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의회에는 허락된 아주 소수의 기자만 출입할 수 있어서 대부분의 기자들은 컨벤션 센터 앞에 서 있을 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주요 인사들이 다 들어간 후, 기자들은 회의 결과를 가장 먼저 기사로 작성하기 위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가장 앞에 있는 기자 둘이 옆쪽에 방금 막 도착한 기자를 보고 수군거렸다.
“저 선배도 여기 왔네.”
“왜 저렇게 의기양양하게 서 있지? 저번에 팀장님이 L 호텔 대신 가달라고 했는데 녹음본 잃어버려서 완전 깨졌다던데.”
“회사도 다른데 소문이 퍼질 정도면 말 다했지.”
곽성관은 두 사람이 일부러 자신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얘기했다는 걸 알았으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전이었다면 속이 쓰려서 담배를 뻑뻑 피워댔을 게 뻔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너네는 모르시겠죠. 사실 내가 엄청난 특종을 가장 먼저 낼 거라는 사실을.’
곽성관은 실적을 대충 채우려고 온 게 아니었다. 무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인물에게서 직접 연락받아 온 것이다.
‘어떻게 알고 연락했는지는 모르지만.’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간 곽성관은 기자들의 시선을 한껏 의식하며 센터 안으로 입장했다. 이미 기사 초안까지 다 써서 왔지만, 가장 중요한 건 명분이다. 이곳에 없는데 자신의 이름으로 기사가 나간다? 그러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걸 대놓고 드러내는 셈이다.
‘그런 초보적인 실수는 안 하지.’
곽성관은 자신에게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기자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각 인사가 앉을 원형 테이블이 보였다. 자신이 직접 찾아낸 건 아니지만, 자신이 낼 기사가 특종이 되리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인터넷 연결이 끊겨 이곳에서 나가기 전까지는 그 어떤 기사도 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괜히 긴장되었다.
“여명훤이다.”
“와.”
기자들의 수런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노트북을 살피고 있던 곽성관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완벽하게 넘기고, 몸의 근육에 딱 맞춘 듯한 슈트를 입은 여명훤은 국제연합총회가 아니라 혼자 화보라도 찍을 예정인 사람 같았다. 압도적인 존재감에 곽성관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몇몇은 대놓고 탄성을 터트리기까지 했다. 여명훤을 보느라 눈치 못 챘으나 옆에는 그의 부친인 여지웅 의원도 함께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기자들은 다들 연줄을 통해 들어온 거라 행사의 마지막 일정까지 꿰차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 때문에 기자들 사이에 오늘 일정에 관한 정보가 빠르게 돌았다.
“오늘 마지막에 L 호텔 관련 입장문도 내놓는다던데요.”
“따로 하지. 왜 그걸 직후에 하는 걸까요?”
“그거야 모르죠. 아마 결과가 나오는 거에 따라 다르게 대응하려나 봐요.”
주변 얘기를 귀 열고 들어본 결과, 여명훤 측의 사람은 자신뿐인 듯했다.
“후우.”
여명훤은 자신에게 이곳에 입장권을 준 사람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던전에 휘말려서 약혼식 내용이 담긴 녹음기를 잃어버렸으면 던전 내부라도 찍어오지 그랬냐며 매일같이 신나게 털리고 있었다.
일반인은 다 의식이 없었다는데 왜 나한테 난리야. 속마음은 이랬지만 상사가 까라면 까야 하는 슬픈 직장인이었다. 특히 근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기사 하나 따오지 못해 밉보이고 있어서 상사 입장에서는 잘 걸렸다 싶었을 일이었다.
‘친구 대신 갔으면 그만큼 기사 하나라도 더 따왔어야지.’
‘죄송합니다.’
그나마 희망은 옷을 빌려줬던 우주언의 인터뷰를 따는 것이었는데 연락처를 받는 걸 깜박 잊었다. 기관까지 찾았으나 그런 이름이 없다는 소식에 곽성관은 절망했다. 일을 그만둘 때가 됐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명훤이 찾아오기 전까지.
‘여, 여, 여명훤 씨?’
집 앞에 S급 능력자인 여명훤이 서 있었다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미친놈 할 일 없으면 발 닦고 잠이나 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현실성 없었다. 요즘 들어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 아닌가. 그런 사람이 왜 자신의 집 앞까지 찾아온 걸까.
‘들어가도 될까요?’
얼떨결에 집 안에 들이긴 했는데, 집 안에 들여 마주 보니까 새삼 일전에 주언의 앞을 막아서는 위압적인 모습만 기억나 덜컥 겁이 났다. 다리를 덜덜 떨며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나 검열하던 도중 여명훤이 입을 열었다.
‘혹시 L 호텔에서 우주언 씨에게 입장권을 양도했던 사실을 다른 곳에 말하신 적이 있나요?’
‘…아뇨?’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곽성관은 성실하게 대답했다. 말하지 않은 건 우주언에 대해 독점 인터뷰를 따겠다는 욕심과 곽성관도 양도받은 초대장을 또 다른 사람한테 양도했다는 소리를 하면 욕만 얻어먹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여명훤은 몇 가지 질문을 더 한 후 곽성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제안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여명훤의 속내는 알 수 없었으나 여명훤이 준 기회는 놓칠 수 없었다. 여명훤이 집 앞으로 직접 온 만큼 곽성관의 고민은 짧게 끝났다. 비밀 유지 조항 각서를 써서 어디에도 자랑하지 못했지만, 마음 같아서는 동네방네 여명훤에 대해 떠들고 싶었다. 곽성관은 들뜨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했다.
지금은 대낮이지만 회의가 끝날 때면 저녁이 훌쩍 넘은 시간일 것이다. 곽성관은 물병을 따고 목을 축였다.
**
명훤이 먼저 연락하지 않은 건 막바지 작업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목소리를 들으면 보고 싶을 거고, 다른 일은 어떻게 돼도 좋을 정도로 보고 싶어질 테니까 연락하지 않았다. 먼저 연락이 오지 않아 잠잠한 핸드폰을 바라보며 수십 번 수백 번 먼저 연락할까 고민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멋있는 모습 보여주고 싶나 보네.’
뒤에서 강노훈이 놀려댔지만 명훤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유치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오늘로 그 기다림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여명훤은 이성을 가까스로 유지했다. 표정은 놀라우리만큼 태연했으나, 속은 끓고 있었다. 입장하기 직전에 구영에게서 온 연락 때문이었다.
중요한 시간을 앞두고 있었고, 여지웅이 근처에 있어 웬만하면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구영은 명훤의 연락처를 알고 있어도 쓸데없이 연락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수신 기록을 확인하니 어젯밤에 온 부재중 통화가 있었다. 불길한 기운이 뒷목을 스쳤다. 명훤은 수행원으로 따라온 서윤진에게 전화를 들어 보이곤 인적이 드문 복도로 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 구영이 기다렸다는 듯 속사포로 말을 뱉어냈다. 울었는지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 나왔다.
-여보세요? 바쁜데 죄송해요.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 경찰에도 신고했는데 시간이 더 지나야 사건에 착수할 수 있다고 해서요.
“어. 얘기해.”
경찰 얘기라니. 명훤이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며 거칠게 호흡하는 구영의 뒷말을 기다렸다.
-어젯밤에 밥 먹고 나왔는데… 골목길에서 갑자기… 아니 작정하고 그쪽에서 시비를 걸어 와서… 어떻게든 막으려고는 했는데 상대가 너무 강해서… 주원 형이….
횡설수설하며 말했으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전달됐다.
“인상착의는?”
-마스크랑 모자를 쓰고 있어서 자세히는 못 봤어요.
“무슨 단서가 될만한 건.”
-능력자가 일반인 건들면 불법이라고 하니까 그쪽에서 자기들도 일반인이라고….
명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에스퍼지만 능력자로 등록되지 않은 경우는 거물이 뒤를 봐주거나, 능력을 개안하고 숨기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불법적인 루트로 빠졌거나. 셋 중 하나였다. 두 번째는 가능성이 낮으니 배제하면 남는 경우는 두 가지다.
거물이 뒤에서 봐주고 있거나, 불법적인 루트로 빠진 것이거나. 모든 경우에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둘씩 있었다.
저벅저벅.
복도 끝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찾으러 나온 서윤진과 눈이 마주쳤다.
“명훤 씨?”
“네.”
“이제 곧 시작이에요.”
“갑니다.”
일단 필요한 연락을 취하고, 대답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직접 나서고 싶었으나 여기까지 오느라 지금껏 공을 들였는데, 그걸 망치는 건 악수다.
통화를 마치고 제자리에 돌아오자 여지웅이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쯧. 중요한 자리다.”
여지웅의 비난조에 여명훤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그를 가늠하듯 바라보았다. 주언을 납치한 가장 유력한 용의자 중 한 명이었다.
“급한 연락이라서요.”
여명훤이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제자리에 앉았다. 아까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명훤은 언제 흐트러졌었냐는 듯, 완벽한 차림 그대로 회의실 안으로 되돌아왔다.
대놓고 묻기에는 아닐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주언을 납치할 만한 사람은 여명훤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며, 분명히 곧 원하는 용건과 함께 그를 찾아올 것이다. 여명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자리를 잡았다. 이번 L 호텔 사건을 의식해서인지 상석에 앉게 된 여명훤은 내부를 쭉 훑어보았다. 그렇게 달갑지 않은 사람들의 얼굴이 몇 보였다.
“너 없이 뭐 하나도 못하는 개라면, 그런 개는 필요 없다.”
“말씀 새기겠습니다.”
여지웅의 뒤에 있는 수행원이 서윤진을 훑는 게 느껴졌다. 서윤진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기색을 비쳤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내가 붙여준 놈을 수행원으로 데리고 오지 그랬나.”
“다른 일을 맡겨서요.”
“곧 이 회장이 네 수준에 맞는 사람들 붙여줄 테니까, 이적하기 전에 정리해.”
“예.”
“지금부터 입조심하고.”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모든 상황은 녹화된다. 외부의 개입을 막기 위해 회의하는 동안 인터넷을 제한시켰다.
‘사전에 이미 다 짜인 판이면서.’
서윤진은 혀를 내두르며 어떤 결과가 나오든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정계 인사들의 인터뷰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모르고 봤더라면 모를까, 알고 보니까 소름이 끼쳤다.
회의실 벽 중앙에 있는 시계가 정확히 정오를 가리키자, 개방되어 있던 앞문이 닫혔다. 그렇게 여러 사람이 제각각의 뜻을 품은 국제연합총회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