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똑똑.
드르륵.
이번에는 문이 열리기 전에 노크 소리부터 들려 전처럼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을 반길 수 있었다. 병원 지하에 있는 카페까지 다녀왔는지 강노훈의 양손에는 커피 홀더가 들려 있었다. 서윤진이 커피를 빼내 주언에게 건넸다.
“주언 씨 취향 예전이랑 안 바뀌었으면 좋겠는데.”
“안 바뀌었어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주언이 커피를 건네받고 어색하게 웃었다. 새삼 그들과 다시 만났을 때 자신이 눈물과 콧물 범벅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소리 지르느라 침도 흘렸었던 것 같은데.’
그때에는 제정신이 아니라 괜찮았었지만 되짚어 생각해 볼수록 귓등까지 뜨끈해지는 걸 느꼈다. 얼굴에 피 칠갑을 하고 있었고, 긴급 상황이었기에 주언의 상태가 어땠는지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그래도 민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유까지는 짐작하지 못했지만 주언이 민망해하는 것까지는 눈치챈 서윤진이 간이 의자에 앉으려는 강노훈에게 눈짓을 건넸다.
“자. 여기 명훤 씨 것도.”
강노훈이 웃으며 커피를 명훤에게 건넸다. 두 사람이 병실로 돌아왔을 때부터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여명훤 때문에 강노훈은 엉덩이에 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우리 그런데 사적으로 온 게 아니고 조사차 온 거라, 협조 좀 해줄 수 있을까?”
“네?”
“명훤 씨 한 시간 정도 있다가 출근할 수 있지?”
“저 방금 의식 차렸습니다.”
명훤이 눈을 살짝 내리깔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주언이 어떻게 아픈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을 하냐는 듯 강노훈을 쳐다봤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뭐가 돼.”
주언이 없을 때는 쉬라고 해도 말 안 듣더니, 지금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픈 사람 앞에서 일 얘기 꺼낸 쓰레기로 만들었다. 병실에 들어오기 전에 여명훤의 상태가 어떤지 파악하고 왔다. 조금 늦게 의식을 차린 건 상처가 아닌 정신적인 문제인 것 같으며, 의식을 차리면 무리하지 않는 이상 이동이 가능하다는 의사의 말까지 듣고 왔다. 강노훈은 억울함에 가슴을 두드리고 싶었으나 그래봤자 역효과가 날 뿐이라는 걸 잘 알았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한순간에 변하지 싶었다. 강노훈은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쥔 채 서윤진을 흘끗거렸다.
“당장 일하라는 게 아니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들어야 해서요. 워낙 고위직 인사들이 많이 얽혀서. 양해 좀 해줘요.”
“꼭 출근해야 하나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명훤 씨는 회복력이 좋아서 금방….”
여명훤이 아픈 척하는 이유까지 정확히 파악한 서윤진이 강노훈의 말허리를 잘라냈다.
“명훤 씨가 많이 힘들다니까 여기서 해도 상관없어요. 그렇죠? 팀장님?”
“…어어.”
던전이 발발하고 휘말린 사람 중 내내 의식을 갖고 있던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다. 던전에서 구조된 뒤 급하게 병원으로 실려 간 탓에 던전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설명을 듣지 못했다.
의식을 잃은 사람 중 정, 재계에 내로라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들은 권력을 이용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고 싶다며 공격 1팀을 채근했다. 그래도 공격 1팀은 여명훤이 의식을 잃었다는 걸 내세워 클리어된 던전과 그 주변을 정리하는 걸 우선시했다.
하지만 여명훤이 깨어난 이상, 더 미룰 수 없었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어림짐작으로 두 사람의 입장이 곤란하다는 걸 충분히 인지한 주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런 일 공격 1팀 관할 아닐 텐데요.”
“위에서 구르라면 굴러야지, 뭐.”
“우리가 많이 바빠서. 주언 씨는 내가 청취할 거고, 명훤 씨는 팀장님이 하실 거예요.”
더 있다간 괜히 안 해도 될 말을 더할 것 같아 서윤진이 나서서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강노훈이 눈짓으로 바꾸자고 윤진에게 항의했으나, 그녀는 그의 눈짓을 모른 척했다.
“주언 씨. 그럼 잠깐 나갈까요?”
윤진이 문을 열며 주언에게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나 잠깐 나갔다가 올게.”
“금방 올 거지?”
주언의 소매 끝을 잡고 올려다보는 시선이 불쌍한 강아지 같았다. 누가 들으면 대체 어디를 봐서 강아지 같냐고 기함을 토해내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언은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고, 아무도 주언에게 그의 생각이 완전히 틀려먹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응. 배는 안 고파? 돌아올 때 뭐 사 올까? 지금 뭐 먹어도 되나? 의사 선생님한테 물어보고 올게.”
“아니. 그냥 바로 와.”
“알겠어.”
강노훈과 서유진이 가증스럽기까지 한 명훤의 행동에 경악했다. 명훤이 무너졌을 때를 봐왔으니 주언이 돌아온 걸 축하해야 하는데, 그러기엔 그 전에 알던 명훤과 지금의 명훤의 괴리감이 상당히 컸다.
탁.
명훤과 강노훈만 병실에 남겨지고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강노훈은 명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시 무감한 표정으로 되돌아왔지만, 전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강노훈은 침대 옆 간이 의자에 앉은 후 명훤이 응시하고 있는 굳게 닫힌 문을 함께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주언 씨가 돌아왔다는 게 안 믿기네.”
“그러게요.”
우주언이 살아있다. 거대한 폭탄 같은 사실이었다. 사망 처리가 된 것까지 확인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알았던 거고, 어떻게 두 사람이 같은 호텔 안에 있었던 걸까. 묻고 싶은 것 천지였다. 게다가 주언이 쓰러진 명훤을 발견했던 곳은 그의 약혼식을 진행하던 장소였다.
“괜찮아?”
강노훈은 여러 질문을 하지 않았다. 여명훤이 주언 외에 믿는 사람이 있다면 단연코 강노훈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드물게 날것의 감정 조각을 실토했다.
“잘 모르겠어요. 아직.”
괜찮은 걸까. 타오르는 감정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주언에게조차 드러날 수 없는 짙은 색의 감정이었다. 한 번 잃어버렸으니 두 번은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울타리 안에 두고 싶었다. 그리고 그 울타리 앞에 주언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두고 싶었다.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게.
깊게 가라앉은 명훤의 시선이 위험하게 빛났다. 강노훈이 사 온 음료를 쭉 들이켠 후 팔을 위로 쭉 뻗었다.
“이유는 나중에 물어보고 일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야겠네. 위에서 난리라서.”
“어디까지 파악하셨습니까?”
“몽마 계열이라는 거. 맞아?”
“네.”
“마력 측정 등급으로는 A급으로 떴는데, 안에 상황은 어땠어? 다른 일반인들은 쓰러졌던 기억이 전혀 없더라고.”
“보스 몬스터만 있었어요.”
“뭐?”
마력 측정치로 던전의 등급을 정하는 것의 맹점이었다. 던전 내부에 기운이 가려져 있거나, 다른 몬스터 없이 보스 몬스터만 있는 경우 난이도가 한 등급 올라간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S급 던전이라는 소리잖아.”
“…….”
“S급 던전이 갑자기 왜 도시 한복판에서 나와.”
이번 던전은 A급 이상의 던전이었다. 명훤이 거칠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인 만큼 평소보다 훨씬 일 처리가 복잡하고 까다로울 게 자명했다. 게다가 S급 던전이라니.
“한동안 명훤 씨가 고생이겠네. 사망자가 한 명도 없으니까 이번에 연합총회에서 완전 스포트라이트 받겠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여명훤이 미간을 좁혔다.
“몬스터 잡은 거, 저 아니에요.”
“어? 그럼?”
“…….”
여명훤이 폭주할까 봐 걱정했는데 사망자 없이 해결했구나 싶어 안심하려던 강노훈이 길어지는 침묵에 얼굴을 굳혔다.
“설마 주언 씨가…?”
“지금 우주언은 우주원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어요. 그리고 다시 능력자로서 교육받고 있고요.”
짧은 말이었으나 그 안에 있는 함축적인 의미는 모두 알아들었다. 주언이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기록되고, 새로운 신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소리는 뒤에 누가 봐준 사람이 있었을 거라는 뜻이다.
“폭주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쳐서 나오고. 그 정도로 심각하게 상처 입고도 홀로 클리어 한 거면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주언 씨가 클리어 한 거라고?”
“그래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강노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초조한 발걸음으로 같은 자리를 왔다 갔다 했다.
“난 명훤 씨가 그렇게 약한 소리 할 때마다 무섭다니까.”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을 정리하는 강노훈을 보며 명훤은 차분히 기다렸다. 같이 일한 지 오래된 만큼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곧 생각 정리를 마쳤는지 강노훈이 고개를 들고 명훤을 바라보았다.
“밝히지 않는 게 낫겠어. 명훤 씨가 처리한 걸로 말 맞추자. 그리고 주언 씨는 일반인이라고 하고 신분 보장 제도로 신분 보증해주고. 이게 명훤 씨가 원하는 거 맞지?”
“네.”
“그래. 일단 윤진 씨 들어오면, 주언 씨한테 들은 내용 종합해서 내 선에서 처리해볼게.”
“아, 그리고.”
“뭐. 또 얘기할 거 있어?”
“저 한 달 휴가 내겠습니다.”
“…뭐? 무슨 농담도.”
여명훤의 당당한 말투에 노훈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무감한 표정으로 이런 때에 휴가를 내겠다니. 강노훈이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으나 명훤의 태도는 굳건해 보였다.
“농담 아니야?”
농담이라는 대답이 듣고 싶어 재차 물어봤으나, 명훤은 자신의 한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
병실을 나온 서윤진과 주언은 다행히 멀리 가는 대신 비어있는 옆 병실에 들어갔다. 그녀를 뒤따라 들어간 주언은 소파에 앉은 윤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기에 들어와도 되는 거예요?”
“네. VIP층에 비어있는 병실 있으면, 써도 좋다고 허락 맡았어요.”
할 말이 없어서 던진 말에 돌아온 야무진 대답에 주언은 괜히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