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82화 (82/112)

#82

“오랜만이에요.”

“네? 네. 그러게요.”

“왜 그렇게 뭐 잘못한 사람처럼 굳어 있어요?”

“너무 오랜만에 봐서 조금 어색하네요.”

주언이 어색하게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어색한 건 둘째 치고 온 신경이 벽 너머에 있을 명훤에게 쏠려 있었다.

“뭐 궁금한 건 많지만. 굳이 캐묻고 싶지는 않아요.”

서윤진이 어른스럽게 먼저 자신이 불편해할 법한 이유를 묻지 않겠다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서윤진은 한층 더 단단해져 보이는데 자신은 발전하긴커녕 다시 훈련생이 되어서 조금 위축된 걸지도 몰랐다.

“티 많이 났어요?”

“내가 눈치가 빠르잖아요.”

“…….”

“그래서 잘 지냈어요? 이거 하나만 묻고 싶은데, 이 정도는 대답해 줘요.”

많은 일이 있었다. 병에 걸렸고, 치료에 대한 부작용으로 기억을 잃었다. 그리고 한때 전부라고 생각했던 애인은 사실은 가짜 애인이었다. 기억을 되찾은 후에는 원래 애인은 약혼한다 그러지를 않나, 찾으러 갔는데 느닷없이 던전에 휘말렸다.

“네. 그래도 잘 지냈어요.”

통상적으로는 빈말로라도 잘 지냈다고 말하지 못할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주언은 잘 지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결국에는 기억을 되찾았고, 명훤을 되찾았으니까. 먼 길을 되돌아왔지만 결국에는 원하던 목적지에 도착했으니까.

“고마워요.”

“네?”

“명훤 씨 가이딩해줬죠?”

“아, 네.”

“호텔에 갈 때 던전보다도 명훤 씨가 폭주했을까 봐 무서웠었거든요.”

“폭주요?”

그런데 왜 그게 고마워할 일인 건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고마워할 일은 아니었다. 가이드는 에스퍼를 위해 존재했다.

“주언 씨 없어진 후에 명훤 씨가 가이딩을 못 받아들였거든요.”

“…네?”

“아까 의사 선생님한테 명훤 씨 상태 들어보니까 몸 안에 힘이 많이 안정됐다고 들어서요.”

“아니. 가이딩을 아예 못 받았다고요? 그게 무슨….”

가이딩을 취미로 받는 에스퍼는 없다. 가이딩은 에스퍼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했다. 폭력적인 힘에는 그만큼 대가가 따른다. 가이딩을 받지 못해 미칠 수도, 더 나아가 자멸할 수도 있다. 가이딩을 제때 받지 않아 사고를 낸 에스퍼가 매년 있을 정도였다.

“심리적인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이제껏… 어떻게….”

쉽게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무리 등급이 높다고 해도 몇 년 동안 가이딩을 받지 않고 멀쩡했다는 에스퍼는 들어본 적 없었다. 서윤진은 여명훤의 상태가 멀쩡하지 않았다는 사실까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약에 의존했어요.”

“그게 가능해요?”

몇 달도 아니고 몇 년이었다. 명훤을 가이딩 할 때 몸 안에 있는 폭력적인 힘의 농도가 짙다고는 생각했지만 몇 년 동안 가이딩을 안 받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주언의 의문에 서윤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도 그가 여태껏 폭주하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 놀라웠으니까. 곁에 있었던 만큼 여명훤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잘 알았다. 서윤진은 처음으로 대놓고 괴로워하는 것보다 묵묵히 견디는 모습에서 더 깊은 슬픔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윤진이 목도한 그 지독한 괴로움조차도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명훤 씨라서 가능한 거겠죠.”

“…몰랐어요.”

“주언 씨가 없던 때 있었던 일로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어요.”

“…네. 알아요.”

서윤진의 위로에 주언이 살포시 웃었다. 여기서 서윤진도 굳이 더 묻지 않고 마주 웃었다.

“그럼 사담은 그만두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갈까요. 오래 붙잡고 있으면 명훤 씨한테 미운털 박힐 것 같아서.”

“안 그래요. 공과 사는 잘 구분하고, 워낙 속이 여리고 착하잖아요.”

순간 윤진은 같은 사람 얘기하는 거 맞냐고 되묻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수줍게 웃는 주언의 얼굴에 굳이 찬물을 끼얹을 필요가 없지 않나.

“…큼.”

매스컴에 나오는 모습 말고 진짜 여명훤이 어떤지 아는 사람 중 그를 착하다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특히나 근래 그의 행보를 알고 있는 서윤진은 주언의 수줍은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어지간히 내숭 떠나 보네.’

착한 주언이 왜 저런 지독한 여명훤이랑 사귀나 했더니만.

“죄송해요. 제가 너무 팔불출 같았죠.”

“무슨 사과까지 해요. 자 그럼 이제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요.”

주언은 명훤을 쫓아 들어가기 위해 했던 노력과 화장실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는지는 생략했다.

“이 얘기는 상부에 바로 보고되나요?”

이야기를 끝마친 주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든 일을 설명한 후 뒤늦게 자신이 우주원이라는 신분으로 살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음. 일단 팀장님 거쳐서 올라가요. 다행히 던전에서 저희가 주언 씨를 먼저 발견해서, 아직 신상 공개는 안 됐는데….”

“상부에서 상세한 경위를 묻는 건 제 신상 정보도 같이 넘겨야 한다는 뜻인가요?”

“주언 씨는 모르겠지만 지금 온통 다 도심 한복판에 나타난 던전에 신경이 쏠렸거든요. 이번 연도 국제연합총회 한국에서 열리는 거 알죠.”

“네.”

“이번 사건 때문에 취소되려고 했는데 사망자 없는 거 내세워서 차질없이 총회 열려고 하려나 보더라고요.”

“…일단 이 얘기는 팀장님까지 있을 때 하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서윤진이 혼자 독단으로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명훤이 있는 병실 앞에 섰을 때, 안에서 강노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흥분했는지 언성이 높아진 탓에 무슨 얘기를 하는지 선명히 들렸다.

“근데 있잖아. 이력서 나만 썼다던데 그거 지우 씨랑 윤진 씨가 나 모함하는 거지?”

“…….”

“…명훤 씨? 왜 대답을 안 해? 진짜야?”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강노훈의 말투가 점점 격양되는 걸로 보아 좋지 않은 대화라는 걸 추측할 뿐이었다.

“팀장님 뒤끝 장난 아니다. 그냥 놔두고 가지.”

“네?”

서윤진은 무슨 대화를 하는지 아는 모양인지 혀를 내둘렀다. 그러곤 흘끗 주언의 눈치를 살핀 후, 곧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싱긋 웃었다.

“이 얘기는 내가 해줄 건 아닌 거 같아서.”

“네? 무슨….”

“일단 들어가요.”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갈피조차 잡지 못했다. 자신도 알아야 할 만한 이야기라는 소리일까?

똑똑.

노크를 했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안에서 반응이 없었다. 평소라면 밖의 인기척을 느꼈을 노훈이지만, 감정적으로 흥분해서 그런지 두 사람이 온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명훤 씨 내가 이력서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어차피 길어도 일주일이면 다 나을 텐데 한 달 휴가는 좀 길지 않을까?”

드르륵.

서윤진은 여기서 더 대화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는지 서둘러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당황한 기색의 두 사람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서윤진의 타박이 침묵을 깼다. 그녀가 이마를 짚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님 목소리 좀 줄여요.”

“…빨리 왔네.”

“바로 옆 병실에 간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어디까지 들었어?”

“이력서 얘기부터요.”

“아.”

강노훈은 괜히 명훤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여명훤도 놀란 듯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려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문 앞에 주언이 온 걸 알고 있었는데 강노훈이 문 앞에 주언이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갑자기 그런 말을 해서 놀란 것이었다.

주언이 착착 걸어가 소지품을 챙겼다. 명훤은 주언이 나갈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 반응하는 게 늦었다. 주언이 문 근처까지 간 후에야 명훤이 다급하게 물었다.

“어디가?”

“기숙사.”

화장실에서 대충 씻었지만, 찝찝해서 기숙사에 돌아가서 씻어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아직 훈련도 끝나지 않았고, 핸드폰은 방전돼서 구영이나 수희에게도 연락하지 못했다.

“지금?”

강노훈이 간절한 눈으로 주언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주언은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당장 명훤이 눈을 떠서 다른 생각은 다 젖혀 두고 있었지만 주언도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제가 더 할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아서, 먼저 가볼게요.”

“아니. 그냥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주언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병실 문을 열었다.

“일 때문에 바쁘시잖아요. 저는 그럼 먼저 가볼게요.”

“그래. 주언 씨 다음에 봐. 나중에 연락할게.”

서윤진만이 주언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네.”

그러니까 이렇게 나가는 건 그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서도,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당연하다는 듯 얘기해서도 아니다.

“그럼 내일 보자.”

아예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그렇다고 화를 대놓고 낼 정도로 서운한 건 아니었다.

“후.”

집에 가서 머리 좀 식혀야겠다. 어차피 내일 볼 테니까.

‘일단 씻어야겠다.’

씻는 것도 명훤이 언제 깨어날지 몰라 병실에서 씻은 게 다였다. 이제 곧 훈련이 끝인데 잠수를 타다니. 기숙사에 가자마자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복도를 빠져나가기 전 뒤에서 누군가 주언을 강한 힘으로 껴안았다. 명훤의 향기가 훅 풍겨와 주언의 코끝을 찔렀다. 강하게 어깨를 옥죄어 오는 손에서 간절함이 묻어나왔다.

“화났어?”

아프기보다는 슬퍼졌다. 고작 이런 걸로 간절해하는 명훤이 낯설었다. 손짓 하나에 간절함이 묻어나오기까지 견뎌냈던 괴로움의 편린이 자신을 사정없이 찔러대는 것 같았다. 떠난 사람보다 남은 사람에게 더 큰 멍이 지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니까. 주언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거짓말.”

“…나 있으면 일 방해될까 봐 나온 거야.”

“서운해?”

“…….”

“…응? 대답해 줘, 주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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