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이미 얘기했어. 한 명만 가도 가산점 붙어서 우리 수석은 따놓은 거라는 거까지 얘기 들었거든.”
“나도 갈 걸 그랬나.”
“아니.”
아예 폭탄처리반 취급인가. 주언이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오후와 저녁 경계 사이라 그런지 공기가 제법 찼다. 막상 앞장서긴 했지만 목적지가 어딘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구영이 뒤돌아 주언을 보며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밖에 나가서 뭐 하려고 했었어?”
“미안해서 밥이라도 포장해 오려고 그랬지.”
구영이 너무 아늑하게 침대에서 쉬고 있어서 밖에서 저녁을 사 오려고 했다. 하지만 구영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 눈을 빛냈다.
“잘됐네. 배달 음식 질렸어. 이왕 나간 김에 밖에서 먹고 들어오자.”
“그래. 뭐 먹을래?”
“형, 나 비싼 거 먹어도 돼?”
“어.”
비싼 걸 먹어도 된다는 소리에 가고 싶은 고깃집이 있었다며 구영이 걸음 방향을 틀었다. 주언은 걸음을 재촉하며 구영의 뒤를 쫓았다.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고마운 마음이 더 컸다. 돌아와서 자세한 해명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구영은 굳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묻지 않았다.
‘형은 무슨 사건, 사고에 이렇게 잘 휘말려…?’
명훤과 엮인 이후의 일을 염려해줄 뿐이었다. 오지랖과 걱정은 달랐다. 주언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말하지 않았으나 눈치 빠른 구영은 진작 명훤과 함께 던전에 휘말렸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그러게.’
‘무섭지 않아?’
‘무서워.’
‘…….’
‘그래도 난 던전에 다니려고.’
명훤의 곁에 있기 위해서라는 건 부차적인 이유였다. 윤재가 원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순간은 평온했지만 주언은 다시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가이드로 살고 싶었다. 예전보다 못하지만 그래도 주언이 잘하고, 보람을 느끼는 일이었다.
‘확실히 전보다 행복해 보이는 것 같아서 더 말 못하겠네.’
하지만 주언이 행복해하며 말하는 모습에 구영은 말을 더 보태는 걸 삼갔다. 구영이 보기에도 주언은 아르바이트를 할 때보다 던전에 있었을 때 더 행복해 보였으니까.
‘…그래?’
훈련에 적응하면서 기억도 되찾느라 정신없어서 기뻐한 적이 있나 싶었는데, 남이 보기에 기뻐 보인다니. 주언은 뺨을 쥐며 멋쩍은 순간이 지나가길 애썼다.
“형?”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있었던 일을 회상하던 주언이 구영의 부름에 상념에서 퍼뜩 깨어났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구영에게 웃어 보인 주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 준비를 마친 뒤 그와 함께 나갔다.
**
“더 비싼 거 먹어도 되는데.”
“여기 가브리살 능력자들이 와서 먹고 눈물 흘린 맛집이라는데?”
주언은 익숙한 내부를 보며 어떻게 소문이 저렇게 와전됐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공격 1팀에 있을 때 특별한 날이 있을 때만 오던 고깃집이었다. 주언이 송별회를 했을 때도 왔던 곳.
“맛있긴 하지.”
“그러게. 그런데 눈물까지는 안 나오던데?”
“과장된 거지, 뭐.”
“분명 감독관님이 눈물 나는 맛이라고 추천해줬는데… 그래도 맛있긴 했으니까 다음에 팀 다 같이 오자.”
“그래.”
구영은 양껏 먹어 포만감이 느껴지는 배를 툭툭 두들기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느덧 해는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지름길로 갈래?”
“그럴까?”
“빨리 눕고 싶어서 그러지.”
“형 날 너무 잘 아네.”
화려한 네온사인과 대조되게 작은 골목은 가로등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아 어두웠다. 밝은 곳에 한참 있다가 나와서 그런지 오늘따라 골목길이 어두워 보였다.
“가로등 좀 설치하지. 골목길 다닐 때마다 등골이 서늘하다니까.”
“그러게.”
날이 저물 때도 조금 춥다 생각했는데 완연한 밤이 되자 일교차가 심했다. 두 사람은 발을 재촉하며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잠깐만. 형.”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대화도 하지 않고 잰걸음으로 가던 구영이 갑자기 걸음을 멈칫했다.
“왜 그래. 가게에 뭐 놓고 왔어?”
“형. 나한테 붙어.”
“어?”
“누가 우리 쫓아오는 것 같아.”
“뭐?”
“피해!”
구영이 낮아진 목소리로 주언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주언이 균형을 잃고 벽에 몸을 부딪쳤다. 이유를 묻기도 전,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 둘이 어둠 속에서 나왔다.
“듣던 것보다는 기감이 좋은데?”
“수다 떨지 말고 할 일 해.”
“한마디 했거든?”
주언은 아주 잠시 구영이 과민 반응한 것이길 바랐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은 어떻게 봐도 이쪽을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주언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나눈 대화는 명백히 구영에 관한 이야기였다.
“다치게 할 생각은 없어요.”
두 사람은 구영과 주언의 얼굴을 확인하며 서로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를 드러낸 사람을 살피며 주언은 마른침을 삼켰다. 주언의 능력은 전보다 못하지만 기감이 떨어진 건 아니었다.
‘능력자야.’
괴물들이 득실거리던 공격 1팀에서 지냈던 주언이었다. 상대의 역치를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다치게 할 생각은 없다는 것치고 공격할 준비가 되신 것 같은데요?”
“반항하면 제압해야 하잖아요.”
“어디서 보낸 거죠?”
“우리 아직 수료증도 못 받아서 일반인이거든요? 능력자가 일반인 공격하면 불법인 거 몰라요?”
구영이 공격 자세를 풀지 않고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두 사람의 기세가 심상찮다는 걸 구영도 알아차렸는지 겁에 질려 있었다. 어두워도 사람들이 아예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즉 지금 눈앞에 있는 두 사람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네?”
“저희도 일반인이라서요.”
물러나겠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아니. 일반인이 왜 작정하고 일반인을 공격하려는 건데요.”
“부탁을 좀 받아서요.”
유감은 전혀 없다는 상큼한 목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주언이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화면이 보이지 않지만 무엇이라도 해봐야 했다.
“누구 부탁인지 물어보면 대답해주시나요?”
“말하지 않는 것까지가 부탁이어서요. 그대신 가면 알 수 있어요.”
“부탁받은 건 저뿐인가요?”
주언은 침착함을 유지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슈욱.
“읏.”
반응할 새도 없이 거리가 좁혀졌다. 구영이 반응하기 전, 주언의 앞에 다가온 상대가 주언의 팔목을 세게 쳐냈다.
탁!
“시간을 벌려고 하는 건 좋은 시도였는데 아쉽네요.”
핸드폰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세게 친 것 같지 않은데 손목이 시큰거렸다. 주언이 손목을 붙잡으며 뒤늦게 몇 걸음 물러났다.
팟.
구영이 주언을 치고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땅을 딛고 발에 힘을 주어 순식간에 상대 쪽으로 다가간 구영이 주먹을 뻗었다.
“가만히 있는 멍청이는 아니거든?”
구영이 분한 듯 소리쳤다. 무기도, 파트너도 없었고 애초에 급 차이가 났다.
스윽.
구영이 회심의 공격을 날렸으나, 상대가 더 빨랐다. 불시에 온 구영의 공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틀어 피해낸 괴한이 구영의 뒷목을 강한 힘으로 내리쳤다.
퍼억.
“으윽!”
쿠웅.
구영의 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모든 건 찰나에 일어난 일이라 주언이 반응할 새가 없었다. 주언이 뒤늦게 구영에게 달려가 구영을 받쳐 안았다.
“구영아!”
“그냥 가.”
몸이 마비됐는지 움직이지 못하는 구영이 뭉개진 발음으로 주언을 타박했다. 호흡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괴한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더 제압하는 편이 좋으려나. 흠. 어쩔까?”
괴한은 자신의 입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소란 일으키지 말라고 했어. 데리고 가자.”
“고르는 건 그쪽이 해요.”
괴한이 선택권을 주언에게로 넘겼다. 선택지를 주는 척했지만, 압도적 우위를 점한 그들 앞에서 주언이 선택할 방법은 뻔했다. 여기서 더 반항하다가 가든지, 그냥 순순히 가든지.
주언은 윗옷을 벗어 몸이 경직되어 있는 구영에게 덮어줬다.
“그냥 갈게요. 그냥 놔둬 줘요.”
짐작 가는 사람은 없었으나 당장 자신에게 해를 가하진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범위를 넓히면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 늘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용의자가 너무도 많아진다. 결국 여기서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누가 자신을 계획적으로 습격하라고 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형!”
뒤에서 구영이 소리쳐 불렀다. 주언이 작게 사과하며 두 사람을 뒤따라 움직였다.
“미안.”
이번에야말로 가만히, 얌전히 있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는데 지키지 못하게 됐다.
“어디로 가는 거죠?”
“참. 어디 가는지 보여주면 안 돼서.”
퍽.
불시에 뒷목에 둔탁한 아픔이 느껴졌다.
안대 씌우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자신의 목을 내려친 괴한이 아차, 라고 내뱉은 목소리가 주언이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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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NDC 기자 곽도윤입니다. 현재 저는 서울 국제 컨벤션 센터 앞에 나와 있는데요.”
원래 L 호텔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회의는 급하게 국제회의 유치와 개최를 안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곳으로 장소를 변경했다.
찰칼. 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음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그 사이로 연합총회의 주축 인사들이 하나둘씩 차례대로 컨벤션 센터에 입장하고 있었다.
능력자에 관심 없던 사람들도 호텔에 예상치 못한 던전이 생기면서, 도심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폭발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반인과는 별개의 일이라고 치부되었던 던전이 일상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관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