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매듭이 풀리기 시작하자 그 뒤에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노인네가 끼고 다니던 새끼.’
주언이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던 게 무색하게 여한올은 바로 강윤재를 떠올렸다.
풍화증 치료제 개발에 큰 기여를 했다고 한참 떠들어대서 뉴스에서 몇 번 본 적 있었다. 공교롭게도 한때는 여명훤의 옆에 붙어 있다가 나중에는 늙은이가 공식 석상에 몇 번 데리고 다녀서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라 신상 파악까지 마쳐둔 인물이었다.
처음 강윤재가 지방으로 발령났을 때, 여지웅에게 내쳐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무시할 수 없는 입지를 다지고 다시 여지웅의 품 속에 들어간 줄 알았다.
여명훤을 배신한 것도, 늙은이에게 자신의 공로를 돌리는 것도 재수 없는 새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나아가 다른 꿍꿍이까지 있었을 줄이야.
‘이용당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 반대였다니.’
결국 그 노친네도 속고 있던 것이다. 강윤재는 여지웅 품 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 그의 권력 아래서 남몰래 우주언을 감싸고 있었다. 여지웅은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불복하는 인물이 있다면 철저하게 짓밟는 여지웅의 흉포한 성정을 알고 있음에도 그를 속이다니.
“너. 강윤재랑 무슨 사이야?”
“…그게 무슨….”
굳이 언급하지 않았던 이름을 여한올이 정확히 짚어 말하자 주언이 눈에 띄게 굳었다. 솔직한 주언의 반응에 반쯤 혹시나 했던 마음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걔가 너 살린 거잖아.”
“그건 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치료제를 개발하느라….”
주언이 변명하려는 것이 가당찮은지 여한올이 말허리를 잘라냈다. 여한올이 말하고자 하는 건 치료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니 치료제 말고, 너를 감춰줬잖아.”
여지웅에게 뿐만이 아니라 여명훤에게서도. 강윤재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여명훤에게는 말해줬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꼬이지 않았을 텐데.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작정하고 속인 이유. 그 이유를 추측하면 선택지는 더더욱 좁혀진다. 여한올은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감정적인 이유가 인생이 걸린 기로의 선택지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집에서 뛰쳐나와 테러리스트가 되고, 여명훤이 우주언을 위해 기관에서 에스퍼로서 사는 걸 택했던 것처럼.
“…그건 시험을 참여한 모두가 원래 신분으로 돌아가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그래. 그런데 그건 임상 시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 한해서지. 처음부터 바꿔서 들어가진 않지.”
기억을 되찾았던 과정이 순탄치 않아서 잊고 있던 일이었다.
“그건 그냥 제 편의를 봐줘서….”
“그러니까 목숨 걸고 편의를 봐준 이유가 뭐냐니까?”
여한올 또한 인위적으로 등급을 높이기 위해 시험을 여러 번 거쳤었던 만큼 연구실 시스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대답이 중요합니까?”
“여명훤 버리고 그 새끼랑 붙어먹었어?”
“…….”
“고작 그런 이유로 넌 여명훤을 배신했고?”
여한올 자신조차 그가 곁에 두는 사람이 배신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못내 신선한 충격으로 와닿았다. 고작이라고 했지만 때때로 아주 사소한 것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는 법이다.
“하하….”
조금만 알아봤어도 미리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여지웅이 곁에 배신자를 둘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박혀 있어 더 알아볼 생각을 못 했다. 사람은 참으로 간사하다. 조금만 유연하게 생각하면 보였을 것들이 고정된 생각에 틀어막혀 보이지 않았다.
여한올이 소년같이 코끝을 찡그리며 킬킬거렸다. 하지만 주언은 그의 서늘한 눈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웃깁니까.”
여한올은 우주언이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르는 척할 수도 있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으며 그를 관찰했다. 하지만 정말로 반항 섞인 그의 눈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어렴풋이 상황을 파악을 마친 여한올과 달리 주언은 처음 듣는 정보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주언은 손에 묶인 밧줄을 풀기 위해 움직였지만, 빈틈이 생기긴커녕 손목이 쓸려 따끔거렸다. 주언은 입술을 깨물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이해할 수 없는 말투성이다. 여한올은 자신이 살아있는 걸 알고, 손을 잡았던 여명훤이 다른 마음을 품었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명훤이가 기관 몰래 AGT와 손을 잡고 있었다니.’
자신이 사라진 이후에 명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여한올의 말을 모두 순순히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모두 거짓말 취급하기엔 지금 상황이 일어난 이유를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이유 없이 납치를 계획적으로 할 리는 없을 테니까 목적이 있다는 뜻이고, 그 목적은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으니 여한올이 하는 말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직도 노인네 존재를 너무 크게 느끼고 있는 게 어이없어서.”
“…….”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여한올이 누구에 대해 말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한참을 더 웃다가 곧 건전지가 다 닳은 인형처럼 갑작스레 웃음을 멈췄다.
“그런 생각이 들면 기분이 더러워져.”
낮아진 목소리 너머로 넘실거리는 날것의 감정에 주언은 괜히 숨을 죽였다.
웃음이 뚝 멎자 정적이 파고들었다. 주언은 기민하게 한올의 상태를 살폈다. 서글서글해 보이는 외모라고 생각했으나, 표정이 없는 그의 얼굴은 살짝만 대도 베일 것처럼 예리해 보였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경황이 없어 지금껏 느끼지 못했는데, 여한올은 굉장한 미인이었다. 선이 얇아 예민해 보이는 인상도 그를 한층 더 분위기 있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닮았어.’
입양되어 피가 섞이지 않았다곤 하나, 살아온 환경이 비슷해서인지 짓는 표정이나 몸짓이 묘하게 명훤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끓어오르려던 감정을 겨우 삭인 여한올이 주언을 바라보자, 살펴보던 걸 들킨 주언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래서?”
“네?”
“목숨 구해줬으니까 좋다고 사귀다가 질려서 명훤이한테 돌아간 거 맞아?”
상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인 단어 선택에 주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의 말에 기분이 상한 주언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러지도 않아 억울했지만,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반박 못 하는 거 보니까 진짜인가 보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불쌍하네. 여명훤.”
주언을 자극하기 위해 과장되게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게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거.”
다만 여한올은 주언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을 정확히 건드렸다. 주언이 사나운 목소리로 여한올에게 답했다. 억눌려 나온 목소리에 여한올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아니라고? 그럼 특별한 관계도 아닌데 강윤재가 목숨 걸고 너를 빼내서 치료까지 해줬다는 개소리를 믿으라는 거 아니지?”
여한올의 말에 주언은 숨을 골랐다. 자신을 자극하려는 말이다. 의도가 뻔한 말에 더 발끈하면 우스워질 뿐이다.
“왜 임상 시험 하나에 강윤재가 목숨을 겁니까.”
편의를 봐줬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목숨 얘기는 너무 나간 게 아닌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주언의 대답에 여한올이 잠시 멈칫했다. 뒷목에서 열이 뻗쳤다. 주변에서 애지중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있을 수 있었던 우주언이 짜증 났다. 고작 이런 애를 위해서, 여명훤은….
“여명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여명훤 목줄 잡을 약점이 너밖에 안 남았으니까.”
“네?”
“처음에는 여지웅이 간과했던 거겠지. 여명훤이 자기처럼 누구든 쉽게 질려할 거라고 생각했었을 테니까.”
“…….”
“그런데 여지웅이 너를 주목하게 된 계기가 생겼지. 네가 기관에 남는다고 선택했을 때야. 그때 여지웅을 향한 여명훤의 증오가 최고치였을 때거든. 그래서 당연히 여명훤이 해외로 나갈 줄 알았는데 너를 따라 기관에 남았어.”
“저는 그런 얘기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어요.”
훈련생 시절, 진로를 정할 때쯤 해외에서 스카우트 얘기를 했던 명훤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당연한 수순으로 기관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해서 깊게 대화를 나눈 적 없었다. 그 당시에 자신은 명훤과 동등한 위치에 서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때 명훤이 어떤 표정으로 기관에 남겠다고 했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입 안쪽을 너무 세게 씹었는지 입안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네가 약점이 된다는 걸 확신하고, 여지웅이 너를 이용하려고 할 때 네가 사라져버렸지.”
그걸 강윤재가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주언도 그 정도는 알았다. 이제 와 물을 수도, 만약 묻는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괴로움만 야기시켰다.
“여명훤이 그렇게 싫어하던 기관에 남은 건, 나랑 손잡고 그 새끼 엿 먹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거겠지.”
과장하는 말은 있을지언정, 여한올의 말이 다 거짓이라고 하기엔 걸리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지금 이 순간에 오기까지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모두 자신의 탓일지도 몰랐다.
‘나만 아니었으면.’
명훤도, 윤재도 자신을 놓친 걸 후회한다는 모습을 보였으나 자신이 없었더라면 두 사람은 각자 자유롭게 살았을 것 같았다. 자신의 상황이 벅차서 뒤돌아보지 못했던 상황들이 설명되자 몰라서 지나치고, 내 상황이 벅차서 무시했던 감정들이 발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