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공을 피하는 시한부의 삶이란-83화 (83/112)

#83

굳이 꺼내고 싶지 않은 얘기였다. 말해봤자 바뀔 것도 없고, 오히려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들킬 것 같았으니까. 여기서 대화 주제를 바꾸면 대답을 회피하는 게 티가 날 테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너는 왜 거짓말했는데?”

“뭐?”

“퇴원 금방 할 수 있다며.”

아무 말 하지 않았어도 주언이 속상한 걸 명훤이 눈치챘듯이, 주언도 말을 돌리면 명훤이 넘어갈 거라는 걸 알았다.

‘너는, 이라고 말한 시점에서 나도 거짓말한 걸 토로한 셈이지만.’

“그건….”

“아픈 거로는 거짓말하지 마.”

주언이 뒤로 돌아 아프지 않게 명훤의 가슴팍을 쳤다. 뼈 있는 주언의 말에 명훤이 고개를 재빨리 끄덕였다. 대답을 피하려고 나온 말이지만 주언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다.

“응. 미안.”

“…….”

“안 그럴게.”

명훤이 주언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며 사과를 받아주길 종용했다. 뭐 하나 아쉬울 것 없는 명훤이 제 앞에서만 아쉬워한다. 고약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순간이 피부에 와닿을 때마다 그의 사랑이 형태가 되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심란했던 마음의 조각이 명훤이 뒤쫓아온 덕에 사라졌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이제 기숙사에 돌아가서 마음을 비우고 푹 쉰 다음 내일 훈련소에 가서 대충 사정을 지어내서 말하면 될 것이다.

타닥.

조용한 복도에 낯선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 사실을 주언이 인지했을 때, 명훤은 이미 복도 끝에 있는 인물의 정체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 진짜 가야 해서 그렇게 말한 거… 읏, 이게 무슨…!”

쾅.

주언은 개의치 않고 대화를 이어가려는데, 명훤이 바로 옆에 있는 비상문을 열고 주언을 밀어 넣었다. 갑작스러운 명훤의 행동에 반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비상계단으로 밀려난 주언이 대꾸하기 전 복도 끝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야. 여명훤.”

문을 열려던 손이 멈칫했다. 이 목소리는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이호윤. 아직 그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해 두 사람의 약혼이 어떻게 성사된 것인지 몰랐다.

쿵. 쿵.

심장이 낮게 뛴다. 마치 떳떳하지 못한 것처럼 비상계단으로 밀려났다는 게 새삼 충격으로 와닿았다. 자신을 왜 숨길까. 대체 왜? 이호윤이 자신을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뭘까. 만약 자신이 살아있는 걸 들켜서 안 된다고 생각했다면 강노훈과 서윤진 앞에서도 어떠한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왜 이호윤 앞에서만 안 되는 걸까.

마음 사이로 불온한 바람이 불었다. 한 번 불기 시작한 바람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졌다.

‘그래도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게 좋겠지.’

여기서 문을 열고 나가서 아수라장을 만들 필요는 없다. 수많은 불안과 의심이 차올랐으나 그건 명훤에게 쏟아내야 하는 감정이 아니라, 주언 자신이 감당해야 할 문제였다.

주언은 차가운 철문에 등을 기댔다가 곧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여기서 굳이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대화가 끝나면 나가서 따져 묻는 자신을 생각하자 진저리가 났다.

주언이 고개를 저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밑에서 먹을 거라도 사 오는 편이 좋겠다 싶었다.

**

주언의 기척이 멀어지는 걸 느낀 명훤은 쓴 침을 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호윤은 여지웅과 연결되어 있고 아직 주언의 존재가 여지웅에게 알려져서는 안 됐다. 어차피 곧 알려질 테지만 굳이 일찍 주언의 생사를 확인시켜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X발.’

그러고 보니 약혼에 대한 해명도 하지 않았다. 주언이 이런 식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우리 약혼식에서 던전에 휘말렸는데, 내가 못 올 곳 왔다는 표정이네?”

“하. 개소리 말고. 용건만.”

“나는 너 정신 잃었다길래… 하… 됐다. 연합총회 딜레이 없이 진행될 거야.”

명훤의 싸늘한 태도에 이호윤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뭘 기대하고 정신 차리자마자 여기까지 쫓아왔는지… 스스로의 행동에 낯이 화끈거렸다. 이 약혼에 감정이 없다고 했지만 병문안을 온 사람에게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는 명훤의 모습에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여지웅이 시킨 일이 있을 거라는 명훤의 추측이 완전히 빗나가지 않았다는 것도 이호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오는 길에 여지웅의 연락을 받은 거지, 여지웅의 연락을 받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이호윤은 급하게 나오느라 흐트러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정리하며 숨을 돌렸다. 사망자가 없다고는 했지만 던전이 생성되며 지반이 흔들린 탓에 많은 부상자가 나왔고 이호윤도 다친 상태였다.

“상황은?”

낯선 사람도 저렇게 무감하게 보지는 않을 텐데. 약혼식이 무사하게 끝났다면 이런 불안을 덜 느꼈을 것이다.

“이번 사건 초기 대응 미흡했던 거 너보고 준비하래.”

명훤은 그곳에 공격 1팀으로 참여한 것도 아니었고 휘말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공격 1팀의 대응은 훌륭했다. 던전은 일종의 재해에 가까웠으니 더 일찍 준비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던전 자체에 휘말렸다는 게 용납 안 되는 몇몇 인사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길드가 합법화되어도 여전히 제 손안에 길드를 쥘 생각인 여지웅에게는 나쁜 소식이었다.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이 배에서 내려 사길드를 만든다면? 위에서 한 번 와해되기 시작하면 권력은 분산될 것이고, 그 사이를 틈타 일반 능력자들도 길드를 쉽게 만들 생각을 품을 수도 있었다.

위에서 모두 독점할 수 있게 사길드를 만드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확실히 각인시켜야 한다.

“너무 뻔한 수를 두는데.”

“그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으니까.”

“내가 아니어도 나로 만들 셈이군.”

“아니라는 소리야?”

“나 말고 다른 에스퍼는 한 명도 없었어.”

“…하긴. 너 아니면 누가 클리어 했겠어.”

교묘한 말이었다. 언뜻 이호윤이 던진 질문에 대답처럼 말했으나 여명훤은 그저 있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꼭 에스퍼가 던전을 처리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이호윤은 명훤이 원했던 의도대로 이해하곤 턱을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훤이 정신을 차려서 아직 자세한 사정을 아는 사람은 방금 얘기를 한 강노훈과 서윤진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런 지시를 내렸다는 건 여명훤이 던전에 휘말렸고 사망자가 없으니 진실이 아니더라도 명훤을 영웅으로 만들고, 그 후광을 적극 이용할 거라는 뜻이다.

“길드 이전 발표는 조금 더 뒤로 미루기로 했어.”

“…….”

“약혼식이 망쳐졌던 만큼 결혼식은 더 앞당기고.”

이호윤이 뒷말을 덧붙였다. 사길드가 합법화되기에 앞서 정부 소속 길드의 대응 미흡이라는 불명예는 어떻게든 씻고 넘기겠다는 여지웅의 뜻이 쉽게 읽혔다.

“그런 말 할 거면 그냥 사람 불러도 됐을 텐데.”

“지금 내가 얘기하는 건 우리 결혼 얘기야.”

“…….”

“네가 나한테 각인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는 너 나 없이 못 사는 거 알아?”

“할 말 다했으면 꺼져.”

여명훤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짧게 축객령을 내렸다. 우스운 생각인 걸 알지만 하필이면 약혼식장에 확률이 희박한 일이 일어나다니. 마치 두 사람은 절대 맺어질 수 없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분했다. 원래라면 지금쯤 매스컴에는 도심 한복판에 던전 출현이라는 기사가 아닌, 두 사람의 약혼 소식이 대중들 사이에 뜨거운 감자로 있어야 했다. 이호윤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너까지 이러면 안 되지. 평생을 여명훤의 파트너가 되기 위해 살아왔다.

‘여한올처럼은 안 되지.’

같은 처지였으나 여한올은 S급까지 끌어올려지지 못해 결국 시정잡배밖에 되지 못했다. 등급이 세밀화된 지금이라면 높은 A급일 확률이 높았다. AGT로 활동하면서, 일반 S급과 견주어도 큰 부상을 입지 않는 걸 보면 제 능력을 잘 쓸 두뇌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A등급은 A등급일 뿐이고, 여지웅을 만족시키지 못해 타의로 도망치게 됐을 뿐이다.

“지금 나 이렇게 돌려보내는 거, 너 후회할 거야.”

해주려던 말이 있었다. 여지웅의 사무실에서 언뜻 보았던 내용을 떠올렸다. 아마 여명훤이 꼭 필요로 할 내용 같아서 위험을 무릅쓰고 여지웅의 눈을 피해 훑어보기까지 한 정보였다. 하지만 이호윤은 이 말을 삼키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호의를 짓밟지만 않았더라면 이호윤은 말했을 것이다.

“후회 안 해.”

예전에 딱 한 번 동정으로 베푼 호의에 우주언이 상처 입었다. 지금도 해명하지 못해 온 신경이 주언이 있는 비상계단 쪽으로 향해 있었다.

덜컹.

비상계단 문을 열자마자 종이봉투를 껴안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주언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다 설명할게.”

“여기 안에서 샌드위치가 그나마 제일 맛있어 보이더라. 바쁘실 텐데 챙겨드려.”

주언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왜 숨겼는지, 이호윤과의 약혼은 어떻게 된 건지. 그 사실이 명훤을 못내 불안하게 만들었다. 명훤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것 같은 초연한 태도에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주언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다 설명할게.”

“지금?”

“…네가 원하면.”

“나 먼저 얘기할게.”

“…어.”

“아까 너 때문에 화났다기보다는… 그냥 나만 뒤처진 것 같아서 조금 심란했어.”

주언이 얼굴을 붉히며 초라한 제 속내를 밝혔다.

자신이 없는 몇 년간의 경험 차이가 있고 차이가 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혼자만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한 건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말하는 건 더 숨기고 싶지 않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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