찮은데….”
빠르게 밀어낸다고 밀어냈으나 늦은 모양이었다. 주언이 간이 의자에 다시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끄러워서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명훤은 그런 주언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주언의 손목을 붙잡았다.
“왜?”
용건이 있어야만 손을 붙잡을 수 있다는 듯한 주언의 반응에 명훤이 변명하듯 말했다.
“…이제 다시 둘밖에 없는데.”
“금방 돌아오실 거야.”
주언이 흘끗 문 쪽을 보며 손을 떼 냈다. 하지만 마냥 마음이 편하지 않은지 과일이라도 깎아주겠다며 냉장고 위에 있는 과일 바구니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읏.”
명훤이 배를 움켜쥐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갑자기 왜 그래?”
주언이 화들짝 놀라며 헐레벌떡 뛰어와 명훤을 살폈다.
“하아….”
“아까 내가 밀쳤던 것 때문에 그래? 내가 아까 너무 세게 밀었나?”
능력자는 일반인보다 자연 치유 능력이 뛰어났다. 능력자 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명훤이었다. 괴물 같은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진통제까지 맞아 상처에 비해 고통도 덜했다. 명훤이 슬쩍 주언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을 걱정하느라 눈시울을 붉히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도 나쁘진 않지만 주언을 거짓말로 울리고 싶은 건 아니었다.
“네가 밀쳐서 그런 거 아니야. 이제 마취가 깨서 그런가 봐.”
명훤이 아프지만 괜찮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의사 선생님 부를까?”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나 걱정하는 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주언의 말과는 정반대였다. 걱정 받고 싶어서 거짓말을 한 거니까.
몇 년 동안 위험도가 높은 일을 수도 없이 해왔다. 지금보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도 스케줄을 무리 없이 소화해내는 명훤을 보고 뒤에서 지독한 새끼라며 혀를 내두르는 말을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명훤을 아는 사람이 지금의 모습을 봤다면 저 사람은 인피면구를 쓴 몬스터라며 길길이 날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야. 그냥 지금 다른 건 됐으니까 멀리 가지 마.”
명훤이 주언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어깨 위에 제 머리를 기댔다.
“멀리라고 해봤자 방 안이잖아.”
“그래도.”
“의사 불러서 몸 상태 확인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 한 달 정도면 나을 거야.”
“곧 팀장님도 돌아오실 텐데.”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명훤의 약한 말투는 주언을 함락시키기엔 충분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스킨십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싫지만, 그렇다고 자신 대신 다친 애인에게 매몰차게 굴 정도는 아니었다.
“잠깐만이야.”
주언의 항복 선언에 명훤이 낮게 웃음을 터트리며 주언을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주언은 환자 위에 앉은 게 불편했는지 몸을 뻣뻣하게 굳히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렇게 앉는 것까지는….”
“금방이라도 깨질 유리처럼 대하는 건 처음이라서 싫지는 않은데. 내가 아프면 비켜달라고 할게.”
한 달이면 명훤의 회복력을 감안하였을 때 아주 오랜 시간이었다. 주언이 잠시 머뭇거렸으나 곧 체념하고 순순히 명훤의 무릎 위에 앉았다.
할 얘기가 많았으나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같이 있지 않은 몇 년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윤재의 이야기도, 여지웅이 주언의 존재를 알게 되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도 해야 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대화가 필요했으나 지금 이 짧은 순간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벅찬 현실 때문에 이 순간이 씻겨져 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전에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주언이 제 어깨에 기댄 명훤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싫어?”
“싫은 건 아니고.”
“그럼 좋아?”
“글쎄.”
주언의 미적지근한 대답에 명훤이 고개를 들었다. 서로의 감정이 같은 온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어지려는 인상을 애써 폈다. 겁먹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이 뭐 그래.”
“그냥 아직까지 얼떨떨해서.”
명훤은 자신의 몸 상태를 새삼스레 살폈다. 이 정도면 3일 이내로 퇴원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명훤은 마음속으로 입원 기간을 한 달 정도로 늘렸다. 누가 들으면 양심을 대체 어디다 팔아먹었냐는 말이 나올 일이다.
“우리 여행갈까?”
그때 못 갔던 여행. 내내 명훤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같이 가서 지내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공백을 금방 메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야지.’
안 돼도 그렇게 만들어야겠지. 주언을 잡은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으니까 들키지 않게만 움직이면 된다.
“한 달이나 병원에 있어야 된다며. 복귀하면 엄청 바쁠 텐데?”
“같이 있고 싶어서.”
“매일 보러 올게.”
입원해 있을 때만큼은 주언이 자신의 곁에 딱 붙어 있을 테니까 이 정도로 만족할까. 같이 있는 게 아닌, 매일 떠났다가 돌아오겠다는 말이 썩 탐탁지 않지만 여기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주원의 정수리에 짧게 입 맞추며 명훤은 “그래 그럼. 여행은 다음으로 미루자.”라고 다정하게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