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왜 그런 생각을 해.”
명훤이 다급하게 주언의 어깨를 껴안았다. 주언이 그런 생각을 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주언은 뒤처진 게 아니었으니까. 명훤은 주언 없이 단 한 번도 앞서 나간 적이 없었다. 주언이 없던 명훤의 모든 순간은 주언의 안위를 위한 삶이었다.
혹시라도 돌아오면 네게 온 세상을 주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바랐던 대로 돌아왔으니 이제 명훤이 주언에게 세상을 줄 차례였다.
“내가 원하면 얘기하겠다는 건 나한테 오해받기 싫어서 그런 거지, 지금 네가 얘기하고 싶은 건 아니잖아.”
정곡이었다. 주언에게는 완벽한 자신의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주언이 다시 자신에게 반했으면 좋겠다. 주언의 앞에서만 마음이 구차해지는 것 같았다.
“…준비가 조금 더 필요해서 그래.”
“그럼 기다릴게.”
주언이 깔끔하게 물러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명훤이 안배해 놓은 상황을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대답은 간단명료해서 도리어 더 불안해졌다.
“…안 서운해?”
“조금 서운하긴 한데.”
“…….”
주언이 명훤의 허리를 껴안았다.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자 심장이 빠른 박동으로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앞으로 한동안 바쁠 거고, 너 지금 막 깨어났는데 몰아붙이고 싶지 않아.”
주언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예전과는 달랐다. 예전의 우리가 떠올랐다. 와달라고 해도 바빠서 오지 못했던 너. 그래서 아파도 아프다고 말조차 하지 못했단 자신. 사랑했으나 어렸고, 어렸던 만큼 어리숙했다.
‘물론 배신당할 수 있어.’
윤재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게 거짓이고 놀아났을 확률도 있다. 하지만 마냥 안 좋게만 생각할 수 없었다. 믿고 싶었다. 상대가 여명훤이었으니까.
사랑으로 상처 입을 수밖에 없다면, 적어도 그 상대는 자신이 고르고 싶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헤어진 건 온전히 명훤의 탓만은 아니었다. 주언의 마음도 바람에 무력하게 흔들리는 잔가지처럼 흔들렸다. 불안함을 앞에 두고 도망쳤다.
명훤은 동요하지 않으려 애쓰나, 얼굴에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주언을 가슴팍에 묻었다. 보들보들한 뒤통수가 마음을 어지럽혔다.
“조금만 기다려줘.”
“응.”
“모든 게 다 끝나면 그때….”
명훤은 뒷말을 삼켰다. 이렇게 멋없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주언은 뒤처져 있다고 말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주언은 전과는 다르게 아주 성숙해져 있었다. 그 변화가 윤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속이 들끓는 동시에 주언의 단단해진 모습에 새삼스럽게 반할 것 같았다.
‘네가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니까 네가 날 좀 봐줘.’
명훤이 주언의 정수리에 턱을 괴며 바랐다.
서로가 같이 있지 않게 됨으로써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명훤은 여지웅을 떠나 제 삶이 완전해졌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자신의 불완전하고 결핍된 부분을 우주언이 채워줬기에 비로소 완전했던 것이다.
우리의 헤어짐은 더 먼 미래를 위해 필요했던 일일지도 몰랐다. 소실된 몇 년은 아깝지만, 멀리 보면 완전한 실은 아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잘하면 된다.
가이딩을 떠나서 아쉬운 쪽은 자신이었다. 야망 같은 건 너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짓밟을 수 있지만,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
“아니. 조금 너무하지 않아?”
왜 이력서를 자신에게만 쓰게 한 것일까.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지만, 강노훈은 이 사실이 못내 너무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무슨 사정이 있었겠죠.”
“나도 그 정도는 알지.”
“그럼 됐네.”
“안됐거든? 이력서 본다는 건 입사 확정 아닌 거 아니야?”
“일단 들어보고 너무한지 아닌지 정해도 늦지 않아요.”
서윤진의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대답에 그가 눈을 홉떴다.
“윤진 씨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속 좁은 사람처럼 보이는 거 알아?”
“설마 속이 넓다고 생각하고 하시는 말은 아니시죠?”
장단 좀 맞춰 달라는 뉘앙스였으나, 서윤진은 그러는 대신 조금 그런 면이 없잖아 있다며 강노훈의 약을 바짝 올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서윤진이 얄미웠다.
“그나저나 명훤 씨는 주언 씨가 드러나지 않길 바라는데, 주언 씨는 뭐래?”
“이쪽도 마찬가지예요. 말 맞추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이쪽 생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아는 두 사람이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아직 소속이 명확하지 않은 제삼자가 던전을 클리어 했다는 소식은 기관 상부의 심기를 건드릴 게 뻔했다.
“기관은 둘째 치고 주언 씨도 사정이 있는 듯하니까.”
할 일이 더 추가됐다는 생각에 강노훈이 허리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동안은 집에 들어가기도 힘들 것이다
“명훤 씨한테 비싼 거나 얻어먹어야지.”
“어디 가세요?”
“화장실?”
드르륵.
강노훈이 문이 열고 복도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가 곧바로 뒷걸음질 치며 다시 문을 닫았다.
“왜 그래요? 고장 난 사람처럼.”
영문을 모르는 서윤진이 놀리자 끼긱, 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같이 뻣뻣하게 고개를 돌린 강노훈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복도 끝에서 명훤 씨가 살기 풍기면서 돌아오고 있는데?”
“왜요?”
“내가 비싼 거 사달라고 하는 게 화났나? 아닌가. 아까 말실수 때문인가?”
강노훈이 문손잡이를 붙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마법 문이라서 문을 닫으면 명훤 씨가 못 들어오기라도 하나 보죠?”
서윤진의 말의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렸다.
드르륵.
“주언 씨는?”
“돌아갔어요.”
“그래? 내가 사실 밥 사려고 했어.”
명훤은 복도로 걸어오는 내내 생각하느라 병실 너머에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관심이 없었다. 노훈의 알 수 없는 변명을 이해할 수 없어 명훤은 잠시 침묵한 후, 곧장 본론을 꺼냈다.
“연합총회 딜레이 없이 진행된다고 하네요. 저희도 일정은 늦추지 않고 그대로 진행합니다.”
주어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강노훈과 서윤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제껏 내내 기다려왔던 일이었다.
웅크린 어깨를 펼 때가 도래했다.
**
주언이 주섬주섬 옷을 입자 이불을 덮어쓰고 핸드폰을 하고 있던 구영의 시선이 주언에게로 옮겨졌다.
“형. 어디 가?”
“…잠깐 밖에.”
“같이 가.”
“뭐?”
침대에 누워있던 구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서둘러 윗옷을 걸쳤다.
“형 그렇게 나갔다가 또 사라지면 어쩌려고? 나 무사히 수료증 받고 싶거든? 무단이탈 눈감아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구영의 말에 주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적이 화려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번에는 대외적으로 주언이 했던 일이 모두 없던 일이 되면서 무단이탈한 그럴싸한 이유조차 댈 수 없었기에 구영의 대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그래도 나 때문에 국제연합총회에 자원까지 해놓고 안 가는 건….”
“…수희가 내 몫까지 해준대.”
“그래도.”
“이러는 게 편해.”
“그럼 옷 편하게 갈아입어. 기다릴게.”
“그럴래? 안 씻고 나가기 찝찝했거든.”
구영이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주언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습관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훑었다. 국제연합총회는 차질없이 진행되기 위해서 바쁘다고 들었다. 총회는 벌써 내일이었다. 2주가 넘도록 여명훤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주언도 굳이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애인이 유명인이면 이런 건 좋네.’
연락을 하지 않아도 기사란만 들어가면 여명훤의 일거수일투족부터 시작해서 오늘은 어떤 옷을 입었고, 그 옷의 가격은 얼마인지까지 줄줄이 나올 정도였다. 서윤진과 얘기했던 대로 도심에서 일어났던 던전 클리어는 모두 명훤의 공로로 돌아갔고, 벌써 2주나 지났음에도 뉴스를 켤 때마다 상위권 기사에는 여명훤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기사에서 여명훤이 오늘은 무엇을 하는지, 앞으로는 무엇을 할지에 대한 기사가 매일같이 올라왔다.
[사망자 없이 홀로 S급 던전을 클리어 한 여명훤. 세계적 가치는?]
[사길드 합법화, 기관에게 득인가, 실인가?]
마력 농도는 A급이었으나, 보스 몬스터만 있었다는 걸 확인 후 몽마의 던전 난이도는 S급으로 격상됐다.
현재 여명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존재였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봐도 S급 던전을 홀로 클리어 한 경우는 적었고, 일반인까지 휘말린 경우는 최초였기에 국내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것도 나중에 말해주려나.”
주언이 핸드폰 화면 스크롤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형. 나 준비 다 됐어.”
구영의 말에 주언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잠깐 구영에게 집중하며 생각을 전환하려 했으나, 구영의 관심사도 온통 총회 쪽에 쏠려 있었다.
“이번에 사길드 합법화되면 해외에서 이적 스카우트 제안 엄청 올 거라던데.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구영은 꿈꾸듯 중얼거렸다. 구영은 현실과 타협했으나 좋은 제안이 온다면 다른 곳에 갈 생각이 있는 듯 보였다.
“그러면 사길드로 가게?”
“초반에 옮기면 리스크가 많긴 할 거 같다던데.”
“아직 어떻게 될지도 모르잖아.”
“이제 한국도 큰 흐름 타야지. 지금 법안 통과 안 되더라도 몇 년 안에는 될걸. 그런데 아마 이번에 법안 통과될 거야. 외신기자도 이번에 역대급으로 많이 몰렸다던데.”
“그래? 수희 많이 바쁘겠다. 수희랑은….”
주언이 흘끗 구영의 눈치를 살폈다. 구영이 국제총회 도우미로 가지 않은 건 순전히 주언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